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 최후
* * *
"...후작님. 탈영병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
하늘이 오늘따라 우중충하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먹구름이 잔뜩 낀 초원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삶에 대한 회의감을 들게 한다.
어디서부터 잘못했는가.
스스로 알고 있는 질문을 던졌다.
그랬으면 안 됐다.
차라리 뒤로 물러나 뒤쫓아오던 잔여 병력과 합류해 맞서 싸워야 했다.
아니다.
그 전에 병력을 나누면 안 됐다.
칼리파 백작과 부대를 나누지 말았어야 했다.
14만의 병력을 그대로 유지했다면, 차라리 이렇게 각개격파를 당하진 않았을 것인데...
아니다.
애초에... 애초에 성을 나와선 안 됐다.
성문을 열고 초원에 발을 들인 순간 결정된 운명이었을까.
끝까지 반대하던 우테라 백작의 참담한 표정이 떠오른다.
시원한 전투 한 번 해보지 못하고 14만의 대부대가 4만으로 줄었다.
10만 명의 피를 머금은 초원은 곧 떨어질 비를 맞고 제국군의 마지막 흔적을 잔인하게 지울 것이다.
그의 생각이 들리기라도 했을까.
하늘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후작의 투구를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비를 맞아서일까. 몸은 살았으나 혼은 죽어서일까.
진군 속도가 더욱더 느려졌다.
병사들은 땅을 보며 걸었다.
이 비가 끝나고, 내일 아침이 오면 이 중 얼마나 탈영을 시도할까.
이 중 몇 명을 죽이고 다시 진군을 시작할까.
왕국군은 철저하게 주민들은 건들지 않았다.
관리를 죽이고, 가신을 죽여 성문에 매달지언정 주민들은 털끝 하나 건들지 않았다.
그 모습을 14만이 넘는 제국군이 모두 봤다.
지금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은 어디서 살던 병사들인가.
왕국군에게 유린을 당하던 다섯 영지의 영주민들이다.
왕국군을 쫓아 영지를 돌아다니면 돌아다닐수록 사기는 떨어졌다.
때마침 뷔른 성 일화가 병사들 사이에서 돌았다.
검을 버리면 살 수 있다.
왕국군은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
왕국군 사이를 지나며 마지막 자존심까지 무너진 병사들은 패배한 적 없는 패잔병이 되었다.
"경계병을 두 배로 늘리게. 지금 빼앗긴 영지는 언제든지 수복할 수 있어. 헛된 선택으로 훗날 크게 후회할 날이 있을 거라고 병사들에게 퍼트리게."
"알겠습니다."
이 주변 영지의 병력은 바닥을 드러냈다.
영지를 배분해 주겠다는 달콤한 말로 영주들을 자극한 대가였다.
그렇기에 후작은 검날이 깨지고 창대가 부러진 패잔병들을 두고 갈 수는 없다.
이들이 있어야 쌍둥이 성을 지킬 수 있다.
만약...
정말 쌍둥이 성이 무너지게 된다면, 그날로 아르에나 가문은 멸문의 길을 걸을 것이다.
제국에 손에 의해.
아르에나 후작의 엄포에도 큰 소득은 없었다.
종일 내린 비에도 그칠 생각이 없는지 아침이 밝았음에도 해는 보이지 않았다.
후작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병사들을 둘러봤다.
"..."
결국, 이천이 넘는 병사들이 야음을 틈타 도망쳤다.
제국군을 상징하는 붉은 깃발이 비에 젖어 축 처졌다.
딱 제국군에 어울리는 모습이라 후작은 생각했다.
하루.
하루만 더 가면 쌍둥이 성이 보인다.
후작은 말없이 몸을 돌려 부대를 출발시켰다.
일단 성에만 들어가면 탈영은 불가능하다. 공성이 시작되고 나면, 살기 위해 알아서 싸우리라.
그렇게 다시 출발한 제국군은 그날 밤, 쌍둥이 성 앞에 주둔지를 편 왕국군을 볼 수 있었다.
사만... 오만에 달하는 숫자였다.
그러나 그 방향이 참으로 기이했다.
쌍둥이 성은 저 뒤에 있을 건데, 주둔지의 입구는 성을 등지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앞, 왕국군이 전열을 갖춘 채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를 기다렸구나.
