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26화 (126/191)

〈 126화 〉 성벽

* * *

"아르에나 성을 완전히 포기할 줄은 몰랐습니다."

기세등등하던 분위기는 어디 갔는지 막사 내 분위기는 침울 그 자체였다.

성 밖을 나왔던 제국군을 몰살시키고 다시 쌍둥이 성으로 돌아온 이후 과로를 핑계로 2주간의 병가를 냈던 나는 결국 다시 지휘 막사로 불려가야 했다.

먼저 휴가를 권유했던 스승님과 후작은 공성이 생각보다 수월하지 않자 태도를 싹 바꾸곤 나를 쫓아다니며 쪼아대기 시작했다. 결국 2주를 계획했던 내 휴가는 그 반절을 채우지 못하고 끝나게 됐다.

그리고 지휘 막사로 돌아온 나는 깜짝 놀랄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제국군이 아르에나 성을 완전히 포기했다고요?"

"그렇네. 모든 물자와 병사, 주민들까지 싹 긁어서 우테라 성으로 도망간 상태였어."

"...설마."

주민들을 포함해 물자를 옮기는 건 하루 이틀 만에 끝낼 일이 아니다.

처음부터 성을 지키던 우테라 백작은 성 밖을 나간 아르에나 후작이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을 했다는 거다.

"호수를 낀 탓에 포위도 불가능 하네. 겨우 서쪽과 남쪽을 포위한 상태야."

그건 포위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네 면 중 두 면만 공격한다는 건 우리의 공성 능력도 절반, 적들의 피로도 역시 절반에 불과하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아르에나 성으로 향하던 물길을 자기들이 먼저 끊었네. 식수를 비축할 생각이야."

"..."

2왕자를 통해 연이어 나오는 안 좋은 소식이었다.

공성은 힘을 잃고, 식수를 통제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병력은 6만에 불과하나 무작정 공성을 시작하기엔 병력 소모가 너무 컸다.

병사 하나하나가 소중한 왕국군이 섣불리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자네에겐 좋은 방법이 있을까 싶어 불렀네. 과로로 누웠다고 들었는데 몸은 좀 괜찮아 졌나?"

불러놓고 미안하긴 했는지 2왕자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뭐... 정말 아픈 건 아니었으니 그건 상관이 없었다.

다만, 2주를 계획했던 휴가가 일주일 만에 반 토막 난 것이 불만이었을 뿐.

원래 일주일만 휴가였다면 별 불만이 없었을 텐데, 사람 마음이 꼭 그렇지만은 않지 않은가.

"신경 써주신 덕분에 금방 일어났습니다. 우선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고 내일 회의에서 다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도 어떡하겠는가.

상관 앞에서 떼를 부릴 수도 없고.

나는 고개를 숙이며 일단 물러났다.

정보가 필요하다.

말로만 들은 정보 말고 직접 구슬로 확인할 정보가 필요했다.

막사를 빠져나와 곧장 근처 언덕으로 올라갔다.

후퇴 전날 밤하늘을 구경하던 그 언덕이었다.

그럼 그렇지.

마냥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릴 수 만은 없다.

이미 14만에 달하는 제국군을 쉽게 잡아먹었으니 이런 고비쯤은 여유롭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정상에 오른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품 안에 있는 구슬을 쥐었다.

익숙하게 시야가 하늘로 솟는다.

언덕 위에 누워있는 내가 보인다.

한창 해가 뜨고 있는 동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호수 옆 백색 거성이 보인다.

상상 속에나 있던 아름다운 중세의 성 모습이 딱 이렇지 않을까.

잔잔한 호수 옆에 세워진 백색 성은 그 누구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굳고 커다랗게 세워졌다.

확실히 아르에나 성에 비해 우테라 성벽이 낮았다.

호수로 인해 불안한 지반 때문이라 했나.

이 세계가 조금만 더 판타지스러웠다면, 정령사를 불러서 땅을 뒤집었을 텐데.

오크는 커녕 엘프도 없는 세상이라니.

꿈도 희망도 없는 놀이동산 같은 이야기다.

성벽 위에 올라선 병사들은 불안해 보였지만, 사기가 떨어져 보이진 않았다. 아침을 나르는 아낙네들이 분주히 성벽 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세 개의 광장은 수레들로 꽉 차 있었다.

화살, 군량, 기름부터 우테라 성에서 가져온 걸로 보이는 색이 다른 여벌 갑옷까지 보였다.

화려한 갑주를 입은 중년의 사내가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과 굳게 다문 입술이 말하지 않아도 고집이 강한 게 보였다.

저 사람이 우테라 백작인가?

성을 다스리는 영주가 직접 돌아다니고 있다.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래야 떨어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

쉽지 않겠는데...

한참을 둘러봐도 마땅한 약점이 보이지 않았다.

약점을 찾아야 공략 법을 찾고, 공략 법을 찾아야 공성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우테라 성은 굳건함 그 자체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마땅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나 성벽 어딘가 약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한참을 살펴보다 말았다.

투석기는 있었다.

그러나 이 초원에서 던질만한 돌을 공수하기가 쉽지 않았다.

깔린 게 바위요 돌인 에어로크 왕국과는 너무 다른 환경이었다.

정확도도 조악한 투석기를 가지고 성벽을 무너뜨리길 기다리느니 차라리 저들이 굶어죽는 걸 기다리는 게 빠를 듯 했다.

우테라 성 뒤에서 올라오던 해가 어느덧 왕국군 뒤로 넘어가고 있었지만, 별다른 소득은 얻지 못했다.

오늘은 글렀나...

시간은 많다. 오늘 못 찾았으니 내일 찾으면 되는 일이다.

