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 갈라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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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구 하나 섣불리 말을 꺼내는 자가 없었다.
정답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나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건 다른 문제였기에.
세 번째.
벌써 세 번째 허탕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말 병사를 나눠야 하는가.
아르에나 후작은 가만히 중소 영주들을 바라봤다.
"다른 영지로 보냈던 척후병들은?"
"...단 한기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거리가 멀어 아직 돌아오지 못한 걸 수도... 있습니다."
그럼 쌍둥이 성을 처음 나왔을 때 보낸 척후병들은 돌아와야지.
대답하던 자작 역시 자신이 없는지 말끝을 흐린다.
본대를 떠난 척후병들은 나가는 족족 함흥차사였다. 당당하게 박차고 나간 병사들의 그 뒷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이 일대를 완전히 장악당한 것이다.
후작 역시 척후병을 전부 퍼트릴까 생각을 했지만,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한 번 장악당한 지역을 다시 되찾으려면 본대가 같이 움직여야 한다.
왕국군의 척후병들이 이미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을 지역을 되찾는 것은 너무 큰 희생이 따랐다.
"...후작님. 병력을 다섯 부대로 나누지 말고 두 부대나 세 부대로 나누는 것은 어떻습니까?"
"두 부대?"
"예. 반으로 나눈다 해도 7만의 병력입니다. 왕국군과 맞닥뜨리기 전에 전령만 보낸다 하면, 늦지 않게 전 병력을 지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병력을 반으로 나누어 밑 영지에서부터 차근히 올라가면?
지금처럼 왕국군의 꼬리만 쫓아다닐 필요가 없다.
"저 역시 찬성입니다. 좋은 생각인 듯 합니다."
중소 영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뒤로 성벽에 걸린 시체들이 보인다.
벌써 성을 나선 지 일주일이 넘었다. 그동안 한 거라곤 영지를 돌아다니며 식량을 축낸 것밖에 없다.
이대로라면 군량만 처먹고 쌍둥이 성으로 돌아가게 생겼다.
14만 명이 먹는 식량은 결코 작은 수가 아니었다.
후작은 고개를 돌려 칼리파 백작을 바라봤다.
이 영주들 중 가장 큰 병력을 데리고 온 자였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자였으니 믿을 만 하리라.
"그렇게 하세. 나는 이곳을 기준으로 천천히 북상을 하겠네. 칼리파 백작 자네에게 병사를 나눠줄 테니 그에 맞춰 동쪽 영지를 들렸다 병력을 함께 북상시키게."
"알겠습니다."
보급로가 더 복잡해졌다.
이미 세 개의 영지를 통과했기에 쌍둥이 성보다 뷔른 성이 더 가까웠다.
아직 군량이 모자란 지경은 아니었지만, 북상하며 군량을 한번 보급받을 필요가 있었다.
이번에 꼭 찾으리라.
차라리 왕국군의 전 병력을 만났으면 했다.
후작은 다시 말을 몰았다.
목표는 나흘 거리에 있는 영지.
쌍둥이 성을 나와 가장 먼저 들렀던 그 영지였다.
"드디어 부대가 나뉘었네요. 후작님과 스승님께 남동쪽 끝 영지로 곧바로 출발해달라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몸에서 퀴퀴한 냄새가 난다.
며칠을 못 씻었더라?
온몸이 근질거리는 기분이다.
밤하늘을 천장 삼아 초원에서 모포 한 장 덮고 잔 지 일주일이 넘었다. 제국군의 본대가 있는 곳에서 고작 두 시간 떨어진 곳이었다.
미칠 듯이 쑤시던 등허리도 노숙을 한 지 나흘이 지나자 감각이 무뎌졌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가?
밤사이 옷 속으로 기어들어 온 작은 벌레들을 털어내는 게 아침 일과의 시작이었다.
제국의 본대를 졸졸 따라다닌 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그 동안 나는 로그멜 경을 위시한 척후병들을 직접 데리고 다니며 사방으로 흩어진 왕국군에게 경로를 전달했다.
자신들을 하늘에서 감시하는 줄은 꿈에도 모르겠지.
제국의 능력이 무엇인가.
아직 모른다.
이번 일로 제국의 대리자가 내 능력을 눈치챌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지.
이번 전투를 지면 능력이고 자시고 문제가 커진다.
"바로 밑에 겨울 호수가 있는데 거기서 좀 쉬시는 건 어떻습니까?"
"제국군이 다시 움직이는 중이에요. 다음에 씻죠."