싸우면 이길 수 있는가.
아니, 싸울 수는 있는가?
결국 후작은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가 코끝을 간질인다.
성년이 막 됐을 시절, 자작의 위를 물려받았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피땀을 흘렸다.
고작 사십 년 만에 자작에서 후작까지 올라온 건 순전히 자신의 재능이요. 노력이었다.
세월은 흐르고 자신의 시대는 졌는가.
제국의 서부를 호령하던 후작은 어디 가고 고작 에어로크 왕국군에 휘둘리는 노인만 남았는가.
"전투를 준비하라!"
저들을 피해 돌아갈 수는 있다.
초원은 넓고 쌍둥이 성의 문은 한 개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나 후작은 검을 뽑았다.
피가 흐르던 검날에 빗방울이 흘러내린다.
두 번이나 목숨을 구걸하고 살아봤자 의미 없다. 분명 쌍둥이 성에서 우테라 백작이 이곳을 보고 있을리라.
시대에 뒤처진 노인네로 죽느니 제국의 후작으로 죽고 싶었다.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후작님."
"검을 들어라! 전열을 정비하라!"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쏟아지는 폭우에 목소리가 땅으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후작은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투구를 타고 흘러내리는 비가 시야를 가린다.
"..."
"검을 들어라! 자랑스러운 제국군의 마지막을 장식할 때다! 검을 들어라!!!"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늘을 찢는 천둥소리에 병사들이 자신의 명령을 듣지 못하지 않는가.
아르에나 후작은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여 병사들을 재촉했다.
저들이 언제 돌진을 시작할지 모른다.
빨리.
빨리 검을 들고 전열을 정비해야 하는데.
"검을 들란 말이다. 이놈들아..."
"..."
너무 큰 과욕이었을까.
제국의 후작으로서 자랑스럽게 죽으려 한 것은 욕심이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십만이 넘는 병사들을 사지에 몰아넣은 주제에 너무 큰 욕심이었을 지도 모른다.
결국, 하늘 높이 치솟았던 검이 툭 떨어졌다.
그리고 이내 수십 년 간 주인을 지키던 검 끝은 마침내 제 주인을 향했다.
계속해서 눈을 찌르는 빗방울에 노인은 눈을 감았다.
노인은 이 비가 멈추지 않기를 바랬다.
초원을 적실 자신의 피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기를 바랬다.
"고생하셨습니다. 왕자님."
"한 것도 없네. 우리를 보자마자 항복을 하더군."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해가 쨍쨍하다.
진흙탕이 된 초원이 천천히 말라가며 이전보다 더 강한 녹색 생명을 뿜어냈다.
며칠 비가 내려 왕자가 고생하면 어쩌나 했더니 다행이다.
오랜만에 모든 지휘관이 막사로 모였다.
후퇴를 하고 난 이후 처음이니 약 삼 주 만에 모인 자리였다.
삼 주 전과 똑같은 자리에 펼쳐진 막사였지만, 그때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20만에 달하던 제국군은 이제 고작 6만에 불과했으니까.
다들 고생했습니다. 라는 왕자의 말을 시작으로 회의가 시작됐다. 믿을 수 없는 전공을 세운 탓에 막사 내 분위기는 시작부터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지휘관은 사로잡았습니까?"
"...자결했다네."
"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자결을 해?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삼만의 병사들을 희생해 목숨을 건진 사람이 자결을 하다니?
"자네도 봤어야 했는데... 한참을 재촉해도 병사들이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 자리에서 곧바로 자신의 심장을 찔렀네."
"..."
등골이 서늘했다.
역시 제국의 후작은 후작이라는 건가?
성문을 나와서도 한참을 부대를 나누지 않아 초조했는데, 어떤 이유였는지 돌연 부대를 나눴었다.아마 끝까지 부대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아무튼, 이제 쌍둥이 성만 남았네. 모두 카인 자네의 공이야."
"제가 한 건 별로 없습니다. 후퇴를 주장했음에도 따라주신 왕자님의 결단 덕분입니다."
설마 자신에게 공을 돌릴 줄은 몰랐는지 왕자가 멋쩍게 웃었다.
"반대로 말하면 난 후퇴를 허락하고 나서 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네."
