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30화 (130/191)

〈 130화 〉 죽이면 안됩니다.

* * *

샬롯의 경고처럼 한번 내린 비는 도통 그칠 줄을 몰랐다.

우테라 성을 당당하게 걸어 들어간 왕국군은 끝을 모르고 내리는 비에 모두 질린 표정이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제국군 지휘관들이 회의를 하던 대전엔 왕국군 지휘관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죽이면 안 됩니다."

"그가 이 성을 다스리던 영주라는 걸 알고 하는 소리 맞는가?"

"알고 있습니다."

내 말에 대전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 역시 내 주장이 무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전쟁의 패배는 결국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니까.

그래도 안 된다.

'81!'

대어였다.

그것도 완전 초대어.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80이 넘는 사람이 95의 스승님을 제외하면 단 한 명도 없었기에 더욱 큰 대어였다.

그동안 쌓은 공적의 힘이 대단하긴 한가 보다.

한참을 닫혀있던 왕자의 입이 다시 조심스레 열렸다.

"...이유가 있는가?"

"우테라 성 주민들에게 쓸모없는 성역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성역?"

"십만에 가까운 주민들을 살리기 위해 왕국군의 협박에 희생한 영주라는 소문이 퍼질 확률이 높습니다. 후에 부임할 에어로크 왕국의 귀족이 잘못 영지를 다스린다면, 과거를 그리워하는 주민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

이마에 쓰인 숫자가 크느니 그런 말은 할 수 없다.

물론 후에 이 곳에 부임할 다른 영주가 주민들을 다스리는데 어려움이 꽃피는 건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뷔른 백작 역시 포로로 살아있습니다. 우테라 백작에게 죄를 물어 제거한다면, 분명 뒷말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내 말에 대전에 있던 반수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매일같이 회의만 하다 보니 말발만 늘고 있다.

"그래도 완전한 사면은 불가하네. 그가 뒤에서 어떤 짓을 꾸밀지 모르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첫술부터 배부를 수는 없다.

일단 그의 목숨을 살렸다는 것에 만족하며 물러났다.

81이 넘는 능력치라니.

벌써부터 써먹을 곳이 잔뜩 생각났다.

하다못해 자택 경비를 시켜도 남들보다 뛰어날 것이다. 어쨌든 그것도 수성은 수성이니까.

그 후로도 회의는 진행됐다.

다음 진격 시기부터 댐의 보수 공사, 민심을 위한 구호물품 배급까지 다양한 안건이 올라왔다.

결국, 아침부터 시작된 회의는 저녁이 돼서야 끝이 났다.

오늘따라 유독 시간이 안 가는 기분이다.

회의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나는 대전을 빠져나오자마자 누군가를 보기 위해 곧장 내성 지하로 들어갔다.

"저녁은 드셨어요?"

"...사절?"

"이제 사절은 아니죠. 참모에요. 저."

"..."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요?"

감옥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옛날 샬롯이 갇혔던 고문실에 비해 두 배나 넓은 크기에 한켠엔 화장실도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문을 따고 들어가자 발목에 족쇄가 걸린 우테라 백작이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무슨 생각이지?"

"네?"

"곧 죽을 사람 구경 왔나? 취미 한 번 고약하군."

무슨 소리야.

당신 살리려고 내가 얼마나 진땀을 흘렸는데.

"안 죽어요. 그리고 그런 취미도 없고."

"뭐?"

"안 죽는다고요. 당신 죽여봤자 누구 좋으라고 죽여요."

"..."

그럼에도 여전히 백작의 표정은 싸늘했다. 하긴, 믿을 사람이 따로 있지 어제까지 적이었던 사람의 말을 단숨에 믿긴 힘들 것이다.

"일단 배고픈데 밥이나 먹을까요?"

나는 곧장 간수를 불러 제대로 된 식사를 준비하라 일렀다.

"발목에 족쇄도 풀어줘."

"참, 참모님? 그건..."

"...너 어디서 많이 봤는데?"

"푸, 풀겠습니다!!!"

조금 낯이 익다 했더니 옛날 샬롯을 보며 눈빛을 번들거리던 그놈이다. 내 말에 사색이 된 그가 순식간에 족쇄를 풀고는 감옥 밖을 빠져나갔다.

"...미쳤는가?"

"이럴 땐 고맙다고 하는 거예요."

"...미친 게 맞나보군."

자유롭게 풀린 발목이 어색한 듯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백작이 내 말에 어이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굳이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이 사람을 내 밑으로 영입할 수 있을까 머릿속이 팽팽 돌아가느라 바빴다.

잠시 조용한 침묵이 찾아왔다.

백작도 나도 딱히 할 말이 없었기에 둘 다 입을 다물고 있던 그때, 감옥문이 열리더니 간수가 간단한 수프와 빵을 들고 들어왔다.

