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사절
* * *
"안녕하십니까. 우테라 백작님. 저는 에어로크 왕국군의 사절로 온 지그하르트 카인이라 합니다."
"무슨 일로 왔는가."
서로 안부 인사나 나눌 사이는 아니다.
목적이 있으니 찾아왔을 것이고, 자신은 그저 그 목적만 들으면 된다.
싸늘한 반응을 예상했는지 백작의 날카로운 눈에도 젊은 청년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엷은 미소를 짓고는 손에 들린 양피지를 들어 올렸다.
"우리 왕국군이 뷔른 성을 포함해 단 한 명의 주민들도 건들지 않은 것은 알고 계실 겁니다."
"본론만 말하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백작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저들 역시 고맙다는 소리나 듣자고 찾아온 것은 아니리라.
그럼에도 여전히 젊은 청년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백작은 저 엷은 웃음이 그래서 더 거슬렸다.
그는 알까. 이 대전에서 웃고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걸.
"때문에 저희는 이 우테라 성 역시 주민들의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고자 합니다."
"저런 오만방자한 놈이!"
대전 구석에서 누군가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왕국군에게 영지를 빼앗긴 영주 중 한 명이었다.
주민들에게 피해를 덜 입히고 싶다?
이미 성을 함락하는 건 당연하다는 소리였다.
상황이 불리함은 알고 있었지만, 그걸 적에게 듣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대전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일제히 굳어졌다.
"항복을 하라는 소린가?"
"그렇다면 가장 좋은 일이지요. 주민들 역시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잘못 찾아왔네. 우리 우테라 영지의 주민들은 단 한 명도 자네들을 반기지 않으니 말이야."
우테라 백작은 단호하게 항복 권유를 거절했다.
주민들의 희생을 최대한 줄이고 싶다고?
어이가 없었다.
저들이 순순히 돌아가기만 해도 자신의 영주민들이 희생당할 일은 없다.
대전의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성격이 급한 몇몇 사람들은 벌써 얼굴이 시뻘게진 상태였다.
"그렇게 주민들을 위하고 애쓴다면 차라리 돌아가는 건 어떻겠는가. 그럼 자네 말대로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을 것이네."
"바로 눈앞에 저희 주민들과 성을 놓고 어떻게 뒤로 물러나겠습니까. 그건 위에 있는 자로써 할 일이 아니지요."
"...뭐?"
그 말에 조금씩 웅성거리기 시작하던 대전이 순식간에 침묵에 빠졌다.
눈앞에 성과 주민들을 놓고 어떻게 후퇴를 하겠느냐고?
...진심인가?
자신이, 그리고 자신의 병사들이 두 눈을 시뻘겋게 뜨고 있는데 이 성이 자신들의 성이라고?
우테라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의자 손잡이를 꽉 쥐었다가 천천히 놓았다.
방금 손에 잡힌 게 의자가 아니라 검이었다면 분명 휘둘렀을 것이다.
"오만방자한 것도 유분수지! 백작님! 더이상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들의 목을 베어 성문에 걸겠습니다!"
침묵에 휩싸였던 대전에 일시에 터졌다.
하나같이 시뻘게진 얼굴로 사절을 노려보며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사절들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면 붉은 눈동자를 가진 청년만 담담한 표정이었다.
순박한 얼굴을 한 청년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때, 사절의 입이 다시 열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음에도 당당한 목소리였다.
"전 아직 제가 왜 왔는지 이유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항복을 권유하러 온 것 아닌가."
"전 그런 말을 한 적 없습니다. 그저 백작께서 질문한 걸 대답했을 뿐입니다."
반응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
들을 필요도 없다며 더욱더 화를 내는 부류와 일단은 들어보자며 화를 삭이는 부류.
백작은 그중 후자였다.
천천히 손을 들자 대전이 점점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우테라 백작은 조용해진 대전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설명하라."
저들의 목을 분리하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다.
왕국군의 의도를 최대한 파악하는 것이 장기적인 관점으론 바람직했다.
"이번 여름은 유난히 긴 장마가 올 것입니다."
그러나 사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번에도 실망스러웠다.
자연스레 백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이가 어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건가.
"지금 놀러..."
"저희 왕국군의 예상으로는 우테라 성을 감싸는 호수가 크게 범람하리라 보고 있습니다."
말을 끊으려던 백작은 이어지는 참모의 말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결국 이어지는 말 역시 들을 가치가 없었다.
호수가 범람하다니.
우테라 백작이 코웃음을 쳤다.
비단 백작뿐만이 아니었다. 대전에 함께 있던 가신들 역시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역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신의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장마가 길어진다는 건 어떻게 미리 아는가?
그리고 그걸 떠나,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호수가 범람할 일은 없었다.
수십 년 전 우테라 성을 건축하며 호수의 수위를 조절한 댐 역시 같이 세웠다. 저 산속 깊은 곳에 저수지가 숨겨져 있는 사실은 아마 꿈에도 모를 것이다.
우테라 백작은 그저 비가 많이 와 운신이 불편해졌을 때 본격젹인 공성을 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걸 저 젊은 참모는 은연중에 표현한 것이고.
