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 그런 세계니까
* * *
"그러니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
이불 속에서 장장 한 시간을 넘게 울던 그녀를 간신히 달래 나눈 첫 마디는 자신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말이었다.
...왜 몰라.
네가 그랬는데.
묘한 색기가 넘치던 여인은 어디 가고 눈이 퉁퉁 부은 햄스터 한 마리가 앉아있다.
간신히 고개가 나온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어디서부터 네 의도가 아니었는데."
"그... 일단 옷부터 입으시면... 안 될..."
"..."
어렵사리 나왔던 얼굴이 거북이마냥 다시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그... 제 옷도..."
"..."
옷을 입은 김에 어질러진 방안도 겸사겸사 정리했다.
남들이 보면 쓸데없는 오해를 사기 딱 좋은 상태였기에 욕실에서 마른 수건을 가져와 직접 방안을 닦았다.
내 건지 그녀 건지 모를 하얀 액체들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너도 가서 씻고 와."
"....네."
침대 시트랑 이불이 제일 축축한데 그걸 껴안고 있으니...
이불과 꽁꽁 싸맨 채 욕실로 들어가는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에 하얀 액체가 말라붙어 있었다.
결국 나와 그녀가 옷을 정리하고 식탁에 마주 앉은 건 점심이 다 돼서였다.
"처음부터, 아는 대로 전부 말해 봐."
그녀의 눈에서 점멸하던 붉은 안광.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갑작스레 변한 태도엔 분명 그것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모르겠어요. 그, 그러니까...! 모르겠다는 말은... 왜 당신을 유혹하려 했는지 모르겠다는 뜻이에요."
미세하게 좁혀진 내 눈썹에 그녀가 몸을 움찔 떨며 대답한다.
어젯밤 당돌하게 방을 찾아온 그 여자가 맞나 싶다. 아침에 나를 협박하던 그 여자와는 더욱 괴리가 심했다.
"어느 순간부터... 당신을 유혹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조금 진정을 찾아가던 눈빛에 다시 혼란이 들어찬다.
두려움, 당혹, 공포.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저 얼굴이 연기라면 내가 속는 게 맞다.
"아까까지만 해도 당신이 좋았...어요. 미칠 듯이... 그런데 왜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무언가 이상한 위화감이 들었어요. 왜 좋아했지... 왜 좋아 했더라...?"
"..."
"그때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제야 계속해서 제 머릿속을 찌르는 위화감이 사라졌어요."
무언가 깨지는 느낌?
최면 같은 건가?
아니면 조종?
어쨌든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는 건가?
"지금도 날 좋아하나?"
"...저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
나도 그래 인마.
괜히 기분이 나쁘다.
어느 누구든 이성에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별로일 것이다.
그때,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무언가 생각난 듯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내 손을 덜덜 떨었다.
"헤라...! 헤라에요. 그 사람을 만나고 나서부터... 그 사람이 나는 당신을 좋아한다고...! 그때부터!"
"헤라?"
우선은 그녀를 진정시켜야 했다.
아까보다 더 큰 혼란에 빠져있었다.
덜덜 떨리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나를 보게 했다.
그러자 아주 천천히 그녀의 두 눈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자세히 설명해봐."
긴장으로 굳은 얼굴을 힘겹게 움직여 최대한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싸한 기분이 돈다.
명백한 불안감이었다.
"그러니까... 이 전쟁이 시작되기 전이었어요. 어느 날 알만 왕국의 상단이 아버님을 뵙고 싶다며 찾아왔었는데..."
"거기에 헤라라는 사람이 있었고?"
"...네. 저는 후계자로서 일을 배우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님이랑 같이 응접실로 갔었는데... 거기엔 그녀 혼자 우릴 기다리고 있었어요."
"..."
"갑자기 저보고 마음에 든다고 하더니... 그때, 눈이 붉게 변했어요. 기억나요."
"눈이 붉게 변해?"
눈이 붉게...?
갑자기 붉게 변했다고?
'...!'
머리를 부여잡고 혼란에 빠졌던 그녀의 역시 눈이 붉게 변했었다.
싸한 느낌이 더 강하게 든다.
헤라...
알만 왕국의 대리자인가? 그리고 그 능력이 사람을 조종하는 능력이라고?
아니다.
아직 속단하기엔 이르다. 상인으로 변장을 하려면 자신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외모는 어땠어."
