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 나도 모르고, 신도 모를 것이다
* * *
"자작도 이제 밥을 들게. 이 정도면 충분히 시원해진 것 같으니."
"알겠습니다."
아니었다.
그의 손에서 푸른 빛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천막이 다시 뜨겁게 달궈지기 시작했다.
"..."
"..."
등허리에 흐르는 땀에 지휘관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섣불리 말을 꺼내는 자는 없었다.
마법이란 학문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었다.
밥을 먹으며 마법을 펼치는 건 대마법사나 하는 일이다. 필립 자작에게 마법을 시켜놓고 자신들은 편하게 밥을 먹을 정도로 염치가 없진 않았기에 막사 안은 조용한 적막만 흘렀다.
"...그 이제 다시 해줄 수 있겠는가?"
"알겠습니다."
필립 자작이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었다. 오늘 점심은 체하지 않았을까. 사방에서 쏟아지는 눈치에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다시 차가운 한기가 실내를 식히자 그제야 지휘관들은 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법이란 참 신기한 학문이다. 저 멀리 파딘 제국은 마법사가 흔하다는데, 유독 다나크 제국은 마법사가 귀했다.
"그나저나... 슈티엔 후작님. 쌍둥이 성을 점령한 왕국군의 숫자가 무려 이십만이 넘는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이십만?"
보고는 후작에게 했으나 대답은 다른 백작이 기함과 함께 나왔다.
"이십만이 넘는다는 게 사실입니까? 처음 테레스 산맥을 넘은 숫자가 이십만이라 들었는데... 설마 제국군을 포로로 잡은 겁니까?"
"...그렇게 되면 공성은 불가합니다."
성이 하나도 아니고 두 개다.
게다가 우레타 성은 두 면을 호수가 감싸고 있어 효율적인 공성도 어려웠다.
최악의 경우 십만을 예상했는데 무려 이십만이라니. 게다가 그 수를 넘을 수도 있단다.
"...원래 목적대로 방어선을 세우고 저들의 진격을 막아야 할 듯합니다."
"..."
수도에서 떨어진 명령은 왕국군의 진격을 막으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여차하면 쌍둥이 성을 점령할 생각이었던 지휘관들은 20만이 넘는다는 말에 기가 질렸다.
하지만 슈티엔 후작은 묵묵부답이었다.
자연히 천막 내 침묵이 돌며 지휘관들이 후작의 눈치를 살폈다.
무언가 맘에 안 드는 걸까.
설마 공성을 할 생각은 아니시겠지.
그때, 두 손을 들어 마법을 펼치고 있던 필립 자작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쩌면 저들을 성 밖으로 꺼낼 수도 있습니다."
"...방법은?"
그 말에 처음으로 슈티엔 후작의 입이 열렸다. 낮고 중후한 목소리였다. 아니,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라고 해야 할까.
부리부리한 짙은 눈썹과 얼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흉터가 지난 세월을 보여주는 듯했다.
후작의 말에 필립 자작은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자신의 말을 원망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보여 용기를 내 의견을 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하마터면 집중이 흐트러져 마법이 끊길뻔했다.
병사의 몸으로 후작까지 오른, 헤르트와 수십 회가 넘는 전투를 치르며 헤르트 북부 영토의 절반을 점령해 헤르트를 제국에서 왕국으로 격하시킨 장본인이었다.
황제에게 발몽이라는 성까지 직접 하사받은 살아있는 영웅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 대회전이라면... 크흠... 죄송합니다."
"괜찮네."
너무 긴장해 음이 샜다. 서둘러 목을 가다듬은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대회전이라면 저희가 압도적으로 유리합니다. 저들의 수가 이십만이 넘지만, 저들은 뷔른 성과 쌍둥이 성을 공략했습니다. 분명 소모된 병사가 적지 않을 것이며, 소모된 병력을 제국 포로로 채워 넣었을 겁니다."
"계속 해보게."
"예... 따라서 저희는 저들이 성 밖으로 나오게 유도를 해야 합니다."
