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 하얀 깃발
* * *
모든 일엔 인과가 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출발점이 있으면 도착점 역시 존재한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가 얼굴을 적신다.
이렇게 비를 맞으며 말을 탄 적이 언제였던가.
반 년 만에 처음으로 갑옷을 벗은 우테라 백작은 하늘을 올려봤다.
이 비 역시 원인이요 출발점이다.
여름마다 구멍이 뚫리는 하늘이 모든 원인의 시작이다.
진탕이 된 초원이 말의 발굽을 붙잡는다.
그럼에도 말은 앞으로 나아갔다. 천천히. 천천히.
등 뒤로 수 개월 간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우테라 성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장마의 시작이다.
지난 며칠 동안 먹구름을 보여주며 잔뜩 겁을 주던 하늘은 백작이 성문을 열고 나온 순간부터 비를 떨어뜨렸다.
그래.
이제 비가 온다.
기나긴 장마의 시작이다.
호수의 수위가 높아지며 저 산속에 지은 댐이 빛을 발할 시간이다.
우테라 성은 그렇게 살아왔다.
해 년마다 범람하는 호수를 막기 위해 댐을 쌓고 살아왔다.
그런데 왜 저 호수는 성벽 바로 아래까지 물이 차올랐는가.
비는 이제 내릴진데.
장마의 시작은 이제부턴데 왜 저 호수는 한계까지 수위가 올라갔는가.
모든 일엔 인과가 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출발점이 있으면 도착점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저 호수는 인과가 없다.
비는 이제 내리는데 왜 호수는 한계까지 차올랐는가.
그렇다면, 저 호수의 수위가 올라간 건 하늘이 원인이 아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건 젊은 사절이 돌아가고 사흘이 지나서였다. 호수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는 부관의 보고에 당황한 백작은 곧장 조사를 위해 부관을 보냈다.
댐이 무너졌는지, 금이 갔는지, 아니면 관리하는 병사들이 조작을 실수했는지.
그러나 조사를 위해 떠난 부관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다음 부관도.
그다음 부관도...
'이번 여름은 유난히 긴 장마가 올 것입니다.'
'우테라 성을 감싸는 호수가 크게 범람하리라 보고 있습니다.'
그제야 우테라 백작은 사절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가치가 없다 여겼던가.
젊은 청년을 사절로 보낸 왕국군을 미련하다 여겼다.
그러나 미련한 건 자신들이었다.
사절이 적진까지 와서 뜬구름 잡는 헛소리나 늘어놓을 리가 없었다.
젊은 외모와 어쭙잖은 도발에 넘어갔다.
그가 속인 게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 편견을 뒤집어썼다.
정말로 하늘에 구멍이 뚫렸는가. 쏟아지는 빗방울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얇은 정복 위로 무거운 빗방울이 어깨를 때린다.
며칠 동안 성벽에서 바라보던 왕국군의 주둔지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흐릿하게 보인다.
호수의 수위가 점점 높아져 결국 성내를 가로지르는 강이 다리를 잡아먹었을 때, 그제야 우테라 백작은 댐이 왕국군의 손에 넘어갔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절이 오기 직전, 성벽 위에서 들었던 부관의 보고가 떠올랐다.
동쪽.
밤마다 왕국군이 동쪽으로 움직인 이유.
저들의 공성이 일주일 동안 멈춘 이유.
댐을 손에 넣기 위해서.
성을 찾아왔던 젊은 사절은 경고를 하고 간 것이다.
...성문을 열지 않으면 대신 댐의 수문이 열릴 것이라고.
모든 사실을 깨달은 우테라 백작은 그날부터 손끝의 떨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왕국군이 댐을 부술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저들은 이곳 쌍둥이 성까지 오며 제국의 주민들을 절대 건들지 않았다. 수월한 점령을 하기 위한 선택이라 판단했다.
그런데 댐을 무너뜨리다니?
지금까지 쌓은 신뢰 역시 한 번에 무너지게 될 것이다.
뷔른 영지를 포함해 모든 영지에서 반발이 일어날 것이 뻔한데, 설마 댐을 무너뜨린다고?