정말 알만 왕국의 대리자일지 아닐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가 마법을 썼든, 아니면 정말 대리자로서 어떤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이든 유의해야 할 사람인 것은 맞았다.
"수수한 생김새였어요. 아! 외모는 정말 아름다웠는데 갈색 머리에 갈색 눈이 정말 수수했...... 저 방금 그 사람 눈이 붉었다 하지 않았나요?"
갈색 머리에 갈색 눈...
수수한 외모에 비해 정말 아름다운 외모?
...!!!
온몸에 소름이 좌악 끼쳤다.
등허리가 짜릿할 정도로 끼치는 소름에 몸이 굳을 정도였다.
'헤일리를 조심하세요.'
'작년에 저희 영지를 찾아왔어요. 말을 굉장히 잘하는 듯해요. 그 사람을 만나고 아버지가 변했어요.'
기억의 편린이 무언가를 더듬는다. 뷔른 성에서 있던 기억을 끄집어낸다.
'헤일리라는 사람이 다녀간 뒤 사람이 변했어요. 무언가 다급해 했고... 중앙으로 가고 싶어 하셨어요.'
'굉장히 수수한 인상이었어요. 갈색 머리에 갈색 눈 때문에 오히려 미모가 깎인다고 해야 할까요?'
헤라...
헤라...
헤일리...?
유라페스 헤일리?
"...그 사람을 만나고 네 행동이 변했다는 건가?"
"맞아요. 나는 당신을 좋아한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정말 당신이 좋아졌어요. 생전 본 적도 없는 사람인데."
"..."
"그리고... 당신을 아슬란 영지로 데리고 와야 한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정말로... 당신을 데려가야만 할 것 같아서..."
유라페스 헤일리.
다나크 제국의 대리자를 찾았다.
등 뒤로 다시금 우수수 소름이 돋는다.
내가 다나크 제국을 노리고 전쟁 준비를 할 때, 그녀는 나를 직접 노렸다.
만약 내가 루시를 따라 아슬란 영지로 돌아갔다면?
...다시는 현대로 돌아가지 못 할 뻔했다.
나를 어떻게 알았지?
내가 대리자인 건 어떻게?
헤르트 전쟁에서 눈치챘을까?
자신이 외부활동을 한 건 그때가 유일했다.
만약 그녀가 헤르트와의 전쟁 당시 헤르트의 대리자를 찾기 위해 수소문 중이었다면, 오히려 내 소문을 들었을 확률이 높았다.
"지금도 영지로 데리고 가고 싶어?"
"아니요. 지금은... 전혀요."
"조금도?"
"...네. 왜, 왜, 왜 다가오세요?!"
연기 같지는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자 그녀 역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났으니 말이다.
만약 오늘 아침이었다면...
'흐응... 더 하고 싶어요?'
그러면서 나를 껴안으면 껴안았지 도망갈 일은 없다.
"다, 다, 다가오지 마세요...!"
"..."
누가 보면 정말 내가 겁탈한 줄 알겠다. 피해자는 난데 네가 왜 도망가냐.
한숨을 푹 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네? 예? 뭐를요?"
"그냥 없던 셈 치자고. 둘 다 서로에게 감정도 없잖아."
어쩌면 그녀의 혼삿길이 막혔을지도 모른다. 처녀는 내가 가져갔으니.
백작 영지를 다스리는 젊은 여인이라...
결혼만 하면 팔자를 필 수 있을 테니 하루에도 열 번씩 혼사가 들어올 대물일 것이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내가 겁탈한 것도 아니고 엄밀히 따지면 그녀나 나나 피해자일 뿐인데.
그런데 흔쾌히 돌아올 줄 알았던 대답이 함흥차사다.
잠시 책상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다 의아함이 들어 고개를 드니 그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진심이에요?"
...나 안 좋아한다며.
나도 너 안 좋아하는데.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할 말이 목구멍에서 맴돌다 내려갔다. 한 시간 넘게 이불 속에서 울던 그녀가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에.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은 상대방에게 흘러간다.
그러니, 말을 하는 내 입장보다 그 말을 들을 상대방을 생각해야 한다.
연애와 결혼은 분리하는 현대인과 두 말이 같은 뜻으로 통하는 이 세계 사람과의 차이점을 모를 만큼 눈치가 없진 않다.
결국, 서로의 감정을 떠나 어젯밤 일로 인해 그녀가 느낄 상실감은 컸을 것이다.
"말실수야."
"..."
"미안해."
"..."
따지고 보면 내 잘못은 아니다. 그녀도 그걸 안다.
