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정면이 열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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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를 더 높여라!"
아르에나 후작은 연신 등줄기를 흐르는 땀을 느꼈다.
당했다.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당했다.
이 넓은 초원이 전부 함정이었다.
어떻게라는 말은 살아남고 나서 해도 된다.
지금은 그 의문을 벗기는 일보다 쌍둥이 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병사들이 점점 낙오하고 있습니다!"
"...이런 젠장!"
답답한 속을, 아니 떨리는 속을 숨기려는 듯 후작이 고함을 질렀다.
자신과 나뉘었던 칼리파 백작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연락이 끊겼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떠난 척후병들 역시 감감무소식이었다.
합류하기로 했던 영지에서 이틀을 더 기다렸을 때, 후작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쌍둥이 성에서 날아온 급보.
약 4만에 달하는 왕국군이 쌍둥이 성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
그때 후작은 온몸을 훑는 소름을 맛봐야 했다.
칼리파 백작은 죽었다.
증거도, 증인도 없지만, 후작은 확신했다.
왕국군은 자신들이 부대를 나누길 기다린 것이다.
결국, 먹기 좋게 알아서 잘린 채 왕국군에게 목을 들이민 셈이었다.
처음부터 다섯 부대로 나눴다면?
이미 전부 다 죽고 초원에 누워있었겠지.
"속도를 줄여라! 성에만 도착하면 살 수 있다! 병력을 유지해!"
술래가 바뀌었다.
이번엔 자신들이 도망칠 차례였다.
성에 남은 병력 6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병력 7만.
총 13만의 병사라면 아직 승산이 있었다.
저들 역시 피해가 없지는 않았을 터.
무사히 성으로만 돌아가면 성을 지킬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문제점이 있었다.
"옆 영지에 있던 주둔 병력은?"
"그들 역시 소식을 들었을 테니 쫓아오고 있을 겁니다!"
이틀 거리에 있던 3만의 부대 역시 전속력으로 성으로 돌아가는 중일 것이다.
그러나 후작은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저 멀리 왕국군의 척후병들이 보인다.
예전엔 간간히 보이는 수준이더니, 이젠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의 부대를 따라오고 있었다.
이곳, 아니면 뒤에 있던 주둔부대.
둘 중 하나는 왕국군에게 꼬리를 잡힌다.
그리고 후작은 왕국군이 뒤에 있는 부대를 공격하리라 예상했다.
자신 같아도 뒤에 있는 부대를 공격할 테니.
3만의 부대...
이대로라면 성으로 돌아가도 우테라 백작 앞에서 할 말이 없다.
14만의 병력 중 고작 4만의 병사만 돌아간다.
...그것도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한 채.
히이잉!
답답함에 눈 앞이 깜깜해지더니 잠시 몸이 비틀거렸다.
그 바람에 말이 깜짝 놀라 울음을 터트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가.
성문을 나섰을 때?
칼리파 백작과 부대를 나눴을 때?
왕국군의 척후병을 처리하지 않았을 때?
시야가 어지러워졌다.
성으로 돌아가면 당분간, 아니 어쩌면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발언권은 없을 것이다.
우테라 백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신을 무시할 것이다.
그에 동조하는 중소 영주들 역시 마찬가지겠지.
처음부터 욕심을 내지 말았어야 했는가.
14만의 대군을 이끌고 당당하게 나왔지만, 왕국군은 본 적도 없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존재를 쫓다가, 이젠 반대로 쫓기는 중이다.
자신이 쫓은 건 허상이었나. 왕국군이었나.
"쿨럭!"
"...후작님!"
"..."
목 끝에서 비린 맛이 올라온다.
칼침을 맞은 것도 아닌데 피가 역류했다.
손을 들어 주변 영주들을 진정시켰다. 자신이 무너지면 끝이다.
이들을 이끌고 무사히 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고삐를 다시 강하게 쥐었다.
손에 묻은 피가 고삐를 적신다.
잠시 고삐를 내려다 본 후작은 다시 고개를 들어 전방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때, 아르에나 후작은 이 주가 넘는 시간 동안 쫓아다니던 허상을 실제로 마주할 수 있었다.
"왕국군입니다! 왕국군이 있습니다!"
"전투 준비! 대열을 정비하라!"
저 멀리 전열을 갖춘 채 서있는 왕국군이 보였다.