따끈따끈한 것이 나름 신경 써서 가져오긴 했다.

그에게 잘했다는 뜻으로 미소를 지어주자 간수가 어색하게 웃으며 접시를 내려놓곤 곧장 문밖으로 나갔다.

"먹으면서 이야기할까요?"

"그러지."

역시 할 말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는지 그는 별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빵을 집었다.

나도 이제는 익숙해진 빵을 집어 들고 한입 베어 물었다.

쌀밥을 언제 마지막으로 먹었더라.

이 세계로 넘어온 지 4년이 됐으니 그 정도 됐다.

"일단 백작님이 안 죽는 건 사실이에요. 제가 직접 건의한 거예요."

"..."

"별로 안 고마운가 보네요?"

"애초에 이 감옥에 갇힌 게 너희 때문 아닌가? 병 주고 약 주는 것에 감사를 해야 할지는 모르겠군."

쓰읍.

이 양반 말 잘한다.

반쯤 먹던 빵을 내려놓으려다가 다시 집었다.

그것에 대해선 할 말이 없었으니까.

"확답은 드릴 수 없지만, 앞으로 백작님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두 가지 있어요."

"두 가지?"

내 말에 이번엔 그가 빵을 내려놓았다.

약간의 불쾌감과 호기심이 섞인 묘한 표정이었다.

"하나는 이렇게 감옥에서 사시는 것이고..."

거기까지 이야기한 나는 백작의 눈치를 살폈다.

이곳에서 평생 갇혀 지내는 건 죽은 것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삶이다.

역시나 그의 눈썹이 살짝 모이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다른 하나는 에어로크 왕국으로 전향을..."

쨍그랑!

"..."

"개소리하지 마라."

미리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기에 망정이니 아니면 뜨거운 수프를 모두 뒤집어 쓸뻔했다.

얼굴 바로 옆을 지나간 접시는 그대로 벽에 부딪혀 하얀 흔적을 그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려고 족쇄를 풀고 빵을 갖다줬나? 차라리 죽여라."

호기심이 사라진 얼굴은 순수한 분노만이 남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응이 격할 것이라고 예상은 했다.

접시가 스치며 지나간 귓볼을 조심스레 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아들과 아내도 그 말에 동의할까요?"

"...뭐?"

"가서 똑바로 말해주겠습니다. 나는 감옥을 나갈 기회를 줬는데 백작이 걷어차 버렸다고. 그래서 너희들 모두 죽을 때까지 평생 감옥에 갇혀 지내야 한다고."

붙잡힌 포로에게 이 정도 예의를 차렸으면 충분히 했다.

그의 능력치가 아쉬워서 한 번 설득을 시도해보려 한 것이지 굳이 그에게 매달려가며 등용할 생각은 없었다.

"저녁은 다시 넣어드리겠습니다. 앞으로 매끼 먹어야 할 텐데 정이라도 붙여야죠."

"..."

갑작스럽게 변한 내 태도에 당황을 한 건지, 아니면 가족을 들먹여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말이 없어진 그를 바라보다 천천히 몸을 돌려 문으로 다가갔다.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그동안 잘 생각해보길.

어차피 할 일이라곤 없을 테니 말이다.

­­­­­­­­

"어흐. 개운해."

얼마 만에 이렇게 개운하게 씻는지 모르겠다. 뷔른 성을 떠나고 처음이니 근 한 달은 됐다.

하루만 노숙을 해도 몸에서 냄새가 살살 난다.

거기에 비까지 오면?

생긴 건 귀엽게 생긴 펭귄도 가까이 다가가면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난다 했나.

근 이십만 명이 넘게 지내던 주둔지 역시 겉으로 보기엔 든든하기 짝이 없었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코를 찌르는 쉰내가 장난 아니었다.

정말 오랜만에 따뜻한 물로 몸을 불리곤 때를 벗겼다.

때 타올 같은 건 없지만 거친 천은 넘치도록 있으니 최선을 다해 박박 문질렀다.

역시 한국인은 때를 밀어야 해.

이 장마가 끝나기 전까진 한동안 우테라 성에서 머무르리라.

거진 한 달의 휴가가 생겼다는 뜻이다.

저번에 짤렸던 휴가를 마저 쓰고 왔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절대 침대에서 안 떨어지리라.

그러나 내 다짐은 불과 하루가 가기도 전에 깨지고 말았다.

똑똑

"...누구십니까?"

"저예요."

문 앞에 서자마자 누군지 한 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애초에 나에게 존댓말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기도 했거니와 이 전쟁통에서 들을 수 있는 여인의 목소리는 그녀가 유일했다.

"루시 참모님?"

"그냥 루시라고 부르시면 안 될까요?"