여기까진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이제 본론이다. 필립 자작은 흐트러질 뻔한 마법을 유지하느라 잠깐 말을 멈추곤 숨을 돌렸다.
살아있는 영웅이다. 그 앞에서 말을 꺼내는 것 만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동쪽에서 헤르트와 에르딘을 휘몰아치던 그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서쪽으로 발령이 났다. 헤르트와 에르딘에겐 호재겠으나 에어로크에겐 재앙이리라.
마지막으로 목을 한 번 더 가다듬은 자작이 다시 말을 이었다.
"간단합니다. 쌍둥이 성을 무시하면 됩니다."
"무시를 해?"
"예. 쌍둥이 성을 돌아 곧장 뷔른 성으로 향하면 됩니다."
"..."
후작의 눈빛에 실망의 빛이 잠깐 여렸던 것을 본 필립 자작은 간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자연히 그의 입이 빨라졌다.
"물론 이것이 뻔한 함정일 것이라 생각하고 나오지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러니 저희는 정말 성을 공략합니다. 정말 성을 공략할 수 있느냐는 중요치 않습니다. 저희는 저들에게 선택지를 주는 겁니다."
"선택지?"
"예. 대회전을 할지, 아니면 뷔른 성을 버릴지 선택지를 주는 겁니다."
"......그거 괜찮군."
한참을 침묵하던 슈티엔 후작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딱딱하게 경직됐던 분위기가 그제야 풀리며 눈치를 살피던 지휘관들은 남들 몰래 숨을 내쉬었다.
"허나 방법을 달리한다."
"예?"
"병사를 나눠 뷔른 성을 압박한다. 그와 동시에 뷔른 성과 쌍둥이 성 사이의 초원을 점령한다."
지휘관들의 시선에 의아함이 담기기 시작한 때였다. 후작과 대화를 나누던 필립 자작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저들의 보급기지는 분명 뷔른 성일터. 보급로를 끊어버림과 동시에 평야를 점령해 후퇴할 길을 막는다.
무려 20만이나 되는 대병력이 먹을 식량이 여유롭게 있을 리가 없다. 겨울이 다가올수록 저들이 느끼는 압박감은 심해질 것이다.
결국 참지 못한 저들이 나오면 순조롭게 정리하면 된다. 물론 그 전에 성을 뛰쳐나오면 더욱 좋고 말이다.
"저 비가 그치는 날이 왕국군에게 본때를 보여줄 날이 될 것입니다."
"클클."
후작의 웃음에 제국의 지휘관들은 슈티엔 후작을 따라 미소를 지었다. 자세한 이유는 몰랐다.
그러나, 자세한 작전은 나중에 필립 자작에게 물어보면 된다. 굳이 눈치 없이 질문해 슈티엔 후작에게 멍청한 놈으로 찍히는 것보단 백 배 나았다.
이미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원래의 명령과는 한참 벗어났지만, 지휘관들은 그 역시 침묵했다.
함부로 입을 열기엔, 후작의 검에 목이 날아간 지휘관의 수가 너무 많았다.
"징글징글했습니다."
"징글징글했다."
나와 스승님이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려 삼 주 만이다. 삼 주 만에 먹구름 사이로 햇살이 내려오고 있었다.
우테라 백작을 협박하기 위해 수문을 개방했던 것이 오히려 좋게 작용했다. 저수지의 수위가 낮아져서 다행이지 비가 일주일만 더 내렸다면 정말 호수가 범람할 뻔했다.
"스승님은 저들이 어떻게 나오리라 생각하십니까?"
"공성은 하지 않겠지."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제국 병사들을 소집해제 해도 되지 않을까. 20만이나 되는 제국군이 결코 작은 수는 아니었지만, 11만의 왕국군으로도 충분히 방어가 가능했다.
오히려 식량 소모가 반으로 줄어 더 오래 버틸 수도 있었다.
"...허나 소집해제도 안 된다."
"이유가 있습니까?"
"저들이 우릴 지나쳐 뷔른 성으로 갈 수도 있어."
