〈 135화 〉 질긴 운명
* * *
"차라리 저들이 대비하지 못했을 때 먼저 선공을 나가는 건 어떻습니까?"
"기병을 상대할 방법이 없습니다."
"아르에나 후작을 상대했을 때처럼 각개격파를 하는 것은요?"
"대회전을 바라는 저들이 병력을 분산시킬지는..."
장마가 끝나고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한 초원으로 당연하다는 듯 제국군이 진군을 시작했다. 방어선을 구축할 것이라는 스승님의 예상과는 다른 움직임이었다.
그와 함께 전령에게 날아온 보고.
"...기병의 수가 오천이 조금 넘는답니다."
덕분에 우테라 성의 대전은 회의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들이 쌍둥이 성을 무시하고 뷔른 성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장마가 끝나자마자 나온 스승님의 한 마디에 모두가 아연실색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병참선이 너무 깁니다. 이 상황에 뷔른 성까지 빼앗긴다면..."
너무 큰 땅을 점령한 대가였다.
특히 부족한 군량은 절반 이상을 알만 왕국에서 지원받고 있었다.
알만 왕국에서 에어로크 왕국 북부로, 테레스 산맥을 넘어 뷔른 성으로, 거기서 다시 한번 쌍둥이 성으로.
순수한 이동 거리만 한 달이 넘는 비정상적인 거리였다.
뷔른 성을 병참기지 삼아 쌍둥이 성이 유지됐다. 23만이 넘는 대병력이 버티고 있는 건 순수하게 뷔른 성 덕분이었다.
속이 답답했다.
공격은 숱하게 했다.
헤르트에서도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공격만 주구장창 했다.
패잔병들이 모여있던 마을을 정리했을 때도, 유라페스 에슬러가 지휘하던 10만의 제국군을 공격했을 때도.
그러나 수비는 처음이었다. 수성 경험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 깨달은 것은 있었다.
사기가 달랐다.
공격할 때와 수비할 때의 사기가 달랐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대전은 처음 봤다. 어두운 표정의 왕자도, 인상을 찡그린 후작도 처음 봤다.
"카인 참모. ...혹시 좋은 생각이 있으면 기탄없이 말해보게."
그러면서 왕자는 늘 자네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아 미안하네 라는 말을 덧붙였다.
참 자기감정에 솔직한 사람이었다. 친해지고 싶다며 부담스럽게 접근해도 그리 싫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
"저들의 움직임이 우선입니다."
"움직임?"
"저들이 쌍둥이 성으로 곧장 오면, 공성을 준비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럴 확률은 없습니다."
"...그렇지."
비정상적으로 많은 기병의 숫자도 숫자지만, 무엇보다 공성 병기가 보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조립을 위해 병기가 실린 수레라도 보여야 하는데, 전령의 보고엔 그런 게 없다 나와 있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희의 능력은 여기까지입니다. 이 이상 영토를 넓히기엔 병참선이 너무 길어집니다."
"...그것도 맞네."
이미 왕국 크기보다 넓은 땅을 점령했다. 코끼리를 잡아먹은 뱀의 뱃가죽이 찢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스승님의 말처럼 저들이 우리를 지나 뷔른 성으로 곧장 향하는 경우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
여기저기에서 떠들던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집중됐다. 웅성거리던 대전이 점차 조용해지며 내 목소리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기서 저들의 행동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제 예상으론, 저들은 병력을 나눌 듯합니다."
"병력을 나눈다고?"
대회전을 바라는 이들이 병력을 나눠? 지금까지 나온 말들과 정반대되는 이야기였다. 덕분에 대전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저들이 정말 뷔른 성을 공격할 생각이라면 공성을 하는 부대와 대회전을 하는 부대가 나뉘어 질 겁니다."
"그럴 테지."
"그러나 뷔른 성을 공격하는 것이 연기라면... 뷔른 성과의 연락이 차단된 저희는 불안함에 성을 나온 순간 저들의 이십만 병력을 그대로 맞이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저들이 뷔른 성을 정말 공성하기 위해 병력을 나눴다면 저들의 본대 역시 수가 적어졌을 테니 승산이 있지만, 그게 연기라면 우리가 죽는다는 거군. ...물론 뷔른 성이 공격을 당하는지는 우리가 알 길이 없고."
"맞습니다."
그것과 더불어 우리도 부대를 나누어야 한다. 쌍둥이 성을 지킬 병력, 성 밖을 나갈 병력.
자연히 승률은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승률을 올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하나 있었다.
가장 안전한 방법.
그러나 모든 걸 포기하는 방법.
말을 꺼낼까 말까 잠시 고민하며 침을 삼켰다. 작전은 있지만, 사기가 떨어질 것은 자명했다.
"...그러니 쌍둥이 성을 포기해야 합니다."
조용하던 대전이 더 깊은 침묵에 빠졌다. 모두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경악이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느껴진다.
"...진심인가?"
"뷔른 성만 지킬 수 있다면, 기회는 다시 생깁니다. 그러나... 뷔른 성이 무너지면 본대 역시 무너집니다."
군대란 그 자체만으로 돈을 잡아먹는 하마다.
먹이고, 입히고, 무기까지 들려줘야 하며, 쓸만한 장비도 입혀줘야 한다. 이들이 쓰는 화살, 소모품, 모포까지 전무 돈이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에어로크 왕국은 허리가 휘는 중이다.
우리뿐만이 아니다. 다나크 제국도, 헤르트도, 에르딘도 허리가 휘고 있을 것이다.