덕분에 왕국군의 계획을 알게 됐다.
기나긴 장마는 거진 한 달 내내 비를 쏟는다. 그러니 당분간은 왕국군의 공격이 없다는 뜻이리라.
"그렇게 이야기해도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네놈들은 이 성을 넘지 못해."
"...알겠습니다."
역시 어리다.
왕국군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젊은 사절을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오히려 정보를 얻어냈다.
여전히 흉흉한 분위기의 대전을 환기시켰다.
헛소리를 뱉으면 목만 보내려 했는데, 아무래도 살려 보내도 될 듯싶었다.
"이만 돌아가게. 다음에 할 말이 있으면 또 오고."
"알겠습니다."
다음에 또 오라는 말은 진심이었다.
우테라 백작은 진심으로 이 젊은 청년이 다시 오기를 바라며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게요."
"...예?"
"저도 죽는 줄 알았어요."
사극을 너무 많이 본 부작용인가?
백작 앞에서 시종일관 여유로운 표정을 연기했지만 사실 등허리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었었다.
작은 도발이라 생각해 제국군의 신경을 건드렸는데 생각보다 분위기가 흉흉해져 당황했었다.
다음부턴 절대 안 가야지.
사절단에 대한 로망으로 지원했는데, 여차하면 목이 떨어질 뻔했다.
"...일부러 그러셨던 겁니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내 표정을 본 로그멜 경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나도 쟤들이 저렇게 격하게 반응할 줄 몰랐다니까...
보통 사극이나 소설에서 보면 사절이랑 입씨름도 하고, 논리적으로 반박도 하고 그러던데...?
사실 댐을 터트릴 거라고 직접적으로 협박하는 게 원래 계획이었다. 그러나 대전의 분위기가 흉흉하게 변한 순간 마음을 바꿔먹었다.
여차하면 목이 날아갈 기세였기에 돌려서 이야기한 건데, 아무래도 이해하지 못한 듯싶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아무래도 무서워서 다시는 못 가겠네요. 대신 이번엔 저들이 찾아오게끔 해야겠죠."
내 말을 이해 못 했으면 이해를 하게 만들면 된다.
아무리 멍청해도 무조건 이해할 수 있게끔.
정말로 댐을 폭파하면 왕국군의 손해였다.
다시 말해 댐은 제국군과 왕국군 둘 다 죽는 자살 버튼인 셈이다.
대신 저들은 정말로 죽는 거고, 우리는 힘들게 뺏은 쌍둥이 성을 포기해야 한다.
어쩌면 뷔른 성을 포함한 다섯 영지까지.
성을 벗어난 지 한 시간쯤 지나 주둔지로 돌아왔다.
나는 이제 보고를 하러 떠나야 했기에 막사 앞에서 로그멜 경을 바라봤다.
"덕분에 외롭진 않았어요. 다음에 또..."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
거참.
말도 다 안 끝났는데.
한 번 더 똑같은 경험은 겪고 싶지 않았는지 차마 대답은 하지 못한 로그멜 경이 떠났다.
하긴, 우테라 백작을 도발하는 나를 보며 꼼짝없이 죽었다 싶었을 것이다.
그래도 어떡하겠는가.
친한 기사가 로그멜 경뿐인데.
다시 갈 일이 생긴다면 결국 끌려갈 것이다.
몸을 돌려 지휘 막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원래 계획대로 댐을 무너뜨리겠다며 협박을 해도 저들이 곧바로 항복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예상보다 표현을 은유적으로 해 조금 꼬였지만, 원래 계획대로 하면 된다.
"카인 참모! 무사히 돌아왔는가!"
"예. 계획대로 댐을 빌미로 항복을 요구하고 왔습니다."
조금 돌려 말하긴 했지만.
"저들이 뭐라 하던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하려면 해보라는 눈치였습니다."
눈치를 채지 못했으니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물론 왕자에게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으니 양심에 찔리진 않았다.
"저들이 곧바로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곤 저희도 예상하지 않았습니까. 계획대로 진행하면 될 듯합니다."
나와 왕자의 대화를 듣던 후작이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왕자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봤다.
"좋습니다. 그럼, 계획대로 다음 작전을 시행하겠습니다."
회의에서 처음 계획을 꺼낸 날 수많은 격론과 고성이 오고 갔던 계획이다.
처음엔 반대하던 왕자와 후작 역시 결국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하지만 확실한 계획.
계획대로만 된다면 마법처럼 성문이 열릴 것이다.
막사를 나서며 한 번 더 계획을 점검했다.
어린아이를 안아 들 듯 아주 조심스럽게 진행해야 할 계획이다.
혹여나 실수라도 하면, 그땐 인재가 자연재해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일 것이다.
그리고 계획대로라면 분명 며칠 안으로 전령이 올 것이다.
혹은 성문이 열리거나.
그리고 과연, 며칠 동안 우중충한 하늘이 결국 비를 쏟아내기 시작한 날, 우테라 성의 문이 열리며 세 필의 말이 주둔지로 다가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