무적은 없다. 정말 최악의 경우엔 단순히 힘으로 밀어버려도 될 일이다.

초조한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눈을 떴다.

서서히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하자 등의 뻐근함을 가장 먼저 느꼈다.

분명 앉아서 눈을 감았는데 언제 누웠지?

해가 떨어지며 생긴 노을에 절로 눈이 찡그려졌다.

품 속에 들어갔던 손으로 그늘을 만들며 천천히 눈을 뜨자 보이는 흐릿한 인영에 눈을 비볐다.

"......왕자님?"

"잘 잤는가?"

"..."

"..."

­­­­­­­­­

"상황을 파악하러 간다며 회의를 빠져나간 놈이 언덕에서 퍼질러 잤느냐. 전 부대에 소문이 다 났다."

"..."

"차라리 막사에서 자지 그랬느냐. 언덕 위에서 누가 몇 시간째 꼼짝도 않고 있다고 경계병들의 신고가 들어왔었다."

"...잔 게 아닙니다."

"휴가를 짤랐다고 왕자님에게 반항한 것이냐? 오늘 저녁 회의 내내 침울한 표정을 지으셔서 분위기가 말도 아니었다."

"..."

정말 잔 게 아닌데...

그 누구보다 열심히 성을 살피고 있었는데!

말 못 할 비밀에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상황은 모두 파악했습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느라 눈을 감고 있었던 것 뿐입니다."

"그렇게 대자로 누워서 생각을 정리하느냐?"

"..."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우테라 성이 한눈에 보여 앞으로도 애용할 생각이었는데 다 글렀다.

그 언덕에 한 걸음만 올라도 온 병사들의 시선이 집중될 것이다.

저 천재 참모님이 또 회의 빠지고 낮잠 자러 간다고.

...앓느니 죽지.

괴짜 소리를 듣느니 안 가고 만다.

"아르에나 성까지 포기하고 우테라 성을 틀어 막은 건 분명 버틸 자신이 있어서 그럴 것입니다."

겨울이 오면 전쟁은 불가능하다.

한겨울이 되면 테레스 산맥이 눈에 잠긴다.

십만 명이 먹을 군량 수레 역시 산맥을 넘지 못한다.

제국군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리라.

결국 시간은 우테라 백작의 편이었다.

한여름인 지금 겨울이 오려면 반 년이 남았지만, 돌아가는데 걸리는 시간부터 점령한 영지를 안정 시키는 것 까지 생각하면, 왕국군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삼 개월에 불과했다.

물론 지금까진 여유로운 시간이라 생각했지만, 우테라 성이 변수였다.

"저희는 둘 중 한 가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세 달 내에 우테라 성을 함락시키던가, 아니면 아르에나 성과 다섯 영지까지 모두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지."

스승님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진 회의에서 충분히 유추가 가능한 영역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우테라 성 역시 저희가 다스려야 합니다. 주민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려면, 제국군의 희생 역시 적어야 합니다."

이게 문제였다.

우리가 적극적인 공성을 망설이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 곳은 에어로크 왕국에서 너무나 먼 거리였다.

제국군의 희생이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뷔른 성과 달리 우테라 성 주민들은 우리를 적대적으로 대할 것이 뻔했다.

혹여나 반란이 일어나면 다섯 영지까지 한 번에 들고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아군과 적군의 피해를 최소화 하면서 우테라 성문을 열어야 한다.

...어떻게?

그걸 알면 했지.

종일 생각하던 문제를 다시 붙잡고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 쉽게 떠오르겠는가. 결국 한숨이 터져 나왔다.

후우...

갑자기 지진이나 났으면 좋겠다.그럼 이따위 고민은 할 필요도 없다.

지반이 약하니 분명 성벽이 무너질 것이다. 아니면 호수가 범람해서 성벽을 때리거나.

그럼 손쉽게 무혈입성이 가능한데...

...

......

호수가 범람해......?

"스승님. 잠시 어디 좀 다녀오겠습니다."

"어딜..."

머릿속에 벼락이 치는 기분이었다. 다급히 의자에서 일어나 막사를 뛰쳐나왔다.

호수가 범람한다.

호수가.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사람이 없는 곳.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곳.

"..."

다급한 마음처럼 아무렇게나 움직이던 발걸음이 이내 한 방향을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아무도 없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기 쉬운 곳.

떠오르는 장소는 한 군데 밖에 없었다.

호수가 범람해.

호수가.

언덕을 오르며 저 멀리 우테라 성을 바라봤다.

성의 두 면이 호수에 걸친 우테라 성이 보인다.

밤에 봐도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호수에 걸린 세 개의 달이 환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주변의 시선이 몰리는 것을 느꼈으나 발걸음을 계속해서 옮겼다.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호수를 범람시킨다.

호수를.

생전 생긴 적 없던 파도가 호수에서 일어난다.

늘 잔잔하던 호수가 뒤집힌다.

거대한 파도가 우테라 성벽을 때린다.

수나라를 덮쳤던 을지문덕을 이곳에 환생시킨다.

지금 생각하는 가설이 가설로 끝날지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확인해 봐야 한다.

마침내 언덕에 올라온 나는 정좌를 하곤 품 속에 손을 넣었다.

아무리 정신이 없다지만 똑바로 앉을 정신은 있었다.

정말로 괴짜 칭호를 얻는 건 사양이었으니까.

늘 그랬듯 시야가 하늘로 떠올랐다.

저 멀리 보이는 우테라 성을 잠깐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지금 볼 곳은 저기가 아니다.

호수의 근원지.

저 멀리 보이는 산과 산 사이 계곡.

나는 등줄기를 훑는 강렬한 예감을 느끼며 계곡으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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