지금까지 점령한 모든 땅을 포기하겠다는 것과 진배없었다.
그랬기에 우테라 백작은 댐으로 병사들을 보내지 않았었다.
20만이 넘는 왕국군을 막을 정도로 많은 병사를 보낼 여력도 없을뿐더러, 지금까지의 왕국군의 행보를 보아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댐을 경비하던 병사들을 줄였다.
혹여나 왕국군의 시야에 걸리지 않게.
그러나 자신의 예상은 처참하게 빗나갔다.
차라리 가지지 못한다면 부숴버리겠다는 말일까.
수성의 문제가 아니다.
댐이 무너지면 십만 명에 달하는 주민들과 병사들이 모조리 수장된다. 호숫가와 맞닿은 동쪽과 서쪽의 성벽은 결코 그 힘을 막을 수 없다.
우테라 성은 흔적도 남지 않고 휩쓸릴 것이다.
어쩌면 아르에나 성까지.
그날부터 우테라 성의 대전은 잠시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중소 영주들부터 가신들, 말단 관리들까지 목소리를 높였다.
처음부터 댐을 지켰어야 했다는 사람.
고작 6만의 병사로 댐까지 어떻게 지키냐는 사람.
차라리 성을 버리고 후퇴하자는 사람.
왕국군은 절대 댐을 못 부순다는 사람.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는 호수의 수위는 대전에 모인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정말 항복을 하지 않으면 댐을 무너뜨릴 생각이다.
정말... 가지지 못한다면 부시고 돌아갈 생각이다.
그리고 마침내 성안을 돌아나가는 강이 처음으로 범람한 날, 누군가의 입에서 항복이 나왔다.
"우리가 지키는 우테라 성마저 저들에게 넘어가면, 제국의 수도가 바로 코앞이오! 죽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수성을 해야 하오!"
"그럼 저 댐이 무너지면! 그래서 우테라 성이 무너지고 주민들도 모조리 죽으면! 그러면 왕국군이 진격을 멈춘답니까?"
"..."
"어차피 결과는 똑같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성문을 열지 않아도! 아니면 끝까지 항전을 해도! 결과는 똑같습니다!"
"..."
"그러면 주민들이라도 살려야지요! 우리야 지휘관들이니 목숨이 어찌 될진 모르지만 십만이 넘는 주민들과 병사들은 살려야지요! 자존심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수장되는 게 옳은 겁니까?"
그렇게 쉼 없이 고성이 오가던 대전이 처음으로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전투 한 번 제대로 못 해봤다. 이렇게 허무하게 성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말에 반박을 하지 못했다.
어차피 결과는 똑같다.
우테라 성이 강물에 휩쓸려 사라지면, 저들은 그냥 이 성을 지나쳐가면 된다.
이런 느낌이었을까.
그 역시 이토록 무력한 기분이었을까.
우테라 백작은 스스로 심장을 찔렀던 아르에나 후작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날, 며칠 동안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백작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항복을..."
"백작님!!!"
"항복을... 하겠네."
빗방울에 흠뻑 젖은 말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갑옷을 벗었음에도 팔을 드는 힘이 무겁다.
옷이 젖어서일까.
마음이 무거워 덩달아 무거운 걸까.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자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흐릿한 우테라 성이 보인다.
장마가 한창일 때 이들이 공성을 시작한다고 예상했었나.
장마는 이제 시작했는데 저 성문은 벌써 열려있다.
그때, 빗소리를 뚫고 걸어오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에 백작의 고개가 다시 주둔지 입구로 향했다.
"다시 뵙는군요."
"..."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그때 그 청년이었다.
붉은 눈을 한 젊은 사절.
등에 멘 하얀 깃발이 왜 이렇게 무거운지 그를 따라가는 발걸음이 힘겹다.
전령을 통해 항복 소식을 보낼 줄 알았던 우테라 백작이 직접 깃발을 메고 주둔지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항복 표시.
뷔른 성에 이어 두 번째였다.