문을 열자마자 향긋한 여인의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전쟁통에 있어도 여자는 여전히 여자라는 뜻일까. 매일같이 흙냄새만 맡다 오랜만에 실려 오는 꽃냄새에 나도 모르게 숨을 강하게 들이쉬었다.

아슬란 백작의 딸이라 했었나.

지난 테레스 산맥을 넘기 전 나를 도왔던 참모였다.

행동이나 말투에서 수상함을 느껴 경계를 하던 여인이었다.

"여긴 어쩐 일로..."

"그냥 심심해서요. 혹시 바쁘셨나요?"

언... 젠가 겪었던 일 같은데?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몸을 휘감았다 사라졌다. 분명 대사까지 똑같았다.

"아뇨. 일단 들어... 오시겠습니까?"

"후후. 혹시 문이 다시 닫히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설마요. 제가 그러겠습니까."

"전쟁이 끝나면 왕국의 영웅이 되실 텐데 미리 친해지고 싶어 왔어요. 괜찮죠?"

마치 제방을 드나들 듯이 그녀가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그런데, 문틈으로 보이지 않던 그녀의 두 손에 뜻밖의 물건이 들려있었다.

"혹시... 술입니까?"

"네. 승전을 축하할 겸? 술은 잘 드시나요?"

새빨간 와인이었다.

어디서 공수해왔는지 코르크를 막은 라벨이 꽤 고급스러워 보였다.

"으음... 잘 못 마시긴 합니다만, 오늘 같은 날은 마셔도 괜찮겠죠."

내 말에 그녀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초승달처럼 휘는 눈꼬리에 눈 밑에 찍힌 점이 야릇하게 움직였다.

"흐음... 저도 잘 못 마시는데... 딱 한잔만 할까요?"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 눌렀다. 날카로운 통증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앞의 여인이 시아라나 엘라였으면 고민도 없이 침대에 던졌을 텐데, 상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이다.

저 와인에 혹시 약을 타진 않았을까.

거절의 뜻을 내비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위기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번에 저 여자의 속셈을 파악할 수 있다면 충분히 시도할 만했다.

부디 와인에 들은 약이 독약이 아니길 바랄 뿐.

그렇게 갑작스러운 술상이 펼쳐졌다.

안주는 그녀 반대 손에 있던 작은 과일이 전부였다.

"이 초원에서만 나는 과일이래요. 맛이 달다고 해서 챙겨왔어요."

사과같이 생긴 과일을 반으로 똑 뗀 그녀가 반절을 내게 주고는 나머지를 그대로 베어 물었다.

립스틱을 바른 듯 붉은 입술과 그 안으로 보이는 가지런한 치열이 시선에 들어왔다.

작은 입으로 앙 베어 문 그녀가 몇 번 입을 움직이더니 눈을 빛냈다.

"어머! 정말 달아요."

...정말 순수한 의도로 승전을 축하하러 온 건 아닐까.

생긴 것과 다르게 꽤 귀여운 행동이었다.

사과처럼 붉은 껍질과 어린아이 궁둥이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과육을 내려다봤다.

...먹어도 괜찮겠지.

미녀와 술을 마셔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당장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스릴감 때문인지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그녀가 먼저 먹었으니 괜찮지 않을까.

잠깐 심호흡을 하다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정말 맛있네요."

"그쵸? 그쵸?"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반문하더니 한 손으로 와인잔을 들었다.

"조금 쌉싸름한 술이라 단 게 어울릴 거에요."

그리곤 이내 와인잔에 입을 갖다 댔다.

투명한 유리 사이로 그녀의 붉은 혓바닥이 보였다. 손으로 눌러보면 말랑말랑하지 않을까.

여전히 빠르게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시선을 들리고 와인잔을 들었다.

모든 걸 그녀가 먼저 먹었다. 다행히 독은 없는 듯 싶었다.

정말 순수하게 축하를 하기 위해서 왔나? 그럼 내가 그녀를 오해했다는 소린가?

"확실히 쓰긴 하네요."

알코올 향이 확 풍겼다. 쌉싸름한 과일 향이 입안을 맴돌았다.

"그쵸? 지하 저장고에서 가장 비싼 거로 들고 왔어요."

그건 횡령 아닌가.

뭐 중세에서 세무조사를 들어갈 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생각이다.

이 시점에서 나는 긴장을 완전히 풀고 편하게 그녀를 대했다. 생각보다 술이 센지 살짝 알딸딸한 기운이 올라왔다.

그런데 아까부터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도통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얇은 옷차림으로 앉아있는 루시 때문이리라.

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

"...카인. 자요?"

"..."

"카인?"

잔잔한 목소리가 돌아다니던 방이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어쩜... 정말 술이 약하시네요."

루시는 바닥을 드러낸 와인잔을 가만히 들여다 보다 천천히 식탁에 내려놨다.

그리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인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정말... 버티느라 힘들었어요."

"..."

그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인처럼 붉은 입술이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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