23만의 병력이 먹고 자고 입을 모든 물자가 뷔른 성에 모여있다. 본대가 무사해도 머리가 잘리면 살 수 없다.
"......하지만 완전히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어떻게 얻은 쌍둥이 성인데 이걸 포기해.
20만이나 달하는 제국군이 쌍둥이 성을 한입에 꿀꺽 삼키는 건 죽어도 못 본다.
그러니 내가 잘하는 걸 해야지.
최면을 쓸 수도 없고, 에르딘의 성녀처럼 병사들에게 사기를 높여줄 수도 없다.
뷔른 성은 절대 줄 수 없다.
쌍둥이 성도 절대 안 된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것.
천천히 머릿속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안 됩니다... 슈티엔 후작님 다시 한번 재고를..."
"..."
오늘 죽겠구나.
명령서를 가져온 중년의 관리는 그렇게 확신했다.
"수도에서는 슈티엔 후작님의 계획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원래 목적대로 방어선만 구축하는 게..."
"..."
"마, 만약 후작님께서 패하신다면... 제국의 수도가 정말 불에 탈지도 모, 모릅니다."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은 예상했지만, 그와 별개로 저 짐승 같은 눈을 마주치는 게 힘들어 관리는 결국 말을 더듬었다.
다나크의 칼, 평민의 몸으로 후작까지 올라온 살아있는 영웅.
발몽 슈티엔 후작을 지칭하는 수식어였다.
슈티엔 왕, 적군만큼 아군을 죽인 자.
이 역시 슈티엔 후작을 지칭하는 수식어였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황제의 명령도 무시했다. 대답은 명령을 전달하러 온 관리들의 목으로 대신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늘 옳았었다. 아군의 목을 자른 전투는 늘 대승으로 이끌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그를 통제하는 것을 포기했다. 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들어 그를 처벌하기엔 적들을 향한 검날이 너무나 날카로웠으니까.
"...그 얘기 들었나?"
"예?"
한참만의 열린 후작의 입은 느긋했다. 삼 주 만에 움직인 병력이 반나절 만에 다시 멈추게 된 원인이 눈앞에 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래서 관리는 더 무서웠다. 그저 날파리 죽이듯 자신의 목을 자를 것 같았기에.
"헤르트의 방패가 쌍둥이 성에 있다는군."
"..."
"운명은 운명인 모양이야."
다나크의 검.
헤르트의 방패.
장장 삼십 년을 넘게 이어진 질긴 인연이었다. 강대한 다나크 제국이 헤르트 왕국을 정복하지 못한 유일한 원인이었다.
"클클클."
처음으로 슈티엔 후작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진심으로 짓는 미소였다.
그가 은퇴했다는 말에 얼마나 분노했었는가. 자신과 그는 결코 그렇게 허무하게 끝날 인연이 아니었다. 삼십 년을 넘게 싸워왔다면, 그게 걸맞게 한 명은 상대에게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운명은 운명이야. 클클."
헤르트와 에르딘의 연합군도 재미가 없었다. 신기한 능력을 쓰는 성녀란 존재는 처음 봤지만, 그뿐이었다.
서쪽으로 전선을 이동하라는 명령을 왔을 때, 그는 분노에 휩싸였다.
하루라도 빨리 헤르트를 무너뜨리고 그의 낯짝을 직접 보고 싶었다. 비겁하게 도망갔느냐고 조롱하고 죽이고 싶었다.
저 날파리같은 에어로크 왕국군 놈들을 단번에 정리하고 다시 헤르트로 향하리라.
그게 슈티엔 후작의 목표였다.
그러나 자신이 찾던 상대는 오히려 서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얼마나 즐거운 운명의 장난인가.
집구석에 처박혀 남은 여생을 즐기던 그를 죽이는 것보단 이 상황이 훨씬 반가웠다. 역시 그와 자신은 전장에서 끝을 보는 게 어울렸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그를 죽이리라.
길고 긴 인연의 끝을 볼 때가 왔다.
슈티엔 후작이 다시 즐거운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190이 넘는 거구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그 자태만으로 위압감이 천막을 뒤덮는다.
"내 대답은 하나다."
"...후, 후작님. 제발..."
스릉
단검도, 장검도, 그레이트 소드도 검을 뽑는 소리는 똑같다.
서서히 검집을 빠져나오는 은빛 검날을 보며 관리가 창백한 얼굴로 후작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후, 후작님! 뜨, 뜻은 잘 알겠으니 제발...! 제발!"
촤학
"돌려보내라."
"...아, 알겠습니다."
지휘 막사 내부에 비릿한 혈향이 맴돌기 시작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목이 잘린 머리가 막사를 굴러다녔다.
"속도를 높여라. 낙오한 병사는 군법에 따라 처벌할 것이라 전파해라."
"...예."
그 말과 함께 슈티엔 후작이 임시로 세워진 천막을 나갔다.
"..."
"..."
목이 잘린 시체와 눈이 마주친 한 지휘관은 그만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사실, 원래의 명령을 무시하고 뷔른 성으로 곧장 쳐들어가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가진 지휘관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눈을 피한 지휘관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너를 대신해 내가 죽었노라고 원망하는 듯한 그 눈빛에 도저히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뿔피리 소리와 함께 막사 밖이 어수선하다.
다시 이동하기 위해 병사들이 준비하는 소리이리라.
시체에서 시선을 돌린 지휘관들이 하나둘 막사를 벗어났다.
하나같이 자신들의 목을 쓰다듬으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