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 호박
* * *
'지금 내리는 비는 앞으로 시작될 장마의 초입이에요. 여름엔 정말 어마어마한 비가 쏟아져요.'
'아마 전쟁 내내 비가 쏟아질 거에요. 겨울 호수에서 만들어진 비구름은 여름 내내 제국 서부를 적셔요.'
뷔른 성에서 발이 묶였을 때 샬롯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때도 분명 일주일 내내 비가 내렸다.
그런데 겨우 시작이라니.
비를 맞으며 행군할 생각에 눈앞이 깜깜했었다.
'원래 이곳은 비가 많이 내리나?'
'대신 봄가을엔 거의 비가 내리지 않아요. 일 년 동안 내릴 비가 여름에 전부 쏟아지는 느낌이에요.'
전쟁하기 참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럼 결국 이 넓은 초원이 딱딱하게 굳는 날은 봄과 가을뿐이라는 소리였다. 일 년 강수량의 대부분이 여름에 쏟아지는 한국과 비슷한 기후다.
땅이 질척거리니 기병이 부족한 우리에겐 오히려 좋은 기후라고 해야 할까.
원정을 나와 노숙을 하며 비를 맞을 병사들을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군량을 관리하기에도 어려웠고, 혹시나 모를 전염병도 조심해야 한다.
우테라 성을 감싼 호수를 따라 상류로 시선을 옮겼다.
이 넓은 평원에 몇 없는 산 두 개가 우뚝 서 있고 그 사이에서 물줄기가 흘러내려 오고 있었다.
낮이라면 더 자세히 보일 텐데 한밤중에 이른 시간에 시야가 어두웠다.
차라리 내일 낮에 다시 돌아다닐까 생각하다 일단 다시 시선을 옮겼다. 지금 찾아보고 못 찾으면 내일 또 찾으면 된다.
며칠 전 비가 내려서 그럴까. 가까이 다가간 계곡은 거칠었다. 생각보다 쉽지 않을 일임을 깨닫고 잠시 시선을 멈췄다.
댐을 만들 기술이 있나?
현대에서도 댐을 만드는 건 엄청난 난이도를 자랑한다. 고작 며칠 만에 만들 정도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재료는 나무와 흙이다.
콘크리트로 짓는 현대와는 차원이 다른 난이도다.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울리는 회의감을 무시하며 계곡을 돌아다녔다.
일단 가능성을 타진해보고, 불가능하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만들 수만 있다면, 모든 게 해결된다.
댐을 터트릴 정확한 타이밍?
터트리는 건 왕구군이 할 일이 아니다.
샬롯의 말대로 여름 내내 비가 내린다면, 한계에 도달한 댐이 알아서 무너질 것이다.
내가 할 일은 그전에 최대한 튼튼한 댐을 만드는 것뿐.
그렇기에 수문도 필요 없다. 높은 기술력도 필요 없다. 그저 나무로 계곡을 단단히 틀어막기만 하면 된다.
그 정도면 할 만 하지 않을까.
단 1%의 희망을 부여잡고 계속해서 계곡을 돌아다녔다.
하류에서 중류로.
중류에서 상류로.
그리고 마침내 상류로 도착한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지?
스스로 어이가 없어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우테라 성은 동쪽과 북쪽이 호수에 걸쳐져 있다. 그리고 그 호수의 물줄기 중 하나가 우테라 성을 관통하며 아르에나 성까지 흘러갔다.
마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처럼.
여름마다 찾아오는 장마를 가장 많이 겪은 건 우테라 영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호수가 범람한 적이 없었을까?
당연히 댐이 있을 거란 생각은 왜 못했지?
나는 눈앞에 보이는 작은 댐을 보며 끓어오르는 희열을 느꼈다.
교묘하게 수풀로 가려져 가까이 다가오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낮에 하늘에서 봤으면 금방 봤을 텐데, 밤이라 가까이서 찾다 보니 오히려 찾기가 어려웠다.
저수지를 순찰하고 있는 병사들이 보였다.
많은 수는 아니었다.
고작해야 오십 정도 될까.
설마 댐을 터트리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듯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니, 애초에 우테라 백작이 모든 병력을 이끌고 댐을 지켰다 하더라도 우리 왕국군에게서 댐을 지키기란 요원했을 것이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흥분으로 심장이 빨리 뛰었다.
장마가 본격적으로 오기 전까지 댐을 만들 수 없다면 포기할 생각이었는데...
이 작은 댐이 저들의 목숨줄로 보였다.
다만, 한 가지 문제는...
'이 댐을 터트리면 그 영향이 얼마나 미치지?'
이 저수지의 물 저장량이 얼마나 되는지를 몰랐다.
내가 원하는 건 호수가 평소보다 '조금' 더 범람해 성안 도시가 발목 깊이의 물이 잠길 정도면 했다.
아니면 무릎까지.
그 이상은 우테라 성이 초토화가 될 가능성이 컸다.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강물에 주민들이 휩쓸리고 가옥이 쓰러지면 그때부턴 일이 커진다.
성 안에 물이 고여있는 상태에서 시체가 생기게 된다면, 전염병이 순식간에 돌 것이다.
그럼 그걸로 끝장이었다.
성문은 저절로 열리겠으나 주민들은 절대 왕국군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초토화가 된 우테라 성을 정리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었다.
저들은 일거에 쓸어버릴 몬스터가 아니다.
우리가 점령하고 다스릴 곳이었다.
'...'
눈앞에 보이는 작은 댐을 보며 다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 것까진 좋았는데, 이 호박의 속이 가늠이 가지 않는다.
내가 토목 전공자였다면 모를까. 난 장부만 죽어라들여다 보던 문과였다.
게임이라면 터트려보고 아니면 되돌리면 되는데...