그토록 쫓아다닐 땐 보이지도 않던 그들이 허깨비처럼 나타났다.
하나, 둘, 셋...
저들의 진형을 눈으로 세던 후작은 그만 세는 걸 멈춰버렸다.
...적어도 십만. 최대 십삼만.
"..."
작은 언덕을 넘어가며 점점 드러나는 왕국군의 숫자는 십만이 넘었다.
못 이긴다.
결코 못 이긴다.
천천히 속력을 줄이던 제국군은 자신들 양옆에 정렬한 왕국군을 보며 침묵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후작이 큰 목소리로 외친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바로 뒤에 삼만의 아군이 오고 있다! 저들의 수가 많다고 동요하지 마라! 하루만 버티면 우리에겐 승산이 있다!"
하루.
딱 하루만 버티면 된다.
사만이나 되는 병력이 하루 만에 사라지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 뒤에서 삼만의 병력이 더 올 것이고, 그럼 칠만이다.
해볼 만 하다.
뒤를 향해 힘차게 외친 후작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전방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제야 후작은 무언가 이상한 점을 눈치챌 수 있었다.
"...중앙이... 열려있습니다."
"..."
눈앞이 훤했다.
쌍둥이 성이 있을 전방은 아무런 적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지나가면 그때 공격을 하려고?
포위하려는 생각인가?
바로 눈앞에 쌍둥이 성으로 향하는 길이 보임에도 후작은 아무런 명령을 내릴 수가 없었다.
굳이 왜?
정면을 열어둔 이유가 뭔가.
자신은 고작 사만의 부대를 이끌고 있다.
십만이 넘는 저들이 굳이 앞에 활로를 열어둘 필요가 없었다.
병사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작은 언덕 위에 올라있었기 때문에 제국군 병사들 전부 눈 앞의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제국군도 움직이지 않고, 왕국군도 움직이지 않는 대치가 한참을 이어졌다.
차라리 후퇴해서 뒤에서 쫓아오는 삼만의 부대와 합류를 할까 고민을 하던 그 순간, 왕국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들이 지금...?"
자신들을 향하던 왕국군의 창칼이 바닥을 향하기 시작했다.
말을 탄 부관들이 납검을 했다.
그러더니 이내 왕국군 병사들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
"..."
뭐 하자는 건가.
우리들을 눈앞에 두고 땅에 주저앉아?
아르에나 후작의 얼굴이 수치심에 벌게졌다. 무시를 해도 유분수지. 눈앞에 자신들을 두고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다니?
그러나 공격 명령을 내릴 수는 없었다. 4만과 10만의 병력 차이가 그를 말렸다.
저들 중 절반이 드러누워 잠을 잔다 해도 병력 차이가 난다.
이 알 수 없는 상황에 제국군 병사들이 다시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때, 후작의 뒤에 서 있던 중소 영주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살려주겠다는 뜻 아닙니까?"
"뭐?"
"...자신감의 발로일지 아니면 또 다른 계책이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혹시 저희의 사기를 깎기 위함이라면..."
"..."
그제야 후작은 영주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했다.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는 적들의 사이를 뚫고 후퇴를 한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치욕이 될 터였다.
만약 우테라 백작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을 포함 여기 있는 지휘관들은 다시는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리라.
"...저희를 보내고 뒤에 있는 삼만의 병력을 제거할 생각이라면... 납득이 가능합니다."
그 말에 결국 후작은 눈을 감았다.
저들을 자신들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자존심을 버리고 치욕스럽게 살아서 지나가던가.
아니면 목숨을 내놓아라.
지나가는 대가는 하루 거리에서 쫓아오는 삼만의 병사들의 목숨이었다.
"..."
차라리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저들이 자신이 아닌 뒤에서 쫓아오는 부대를 공격하리란 건 예상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마주칠 줄은 몰랐다.
도대체 어디에 있었길래 자신들의 도주 경로를 정확히 파악하고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차라리 눈앞의 왕국군이 진짜 허상이었으면 했다.
"...우선은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부 다 죽는 것보다 저희의 병력이라도 유지를 해서... 쌍둥이 성을 지켜야 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신 역시 알고 있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그 선택을 혼자 하는 것과, 사만 명 앞에서 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다시는 후작의 이름으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
목숨은 살겠으나 명예는 죽는다.