"그런 뜻이 아님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다행히 양심은 있네 싶었지만, 나는 고개를 숙이며 빈말을 던졌다.
"이 일은 보고서로 만들어 수도로 전달될 거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어."
"문제 말씀이십니까?"
무슨 문제?
이번 전투는 신기할 정도로 일이 수월하게 풀렸다.
별다른 문제점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제국을 상대로 이런 대승을 거둔 건 역사서에 남을 것이네. 당연히 우리 왕국의 전술 교리에도 포함이 되겠지. 허나...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많네."
왕자의 말에 여기저기에서 지휘관들이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의아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저 척후병이 다가와 어느 방향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에 몇 번 이동한 게 전부인데 어느새 제국군이 모조리 몰살을 당했으니 말이다.
역시 너무 티가 났을까.
마음이 다급해 구슬을 남용하기는 했다.
뭐 어떡하겠나.
구슬을 꺼내 보일 것도 아니고 열심히 변명을 하는 수밖에 없다.
"...제국군을 따라다니며 그때그때 판단을 내렸기에 자세한 방법은 어떻게 설명을 드려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적들을 각개격파 시키려고 노력한 것뿐입니다."
"...그렇군. 자네의 순간적인 판단이었다는 거군..."
나름 잘 변명했다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는데, 왕자의 눈빛이 이상했다.
저번보다 더 이글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이전보다 더 자주 단둘이 차를 마시게 생겼다.
나를 마음에 들어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왕자가 노골적으로 친하게 대할 수록 주변 시선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었다.
물론 왕자가 아니라 예쁜 공주였다면 두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겠지만, 왕자는 남자만 달 수 있는 칭호다.
"물론 운이 여럿 겹친..."
"그건 지휘관들의 부대 이동 경로로 보고서를 작성해 보면 알겠지. 운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
구슬을 보고 부대를 이동시켰는데 운이 끼어들 껀덕지가 있을 리가 없다.
외통수에 걸린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냥 적당히 할걸.
이번 전투에서 지면 끝이라는 생각에 너무 열심히 했다.
"그건 후에 차차 알아보면 되고, 다시 쌍둥이 성 이야기로 넘어가지. 카인 참모 좋은 작전 있는가?"
이젠 숫제 작전 자판기 취급이다.
병력 차이가 이렇게 심한데 무슨 작전이 필요해. 그냥 때리면 되지.
"원래 하려던 작전을 그대로 하면 될 듯합니다."
"원래 하려던 작전?"
"우테라 성과 아르에나 성엔 각각 삼만의 병사가 지키고 있을 겁니다. 이젠 물길을 막을 병력이 없으니 아르에나 성은 자연히 열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우테라 성도 열릴 것입니다."
안 열리면 직접 열어버리면 되고.
그 말에 왕자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카인 참모야. 자네가 있어 든든하네."
"..."
이건 내가 낸 작전이 아니었다.
물론, 생각은 했지만 가장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지휘관 중 한 명이었던 이름 모를 백작이었다.
...역시나 그가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괜히 억울하네.
"죄송하지만, 이 작전은 제가 짠 것이 아닙니다."
이미 공적을 쌓을 만큼 쌓았다.
이런 사소한 공적마저 가로채기엔 이미 나를 시기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이 주 넘게 노숙을 했더니 좀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여기까지 떠먹여 줬는데 설마 숟가락을 집어 던지겠는가.
막사 구석에 있는 백작을 가리키며 뒤로 물러나자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백작이 황급히 표정을 고치곤 입을 열었다.
"부끄럽지만 카인 참모가 말한 대로 제가 낸 작전이 맞습니다. 그러나 누가 이 작전을 꺼냈느냐가 중요하겠습니까? 전 성공적인 공성을 바랄 뿐입니다."
이야.
저 백작 말 잘하네.
처음 던진 말과 다르게 신난 목소리로 세세한 작전을 설명하는 백작 덕에 나는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며칠 휴가나 받고 푹 쉬고 싶다.
현대나 이 세계나 일에 치이는 건 내 운명인가 보다.
그렇게 오랜만에 입을 쉰 회의는 물길을 막는 것으로 결론을 내며 끝났다.
그러나 기세가 등등하던 왕국군은 일주일이 넘도록 성벽을 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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