그러나 내 말이 상처가 됐을 수는 있다.
"...아니에요."
"..."
두 눈이 벌겋다.
감히 시선을 마주치고 있기엔 미안해서 다시 책상으로 눈을 돌렸다.
그때, 그녀가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이고는 방문으로 걸어갔다.
"당신 말대로 우린 서로 감정도 없고... 우리 둘 다 피해자니까..."
"..."
"그냥 잊으세요. ...저도 잊을 테니까."
그 말과 함께 방문이 열렸다.
아마... 내가 여기서 그녀를 붙잡으면 잡히지 않을까.
어쩔 수 없다는 듯 책임지겠다고 한다면, 그대로 내 영지까지 따라오지 않을까.
그런 세계니까.
내가 아닌 원래의 카인이었다면 분명히 그녀를 책임졌을 것이다.
그런 세계니까.
그러나 나는 카인이 아니다.
있지도 않은 감정을 만들고, 그녀까지 사랑하기엔 엘라와 시아라만으로 충분했다.
그저 트로피처럼 여인들을 수집하려 했다면, 디아나부터 시작해 샬롯까지 수많은 여자를 안을 수 있다.
마침내 방문이 닫히고, 그녀가 사라졌다.
그녀의 등 뒤로 미련이 남아 보이는 건 내 착각이었을까.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차라리 자연스럽게 친해졌다면, 미처 내가 인식하기도 전에 그녀가 내 마음에 자리를 잡았다면, 당당하게 영지로 데려갔을 것이다.
엘라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억지로 마음을 넓혀 그녀를 받아주기엔, 첫 만남이 너무 안 좋았다.
타의에 의해 시작된 관계.
약에 취한 첫날 밤.
그녀와 나 모두에게 평생을 따라다닐 괴로움이 될 것이 뻔했다.
특히나 그녀에게는 더더욱.
그래서 그녀를 잡지 않았다.
차라리 냉정하게 끊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아서.
"..."
입맛이 쓰다.
휴가 첫날부터 스펙타클하다.
일부러 활기차게 자리에서 일어나 물병으로 다가갔다.
얼음물 안 먹은 지는 얼마나 됐더라. 여기에 정수기나 있으면 좋을 텐데.
쓸모도 없는 회계 배워서 뭐 했나 싶다. 내가 공돌이였다면 과학으로 이 대륙을 지배하지 않았을까.
"..."
물을 마셔도 입을 맴도는 씁쓸함이 안 사라진다.
헛생각도 의미 없다.
에이 시발.
내 잘못도 아닌데...
나도 이 세계에 물들었나 보다.
시간은 흘러간다.
사람이 죽어도, 생명이 태어나도, 그 느린 국방부 시계도 결국은 흘러간다.
일주일 만에 나간 회의는 여전했다.
상석에 앉은 2왕자, 좌우에 나눠 앉은 후작과 스승님, 그 옆을 채운 백작을 위시한 수많은 귀족. 그리고 마지막에 놓인 내 의자.
"일주일간 잘 쉬었나?"
"예. 왕자님도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물론이네."
몇몇 뜨문뜨문 빈자리가 보인다.
길고 긴 쌍둥이 성 전투가 끝났으니 휴가를 쓴 사람이 많은 듯했다.
"자네는 운이 참 좋네."
"예?"
자리에 앉자마자 날아오는 말이 뜬금없다.
운이 좋다니?
휴가때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오히려 운이 안 좋으면 안 좋았지 좋은 적은 없었다.
"오늘 저녁 회의는 전체 소집이었거든."
"...운이 좋았군요."
방에서 쉬던 지휘관들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휴가를 써놓고 출근을 해야 하니 말이다.
그런데 웬 전체 소집인가 싶다.
여전히 하늘은 비를 쏟는 중이었다. 길고 긴 장마는 겨우 사분지 일이 지났으니 출전을 준비하는 회의도 아닐 것이고...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있었지. 아주 큰 일."
"..."
뭔데 이렇게 겁을 주나.
이 날씨에 나가서 참호를 파라는 명령만 아니면 절대 놀랄 생각이 없었다.
아니면 정식 승전 파티가 열리나?
"...전방에서 제국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네. ...그 수는 약 이십만."
"...예?"
"비 때문에 시야가 가려 정확한 수는 아니지만... 어쨌든 제국군이 곧장 이 성으로 오고 있네."
휴가보다 더 스펙타클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