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 붉은색
* * *
몸이 뜨거웠다.
심장 어딘가에 불덩이가 들어가면 이런 느낌일까.
자꾸만 끊어지는 의식 사이로 부드러운 무언가가 손에 잡혔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이 흐릿한 시야 사이로 보이는 것 같다.
시아라인가?
아, 전쟁이 끝났다.
전쟁이 끝나고 영지로 돌아왔나 보다.
초점이 자꾸만 맞지 않는다. 그저, 이 가슴을 불태우는 듯한 뜨거움을 해소하고 싶었다.
...
꿈속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기분이다.
유난히도 일어나기 힘든 아침에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아 정신을 차리려는 그 기분.
꿈과 현실을 왔다 갔다 하며 몽롱한 의식을 헤매는 기분이다.
눈앞엔 여전히 시아라가 보인다.
검은 머리카락에 얇은 허리.
그리웠던 그녀가 나를 껴안았다.
...
갑작스레 몰려온 강력한 사정감에 흐려졌던 의식이 조금 돌아왔다. 그제야 가슴을 태우던 불덩이가 조금 해소되는 기분이다.
부드러운 살결이 만져진다.
검은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질였다.
시아라인가?
그녀를 꽉 끌어안고 본능적으로 허리를 움직였다.
이 가슴 속에 갇힌 불덩이를 끄집어내고 싶었다.
그렇게 세 번, 아니 네 번일까. 잘 모르겠다.
점점 뚜렷하게 들리기 시작하는 여인의 교성을 들으며 계속해서 파정을 했다. 그때마다 가슴을 달구던 열이 차츰 식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아라에게 사정을 했을 때, 가슴을 태우던 불덩이가 완전히 사라졌다.
땀과 열기로 가득한 그녀를 끌어안았다.
여전히 달뜬 신음을 터트리는 시아라가 품속으로 들어왔다.
상쾌한 아침이다.
제국과의 전쟁도 끝났고, 영지로 돌아와 맞는 첫 아침이다.
그나저나 엘라는 어디 있지?
꿈결에 봤던 머리색은 검은색뿐이었다.
찬란한 밝은 금발을 찾아 흐릿한 시야로 여기저기 둘러봤다.
어제 술을 마셨었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붉은 와인을 마셨던 것 같기도 하다.
나와 그녀들은 늘 화이트 와인만 마셨는데...?
정신이 없는 와중에 눈을 비볐다. 주변을 좀 제대로 봐야 정확한 상황 판단이 될 것 같았다.
"시아라. 엘라는?"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아직 정신이 없는지 시아라의 대답이 없다.
밖은 비가 오는지 창문 밖이 어둑어둑했다.
"...저 죽는 줄 알았어요."
"......뭐?"
낯선 목소리다.
아니, 정확하게 따지면 낯선 목소리는 아니었다.
바로 어제까지 들은 목소리였으니까.
...바로 어제?
그제야 나는 방안의 풍경을 또렷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에 하얀 살결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의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몸 여기저기가 울긋불긋 붉게 물들어 있었고, 하얀 백탁액이 그녀의 몸 곳곳을 장식하고 있었다.
"..."
식탁 위를 뒹구는 와인병이 보였다. 반쯤 마신 와인잔도 보인다.
그제야 나는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물론, 여전히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시아라도, 전쟁이 끝난 것도 다 허상이었다.
그저 맥락 없던 단편적인 감각을 스스로 이해시키기 위한 착각이었다.
"...그런데 시아라가 누구인가요?"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지?
"분명 저한테 연인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
그게 중요할까.
분명 어제 그녀가 먼저 과일을 먹었다. 와인도 내가 보는 앞에서 개봉을 했고, 그녀가 먼저 마셨다.
도대체 언제.
언제 약에 당한 거지?
겨우 와인 한잔도 못 마시고 뻗을 정도로 술이 약하지 않다. 분명 원래 계획은 술에 취한 척 그녀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왜 그랬지?"
결국 내 입에서 나온 첫 말은 원론적인 질문이었다.
해코지를 한 것도 아니다.
어디 납치를 하거나, 몸을 묶어놓은 것도 아니다.
굳이 약을 써가면서까지 나와 몸을 섞은 이유가 뭐지?
자연히 내 시선이 싸늘해졌다.
그녀와 몸을 섞은 사실이 싫은 게 아니었다. 그녀의 의도를 모르기에 나오는 자연스러운 경계 본능이었다.
"저를 속였군요."
"속인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분명 여자를 모른다 했잖아요."
"그게 뭐가 중..."
화를 낼 사람은 난데 왜 그녀가 나를 노려보는가. 분노와 슬픔이 섞인 시선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침묵이 방을 맴돌았다.
그녀와 나는 눈을 피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봤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가 돌연 표정을 바꾸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평소의 그 묘한 색기가 넘치는 눈빛이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뭐가."
"엘라... 라고 했나요? 그것도 한 명도 아닌 둘이나 있다는 거군요."
"..."
"그녀들을 버리고 저한테 오세요. 아슬란 영지를 드릴게요."
그녀를 처음 대면한 날이 떠오른다.
처음 참모 막사에서 눈이 마주쳤을 때부터 그녀는 줄곧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곤 다가와 내가 아닌 스승님께 말을 걸었고, 내 소개를 하자 이름만 들었다고 대답했다.