이젠 눈앞의 댐이 호박이 아니라 다이너마이트로 보였다.
그것도 안에 화약이 얼마나 담겼는지도 모를 다이너마이트.
...일단 돌아가자.
중천에 있던 달들이 벌써 산자락을 넘어가고 있었다.
일단 댐이 있다는 것은 확인했으니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패가 늘었음을 스스로 위로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산 중턱에 있던 시야가 빠르게 뒤로 돌아가며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너무 멀리서 눈을 뜨려 하면 생기는 부작용이었다.
평소엔 신경 써서 눈을 뜨는데, 흥분으로 실수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천천히 눈을 뜬 나는 익숙한 실루엣을 볼 수 있었다.
"..."
"...이 곳에 막사를 차려주면 되겠는가?"
"...안 주무셨습니까?"
"보고가 들어와서..."
바람이 축축했다. 습한 기운을 잔뜩 머금은 것이 앞으로 다가올 날씨를 알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을 다스리고 있다.
곧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리라는 걸 우테라 백작은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아직 저들의 움직임은 없는가?"
"예. 특이사항이 발생하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성벽 위에서 경계를 서던 부관의 어깨를 두드렸다. 딱딱한 갑주가 손바닥을 때린다.
저들이 아르에나 후작이 이끌던 제국군을 모조리 잡아먹고 돌아온 지 벌써 보름이 지났다. 처음엔 적극적으로 공성을 시작하나 싶었던 저들은 일주일이 지나자 그마저도 멈췄다.
긴장으로 가득하던 병사들도 하나둘 풀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무슨 생각으로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가.
물론 자신과 이 영지에겐 좋은 일이었다. 이대로 시간만 흐른다면 곧 겨울이 올 것이고, 저들은 물러나야 한다.
그때, 바로 그때 백작은 성문을 열고 움직일 생각이었다.
보급로가 끊긴 저들을 이대로 돌려보낼 생각은 없었다.
모으고 모은 기병으로 저들의 얼마 안 되는 보급로마저 차단하고 유린하리라.
그럼에도 백작은 불안했다.
저들이라고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니, 자신보다 더 똑똑히 알고 있으리라.
그런데 왜 움직이질 않는가.
무려 14만이나 되는 제국군을 집어삼켰음에도 저들은 병력의 손실이 거의 없었다.
왕국군 15만, 거기에 포로로 잡힌 제국군 6만까지 더하면 무려 20만이 넘는 대병력이었다.
결사항전을 각오했던 후작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저들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을까.
혹시 식량이 떨어지면 알아서 문이 열릴 걸 기대하는 건가.
'...'
말도 안 된다.
비록 다혈질이 다분했지만 아르에나 후작은 멍청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런 그가 스스로 자살했다.
아니다.
자살이 아니다.
칼을 든 건 후작이었지만, 찌르도록 종용한 건 왕국군이다.
성벽 위에 있던 수많은 병사들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저들이 고작 그 정도도 생각하지 못할 리가 없다.
"혹여나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면 바로 보고하게. 아주 사소한 것도 괜찮네."
성벽을 떠나기 전 부관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부관의 표정이 묘해졌다.
"...아주 사소한 것 말씀이십니까?"
"무슨 일 있었나?"
"......밤마다 소수의 부대가 남쪽으로 이동하는 건 몇 번 관찰했습니다."
"그걸 왜 이제 이야기 하나?"
"많아야 백이 넘지 않는 수였습니다. 혹여나 다른 잡일을 하러 가는 걸 수도 있어 보고를 생략했었습니다."
"..."
백작 역시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백 명이 안 되는 작은 부대가 움직였다.
확실히 보고할만한 규모가 아니긴 했다.
"언제부터 움직였나?"
"일주일...이 조금 안됐습니다."
"...일주일?"
무언가 불안하다. 저들이 공성을 멈춘 날과 똑같은 날이었다.
우연일까 아닐까.
동쪽...
동쪽은 왜 갔을까.
백작의 시선이 자연스레 성벽 너머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동쪽으로 향했다.
저 멀리 쌍둥이 성을 닮은 쌍둥이 산이 보인다.
동쪽...
아르에나 성은 서북쪽에 있다.
바로 눈앞에서 보이는 호수엔 아무런 인적도 없었다.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
"전령이 접근합니다!"
불안감에 번뜩이던 사색이 누군가의 외침에 깨졌다.
우테라 백작은 굳은 얼굴로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왕국군의 주둔지에서 두 필의 말이 천천히 접근하고 있었다.
전령의 등에 꽂힌 녹색 바탕에 검은 독수리가 그려진 깃발이 펄럭인다. 에어로크 왕국을 상징하는 국기였다.
"백작님. 문을 열까요?"
"...열어라."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아까부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강렬한 불안감에 백작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래기 위해 애썼다.
왜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인가.
마치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혹을 알려주겠다는 듯 알맞은 타이밍이지 않은가.
우테라 백작은 성벽 위에서 전령의 말을 들으려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계단을 내려갔다.
전령이 꺼낼 말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어떤 말도 병사들의 사기를 올려줄 것 같지는 않았다.
곧장 대전으로 향한 백작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왕국군에서 온 사절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에어로크 왕국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하나같이 검은 머리카락이다.
대전으로 들어온 사절은 둘 다 젊은 얼굴이었다.
기사로 보이는 순박한 얼굴의 청년이 하나.
날카로운 눈매에 붉은 눈동자가 박힌 훤한 인상의 청년이 하나.
대전에 내려앉은 침묵을 깬 건 붉은 눈동자를 가진 청년이었다.우테라 백작을 포함한 영지의 가신들과 관리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한 손에 얇은 양피지를 든 그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우테라 백작님. 저는 에어로크 왕국군의 사절로 온 지그하르트 카인이라 합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