"...설마요."
미친 것도 아니고 설마 그러겠는가.
뷔른 성에 있는 병력도 삼만에 달한다. 상대적으로 적어 보여서 그렇지 삼만의 숫자는 결코 작은 병력이 아니다.
다 합치면 무려 26만에 달하는 대병력인데 미쳤다고 평야로 들어올까.
전략이 통하는 것도 수가 적거나 지형이 특이할 때나 통하지 이렇게 넓은 평원에서 단순 숫자 싸움에서 질 리가...
"혹시 기병이 많이 오리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마."
"..."
그럼 진다.
아마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기병에게 부대가 갈라질 것이다.
대륙 최고를 자랑하는 제국 기병을 막을 방법이 없다면, 26만이 아니라 30만이 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험한 테레스 산맥을 넘느라 왕국군이 보유한 기병의 수는 극히 적었다. 게다가 원래 기병의 숫자가 많은 나라도 아니었다.
그에 반해 다나크 제국은 영토의 대부분이 고원과 평야로 이루어져 있었다. 변방에는 여전히 유목 민족이 돌아다닌다. 다나크 제국의 기병을 대륙 최고로 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
저들이 공성을 시도하면, 기병이 적고 공성 무기가 많다는 소리다.
그러나 저들이 평원으로 진입하거나 쌍둥이 성 동쪽에서 방어선을 구축하면, 기병이 많다는 소리였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들이 방어선을 구축하고 전선을 고착화하면 우린 제국 병사들을 소집해제 시키고 내정에 신경을 쓰면 된다. 실제로 내 예상에도 그렇고."
뷔른 성과 쌍둥이 성 사이의 평야로 들어오는 건 결코 안전한 수가 아니었다.
저들의 입장에서도 위험한 도박 수일 터. 이미 30만이나 되는 병력을 잃어버린 제국이 섣부르게 행동하진 않을 것이다.
만약 이번 전투도 왕국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면 제국 입장에서도 더는 여유 병력이 없을 것이다.
그땐 정말 다나크 제국이 무너질 수도 있다.
"허나, 저들이 만약 우리를 돌아 뷔른 영지로 다가가면..."
"..."
"다 같이 모여 회의를 해봐야겠구나.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성 밖에서 저들을 맞이하는 건 불가능하다. 저들도 우리도 전력을 끌어모은 상태야. 한쪽이 무너지면 그 나란 정말 끝이다."
스승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먹구름이 흩어진다. 그동안 참아왔다는 듯 햇살이 구름을 쪼개며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에 감탄을 할 법도 하건만, 나와 스승님은 묵묵히 창밖을 내려다봤다.
창 밖의 세상은 점점 밝아지는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저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공성을 할 지, 방어선을 구축할지, 아니면 정말로 쌍둥이 성을 돌아갈지.
본능적으로 마지막 전투임을 직감했다.
여기서 이기거나, 지거나, 아니면 전선이 유지되거나.
장마가 끝나고 가을이 다가올 것이다. 그리곤 순식간에 첫눈이 내리겠지.
그때 나는 어디 있을까.
제국의 수도에서 황제의 심장에 검을 박아넣었을까.
아니면 이 넓은 초원 어딘가에서 사연 많은 시체가 될까.
아무도 모른다.
나도 모르고, 신도 모를 것이다.
제갈량 같은 천재가 되지 못했다.
그러니 노력하는 둔재라도 돼야 한다.
해야 할 일을 한다.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모든 경우의 수를 파악하고, 최대한 대비한다.
이 구슬로 빌어먹는 삶이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허무하게 죽지 않으리라.
이제 시작이다.
다나크를 지우고, 헤르트, 에르딘, 알만 그리고 파딘 제국까지.
이제 겨우 첫발을 내디뎠다.
절대 허무하게 죽지 않으리라.
내년에도, 그 다음에도 저 햇살을 보며 차를 마시리라.
그리고 언젠간... 내가 살던 세상으로 돌아가리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