한참을 침묵하던 후작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후작은 사만 명의 병사가 전부 자신의 입만 쳐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공격에 대비하며 앞으로 전진하겠네. 우리의 원래 목표는 쌍둥이 성의 수비. 대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네."
"...알겠습니다."
차라리 뒤로 후퇴해서 칠만의 병력으로 이들을 상대하면 적지 않은 피해를 줄 수 있다.
그것만으로 왕국군은 쌍둥이 성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후작을 포함한 영주들은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쌍둥이 성 역시 중요했지만, 자신들의 목숨이 더 소중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제국군이 다시 전진을 시작했다.
사람으로 세워진 벽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왕국군은 자리에 앉아 바라볼 뿐이었다.
목숨을 건진 건 제국군이었지만, 미소를 짓고 있는 건 왕국군이었다.
겁에 질려, 혹은 부끄러움에 왕국군을 통과하는 제국군 병사들을 고개를 숙였다.
싸우진 않았으나 졌다.
죽은 사람은 없었으나, 내일 이 자리에서 그들을 대신해 삼만의 동료들이 죽을 것이다.
왕국군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제국군 병사들은 고개를 더욱 숙였다.
힘차게 펄럭이던 붉은 깃발이 내려갔다.
"현명하네요. ......현명한 게 아닌가?"
"..."
후작은 연신 싱글거리는 아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헤르트에서도 그랬다.
뷔른 성에서도 그랬다.
남들이 적들의 숫자를 세고 있을 때, 아들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뷔른 성문을 여는 건 왕국군의 지휘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뷔른 성문이 스스로 열리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들을 상대하는 적들은 늘 싸우기도 전에 자멸했다.
사기가 바닥을 기고, 팔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결코 온전한 상대를 공격하는 법이 없었다. 정말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최소한 뒤통수는 때리면서 전투를 시작했다.
이번 전쟁 내내 아들의 검은 뽑힌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들은 이미 15만에 가까운 제국군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13만이 넘는 제국국이 목을 내밀고 기다리고 있다. 적어도 후작이 보기엔 그랬다.
그렇다면 자신이 강한가. 아들이 강한가.
나는 혼자서 30만에 가까운 제국군을 죽일 수 있는가?
"..."
어쩌면... 어쩌면 새로운 가문의 시작을 자신이 보고 있지 않을까.
후작은 강렬한 예감을 느껴야 했다.
"아버님. 삼만의 병사를 뒤로 돌려 저들을 몰래 쫓아가 주세요. 아무래도 왕자님이 위험하겠네요."
"...너는?"
"전 여기서 내일 올 잔여 병력을 해치우고 따라갈게요. 저들의 사기가 죽을 대로 죽긴 했지만, 쌍둥이 성이 눈앞에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길 지도 몰라요. 조심하세요."
그 말에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군의 꼬리가 왕국군을 마지막으로 통과하는 중이었다.
살기 위해서 이 치욕까지 견딘 그들이 쌍둥이 성을 앞에 두고 가로막으면, 분명 평소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았다.
"알겠다. 너도 조심하거라."
어느 순간 자신이 아들의 명령을 받고 있지만, 후작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거에 대해 기분이 나빴으려면, 이미 헤르트에서 기분이 나빴어야 한다.
자신의 머리가 아들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한 순간, 그런 감정은 모두 날렸다.
훌륭한 지휘관은 훌륭한 참모의 작전을 제대로 따를 필요가 있다.
거기에 자존심이 끼어들 곳은 없다.
그저 이유가 있으니 자신을 보낼 것이고, 다른 이유가 있으면 록셀 자작을 보냈겠지.
병사들을 이끌기 위해 전선의 뒤로 향하는 지그하르트 후작의 등이 곧게 펴졌다.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다나크 제국을 감히 쳐들어오다니.
오 년 전만 해도 결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자신이 할 일은 그저 아들이 넓은 세상으로 향하도록 돕는 것일 뿐.
그 전에 일단 아들이 내린 명령부터 잘 수행해야지.
스릉.
허리춤에 찼던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햇빛이 반사되며 찬란한 빛이 흩뿌려진다.
자신을 바라보는 병사들을 향해 소리를 높이며 후작이 강하게 소리쳤다.
"출전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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