나를 몰랐다는 사람이 나를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었다고?
거기서부터 내 의심이 시작됐다.
최대한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숙맥을 연기했다.
그래서 연인이 없을 거라고 착각한 건가?
"싫어."
"거절하는 건가요?"
"응."
일말의 미안함도 없었다. 애초에 이 모든 사태는 그녀의 의도였으니까.
그러나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나는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당신이 저를 방으로 끌고 와서 약을 먹이고 겁탈했다고 보고 할 거에요."
"...뭐?"
망치로 뒤통수를 강하게 맞은 기분이었다. 어이가 없어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이게 원래 목적이었나?
아니 여기에도 꽃뱀이 있네.
놀란 마음에 순간 검의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가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 저를 죽이려고 한 건가요?"
"..."
양심에 찔려 차마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다. 눈이 돌아가는 걸 그녀가 똑똑히 보고 있었으니까.
"전쟁 영웅의 명예가 땅까지 떨어지고 싶은 건가요?"
"그건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그냥 저를 따라 아슬란 영지로 가면 돼요. 그럼 아무에게도 이 일을 말하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누가 들으면 내가 정말 그녀를 겁탈한 줄 알겠다.
어이가 없어 정말 검을 들까 고민을 하는 와중에 그녀의 말이 어색함을 깨달았다.
...왜 그렇게 아슬란 영지에 집착을 하지?
분명 그녀의 말에 어딘가 위화감이 있었다.
그녀가 나한테 접근했던 순간.
나를 처음 본다며 친하게 지내자고 했던 순간.
분명 그때 나는 스승님의 후광에 밀려 낙하산 취급을 받고 있었다. 본격적인 대접을 받은 건 테레스 산맥을 넘어서부터였다.
그런 낙하산을 미리 제거하기 위해 그녀가 그때부터 나한테 접근을 했다고?
떨어질 명예가 어디 있어서?
...어딘가 이상하다.
즉, 그녀는 지금 처음부터 내 명예를 떨어뜨리기 위해 접근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나를 협박하는 진짜 목적은 나를 아슬란 영지로 데려가는 것.
거기에 뭐가 있길래 에어로크와 알만 왕국 국경 사이에 있는 영지로 데려가려는 걸까.
"...아니면 당신의 두 연인도 함께 가요. 그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어요."
"..."
차라리 아슬란 영지에 무언가를 숨겼다고 대놓고 말하는 게 낫겠다.
엘라와 시아라 둘도 서로를 인정 못 해서 그렇게 싸웠는데, 이렇게 한순간에 그녀들을 이해해 주겠다고?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누군가 그녀에게 정말 사주를 한 거라면, 큰 실수를 했다.
이렇게 나사가 빠진 모습으로 어떻게 누굴 속이겠다고.
어쩌면 정말 내가 숙맥이었고, 아무런 연인이 없었다면 고개를 끄덕였을 수도 있다.
게다가 굉장히 보수적인 분위기인 이 세계에서 누군가와 동침한다는 건 곧 결혼을 한다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었으니 말이다.
근데 어떡해.
난 이 세계에 비하면 문란하기 짝이 없는 현대인인데.
만약 그녀가 정말 순수한 의도로 나를 유혹했고, 술에 취해 실수로 그녀와 하룻밤을 보냈다면 책임을 지기 위해 영지로 데려갔을 것이다.
나는 아무렇지 않았겠지만, 그녀는 정말로 큰 상심을 했을 테니까.
"왜 그렇게 아슬란 영지로 데려가려 하지?"
"당신과 함께 살고 싶으니까요."
"나를 좋아하나?"
"네."
나를 왜 좋아할까.
이유나 들어보고 싶었다.
테레스 산맥을 넘기 전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사랑은커녕 호감을 쌓을 기회도 없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약을 먹여서 강제로 하룻밤을 보낼 정도로 나를 좋아한다고?
"나를 왜 좋아하지?"
"...그건."
방안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반응은 다시 내게 혼란을 가져왔다.
왜 대답을 못 하지?
약을 타서 강제로 관계를 가질 정도로 좋아했다면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하다못해 전공을 세우는 모습이 멋있었다는 평범한 변명도 있다.
그때, 돌연 그녀가 얼굴을 찡그리며 머리를 붙잡았다.
"그건... 그러니까... 그러니까..."
"...?"
어딘가 나사가 빠져 보이는 모습이었다.
어려운 질문도 아니었다.
그녀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다면 더욱더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묘한 색기가 넘치던 그녀의 얼굴이 혼란으로 가득했다.
머리를 붙잡은 두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쯤 되면 이상함을 못 느끼는 게 더 어색하다.
"제가... 당신을 왜... 좋아하죠?"
"뭐?"
그리고 그녀가 말을 마친 그 순간,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서 붉은 빛이 점멸했다.
'...!'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마치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는 듯한 아주 짧은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뭐지?
내가 뭘 본거지?
분명 착시는 아니었다. 서로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보고 있었기 때문에 확실했다.
서로가 서로를 혼란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그때,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지더니
"꺄아악!"
훤히 드러났던 그녀의 나신이 순식간에 이불 속으로 사라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