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33화 (133/191)

〈 133화 〉 마법

* * *

한동안 조용하던 쌍둥이 성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하늘이 찢어진 듯 떨어지는 빗방울에 훈련도 없이 쉬고 있던 병사들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왔지만, 20만이 넘는 제국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에 불평이 쏙 들어갔다.

"세상에 장마라도 끝나고 오지. 너무한 것 아닌가?"

"겨울 호수와 가까운 뷔른 영지와 이곳만 유독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린다는데? 아마 제국군이 있는 곳은 해가 쨍쨍할 거야."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군."

병사들을 오랜만에 짐 속에 넣어놨던 무기들을 꺼내 손질을 시작했다. 수로를 따라 흐르는 빗물에 부디 자신의 피는 흐르지 않기를 바라며.

"뭐라고 쓰여있습니까?"

"...제국군이 약 일주일 거리까지 다가와 멈췄다고 합니다."

물에 젖어 축 늘어진 양피지를 손에 든 2왕자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 말에 물어본 후작도, 대답한 왕자도 입을 다물었다.

일주일 거리.

참으로 애매한 거리였다.

"그곳은 비가 안 오겠군요."

"...그럴테지."

장마가 끝나길 기다리는 건가.

아니면 본격적으로 비를 맞기 전에 마지막으로 정비를 하는 건가.

처음 테레스 산맥을 넘은 왕국군은 총 20만이었다. 그중 2만의 병사가 전투로 목숨을 잃었고, 3만의 제국 병사를 포로로 잡았다.

그렇게 뷔른 성을 출발한 왕국군은 총 18만이었다.

3만의 병사는 뷔른 영지를 안정시키기 위해 남겨뒀다. 물론, 혹시나 모를 일을 대비해 뷔른 성을 지키는 부대는 순수한 왕국군이었다.

그 후 아르에나 후작과의 전투에서 4만 명이 죽고 3만을 포로로 잡았다. 그렇게 왕국군은 11만으로 줄었다.

마지막으로 쌍둥이 성이 스스로 열리며 6만의 병사들을 온전히 얻었다.

왕국군 11만.

그러나 포로로 잡혀 전향한 제국 병사들이 12만.

그렇기에 왕국군은 제국의 주민들을 절대 건들지 않았다. 포로로 잡은 12만의 병사들 역시 주변 영지 주민들의 가족이었으니까.

문제는 한 가지 더 있었다.

왕국군은 지금 지나치게 많은 영지를 점령한 탓에 배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영지를 탈환하고 깃발을 꽂는다고 끝이 아니다.

불안해하는 주민들을 달래고, 혹여나 모를 반란을 막기 위해 점령지를 돌며 병사들을 배치해야 한다.

그렇다고 포로로 잡았던 제국 병사들을 후방으로 돌릴 순 없었다.

무얼 믿고 보낸단 말인가.

쌍둥이 성을 점령한 지 고작 일주일이 지났다.

쏟아지는 비에도 전쟁의 열기는 아직 가라앉지 않았고, 겉으로는 순순히 전향된 듯싶지만, 그들끼리 붙여 놓으면 무슨 짓을 꾸밀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왕국군을 후방으로 보내기엔, 제국 병사들을 관리할 왕국군의 수가 부족했다.

이미 기형적인 구조였다.

작은 뱀이 코끼리를 억지로 잡아먹은 대가였다.

게다가 23만이나 되는 대부대가 고작 아르에나 성과 우테라 성 두 곳에 나뉘어 배치됐다.

소모되는 식량을 떠나, 두 성은 이미 한계 수용량을 넘어버렸다.

"포로로 잡을 제국 병사들을 소집 해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끊임없는 회의를 거듭한 끝에 왕국군은 포로로 잡았던 제국 병사들을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 결정도 잠시, 동쪽에서 접근하는 새로운 제국군의 출몰에 그 안건은 백지로 돌아가 버렸다.

"무려 20만이 넘는 대병력이 오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 소집해제는 무리라 판단됩니다."

"..."

저들은 어디서 병사가 무한으로 증식되는 걸까.

헤르트와 에르딘은 뭐 하고 있기에 서부로 계속해서 병사들이 몰려오는지 모르겠다.

"남은 식량 여유분은 좀 있습니까?"

"다행히 우테라 성에 있던 식량이 꽤 많았습니다. 허나 뷔른 성에서 출발할 때보다 병력이 5만이나 증가한 상황이기 때문에..."

"..."

군량을 담당하는 지휘관의 말에 대전에 자리한 지휘관들의 표정이 다양해졌다.

병사가 부족해서 고민을 하는 게 아니고, 병사가 너무 많아져서 고민이다. 게다가 절반 이상은 다나크 제국 출신이고.

자연스레 지휘관들의 시선이 서서히 내게 쏠렸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기대감이 가득 담긴 눈빛이다.

나는 전략 자판기가 아니라니까...

"결코 자네를 탓하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많은 포로를 잡게 된 이유 역시 카인 참모 덕 아닌가? 자네에게 좋은 생각이 분명 있을 거라 생각하네."

그러면서 민망한지 2왕자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이리저리 좋게 이야기했지만, 결국 네가 죄다 살려놨으니 해결 방법도 뱉으라는 소리였다.

포로로 잡은 제국 병사들 죄 머리를 분리했으면 아마 쌍둥이 성은 밟아보지도 못한 채 성문 앞에서 비를 맞고 있었을 것이다. 모조리 대가리를 잘라버린다는 소문이 났는데 성문이 절로 열렸겠는가.