도저히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우테라 성이 내가 나서자 불과 일주일 만에 성문이 열렸다.
우테라 백작의 말에 모든 지휘관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리고 느껴지는 경악의 시선.
오늘따라 유난히 번들거리는 2왕자의 시선을 느끼며 나는 멋쩍은 웃음을 흘려야 했다.
다나크 제국의 수도는 50만이 넘는 인구가 사는 대도시답게 그 규모부터 대륙 최고를 자랑했다. 제국을 상징하는 붉은색은 건물의 지붕을 장식하는 대표적인 색이었다.
그중 단연코 가장 아름다운 지붕이라 함은, 금색과 붉은색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다나크 제국의 황성이었다.
그 황성의 문이 몇 년 만에 열리기 시작했다. 지붕처럼 붉은 옷을 입은 주민들이 하나둘 모여 제국의 중심부에 있는 황성을 향해 걸어갔다.
하나같이 기쁨과 설렘이 가득한 얼굴이다.
부모 손을 잡은 아이들이 연신 밝은 웃음을 터트리며 중심가로 걸어갔다.
노인, 청년, 여인 할 것 없이 제국 수도에 사는 주민들이 모두 모이고 있었다.
길거리마다 장식된 붉은 조형물들이 주민들의 설렘을 증폭시켰다.
그리고 모든 주민들의 목적지인 황성에선 화려한 붉은색 의복과 왕관을 쓴 젊은 청년이 누군가와 독대를 하고 있었다.
"경하드리옵니다. 태자 전하. 아니, 이제 폐하라고 불러야겠군요."
"..."
"다나크 제국의 황제가 되신 기분이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물론 저는 하늘을 날아다닐 듯 즐겁습니다."
젊은 여인의 웃음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듣기만 해도 뭇 남성들의 심장을 진탕 시킬 매혹적인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그녀를 바라보는 젊은 황제의 눈은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였다.
"폐하. 그 소식 들으셨나요? 제국 서부에 있는 쌍둥이 성이 에어로크 왕국에 넘어갔다는 소식을요."
"...들었네. 유라페스 공작."
"그들은 알까요? 제 몸보다 큰 땅을 집어삼키려 했으니 분명 체한다는 사실을요. 물론 그 성까지 주는 게 계획이긴 했지만... 왕국군의 피해가 거의 없대요. 생각보다 똑똑한 대리자가 있나 봐요."
거기까지 말한 여인은 자신의 저택 지하에 갇힌 금발의 사내가 떠올랐다.
미하일이라 했던가. 외모는 퍽 맘에 드는 사내였다.
이제 슬슬 그를 써먹을 데가 생겼다.
"대리자만 제거하면 대륙을 흔들고 있는 이 전쟁 역시 끝이라는 걸 그들이 알까요?"
"..."
"그래서 알만 왕국은 이미 끝이나 다름이 없어요. 그 남자가 제 손에 있으니까요."
여인의 웃음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헤르트는 아직 정보가 없었고, 에르딘에서 나타났다는 성녀는 자신의 능력이 통할지 미지수였다.
그렇기에 다음 목표는 에어로크 왕국의 대리자였다.
카인이라 했었나.
분명 전쟁에 특화된 능력이라 생각됐다.
그렇다면 분명 자신의 최면을 막을 방법은 없으리라.
그렇기에 헤일리는 에어로크 왕국을 가만히 두었다.
에어로크 왕국의 대리자가 자신의 손에 있다면 에어로크 왕국 역시 자신의 것이니까.
겸사겸사 자신에게 치근덕거리던 4황자도 제거했다.
하지만 이제 제동을 걸어줄 차례였다.
그들이 쌍둥이 성을 넘어 이곳까지 진격하면 불필요한 변수가 생기는 셈이었다.
이미 지금까지 차지한 땅도 벅찰 것이니 제동만 걸어주면 그들은 알아서 내정에 힘을 쏟을 것이다.
"카인이라..."
조만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 밝은 웃음 소리에 같이 웃을 만도 한데 멍한 얼굴을 한 젊은 황제는 그녀의 붉은 안광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