"...당분간 새로 접근하는 제국군의 움직임을 지켜봐야 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상황에 맞춰 판단하자?"

"그렇습니다. 제 예상에 저들이 공성할 확률은 영에 수렴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입니다."

우테라 백작이 고작 6만의 병사로 성을 지킬 때도 공성에 애를 먹었다.

그런데 23만이나 되는 병력이 지키는 성을 공격한다?

제국군이 미치지 않고서야 접근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우리는 아르에나 성까지 점령한 상태다.

그러나 혹시 모른다.

비가 쏟아지는 우테라 영지 밖에서 진을 치고 있는 20만의 제국군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

저들 역시 쌍둥이 성을 빼앗기면 제국 서부를 온전히 뱉어내야 하기에 필사적으로 탈환하기 위해 애를 쓸 것이다.

"그럼 우선 당분간 상황을 살피기로 하고 소집해제 명령은 보류하겠습니다."

상황이 뒤집혔다. 공성은 끝이 났고, 이젠 저들을 막아야 할 차례다.

대전에 있는 지휘관들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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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태양에 달궈진 천막은 들어가는 순간 숨이 턱턱 막혀왔다. 병사들은 찜통을 벗어나 그늘을 찾고자 했지만, 나무 한 그루 찾기 힘든 초원은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결국 천막이 만들어 낸 작은 그늘에 병사들이 옹기종기 모여 한낮을 버텼다.

"하루만 더 전진했으면 좋겠구먼."

"노인장. 그럼 비를 맞아야 하는데 무기가 녹이 안 슬고 배기겠소?"

"타죽나 비 맞아 병 걸리나 그게 그거 아니겠는감?"

하늘이 반으로 갈라졌다. 자신들이 있는 곳은 구름 한 점 없는 뙤약볕이 쨍쨍 떨어졌다. 이러다 정말 타죽겠구나. 제국 병사들은 서쪽으로 보이는 어두컴컴한 구름을 바라봤다.

서쪽을 뒤덮은 저 먹구름은 벌써 이 주째 도통 사라질 생각이 보이지 않았다. 제국 서쪽은 여름 내내 비가 온다더니 말로만 들었지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저 구름이 사라지려면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다고?"

"대충 삼 주에서 한 달은 간다고 했으니 그렇지 않겠소?"

그 말에 늙은 병사는 혀를 내둘렀다. 벌써 이 주째 비가 내리는데 아직도 일주일이나 더 온다니. 자신들이 가기도 전에 왕국군 놈들이 죄 물바다에 빠져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점심을 알리는 종소리가 주둔지에 울렸다. 그 소리에 천막 그늘에 앉아 해를 피하던 병사들이 하나둘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줄 서다 몇 놈이나 쓰러질 것 같소?"

"어제보단 많을 것 같구먼."

오늘은 유독 더웠다. 밥을 먹기도 전에 더위를 먼저 먹어 쓰러지는 놈이 수두룩하겠다.

"반나절만 더 전진했으면 좋겠구먼."

"그럼 비 맞는다니까."

십인장의 타박을 들으며 늙은 병사가 수통을 열어 머리에 물을 부었다. 아깝긴 하지만 밥 먹으려고 줄을 서다 픽 쓰러지는 것보단 낫다.

젊은 놈들은 몰라도 자신은 쓰러지면 도통 일어나기 힘들다. 머리카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방물을 느끼며 늙은 병사가 걸음을 옮겼다.

창을 들고 전쟁터에 나왔는데 적어도 싸우다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더위를 먹어 죽었다고 하면 쪽팔려서 저승에도 못 간다.

태양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는다.

후작이라고 더위를 못 느끼지 않고, 백작이라고 달궈진 갑주가 거슬리지 않는 것도 아니다.

밥을 먹으러 가는 병사들은 천막도 치지 않은 채 꽁꽁 닫힌 지휘 막사를 보며 헛웃음을 켰다.

저 속에서 얼마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속닥거리길래 천막을 지키는 병사들도 물리고 저들끼리 모여있나. 아마 체면을 차리겠다고 얼굴이 시뻘게진 상태로 회의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병사들의 예상과 달리 커다란 지휘 막사는 사정이 사뭇 달랐다.

"오오...!"

"역시 마법이란 신기합니다!"

"필립 자작이 아니었으면 회의는 커녕 간단한 모임도 어려웠을 겁니다."

서늘한 한기가 중년의 손에서 연신 흘러나왔다. 은은한 파란빛을 띠는 작은 반투명한 구가 그의 손을 감싸고 있었다.

그때 지휘관 막사가 열리며 뜨거운 공기가 훅 들어왔다.

"포틸라인 남작! 빨리 들어오게! 문 닫고!"

"죄, 죄송합니다..."

지위가 깡패인지라 지휘관들의 점심을 직접 들고 온 남작은 지휘 천막을 열자마자 흘러나오는 한기에 잠깐 넋이 나가 있다 백작의 쿠사리를 들어야 했다.

그리고 보이는 필립 자작에 손에 들린 파란 구체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 마법사셨습니까?"

"얼른 밥이나 차려보게. 병사들을 못 시킨다는 게 이런 데서 좀 불편하구만."

"..."

막사 내 인원만 무려 스무 명에 가까운 숫자였다. 귀족이라는 체면도 놓고 병사들 앞에서 낑낑거리며 들고 왔는데, 고생했다는 말도 없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지위가 깡패인 것을.

포틸라인 남작은 등을 적신 땀방울을 느끼며 들고 온 점심을 조심스레 펼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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