"알겠습니다."
나도, 로그멜 경도, 그리고 내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따라다니는 척후병들도 모두 거지꼴이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불평을 터트리는 자는 없었다.
자신들이 짊어진 작전의 무게를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대가 나뉘었으니 보급로를 끊는 건 어떻습니까?"
"그럼 쌍둥이 성으로 다시 도망칠 거에요."
로그멜 경의 의견이었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들의 병력을 모두 소모시켜야 한다.
그래야 훗날이 두렵지 않다.
지금이라도 보급로를 끊으면 전투가 쉬워진다.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제국군은 고민도 하지 않고 쌍둥이 성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엔?
'결국 다시 기어 나온다.'
자신들의 영토를 빼앗겼다.
평생을 쌍둥이 성에서 살 것도 아니니 언젠간 영토 수복을 위해 다시 나오리라.
20만이 넘는 대부대를 눈앞에 두고 전쟁을 끝낼 수는 없다.
언제 다시 뛰쳐나올지 알고 영지로 돌아가겠는가.
그러니 차라리 지금 저들의 병력을 소모시켜야 한다.
쌍둥이 성은 점령할 수 없더라도, 적어도 뷔른 영지를 포함해 다섯 영지를 다시 빼앗길 일은 없게 해야 한다.
그래야 맘 편히 영지로 돌아갈 수 있다.
"도련님. 혹시 저들이 미친 척하고 뷔른 성을 공격하면 어떡합니까?"
"저희야 좋죠."
그럼 말려 죽이면 된다.
성안에 갇혀 식량만 축내다 결국 성문이 열릴 것이다.
이래저래 뷔른 성문이 저절로 열리는 장면을 다시 한번 보고 싶긴 했지만, 저들의 지휘관이 그렇게 멍청할 리가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저들이 빨리 부대를 나눠야 하는데...
반으로 나뉜 7만의 병사도 부담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우리 군의 숫자는 최대한 유지하면서 저들의 병력을 소모시커야 한다.
"로그멜 경."
"예."
꼬리를 흔들까 말까.
며칠 동안 계속해서 고민하던 작전이 하나 있었다.
"왕자를 미끼로 쓰면 불경죄로 처벌을 받을까요? 안 받을까요."
"...예?"
"안 받는다고요? 그럼 로그멜 경만 믿고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아, 아니 ...도련님?"
얼빵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척후병을 불렀다.
예. 라고 했으니 로그멜 경이 수락한 거다.
혹여나 잘못돼도 내 잘못은 아니다.
"지금 바로 왕자님께 가서 쌍둥이 성으로 천천히 진격하라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다섯 영지 중 최북단에 있는 왕자를 쌍둥이 성으로 보낸다.
그럼 분명히 쌍둥이 성에선 성 밖을 나온 부대를 다급히 부를 것이고, 왕국군은 그때를 노려 잡아먹는다.
물론 제국의 본대는 반 토막 난 7만의 부대만으로 2왕자의 부대를 상대해야 할 것이다.
2왕자가 쌍둥이 성까지 가는데 닷새.
쌍둥이 성에서 제국군을 호출하는 게 사흘.
퇴각 명령을 받고 성 밖을 나온 제국군이 쌍둥이 성으로 돌아가는데 나흘.
앞으로 12일이 남았다.
구슬을 쥐자 서서히 양방향으로 갈라지는 제국군이 보인다.
본대의 지휘관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쌍둥이 성에서 연락이 오기 전까지 발바닥에 불이 나게 초원을 돌아다녀라.
물론 그들을 유혹할 또 다른 꼬리도 준비해놨다.
형체가 없는 허상에 이끌려 초원을 뱅글뱅글 돌 그들이 결국 보게 될 장면은 결코 아름다운 장면은 아닐 것이다.
우선 동쪽으로 향하는 부대부터.
그들부터 잡아먹어야지.
본대가 이 넓은 초원을 빙글빙글 도는 동안 왕국군은 동쪽으로 향하는 부대를 잡아먹는다.
7만을 다시 반으로 쪼개고, 또 쪼개서 잘게 나눠 먹을 생각이다.
본대와의 연락이 끊기고, 보급도 끊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개 같은!"
칼리파 백작은 결국 욕설을 내뱉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빨리 왔으면 왕국군을 잡을 수 있었다.
겨우 반나절 차이로 빠져나갔다는 소식을 들은 칼리파 백작은 분노로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상황이 안 받쳐준다는 말인가.
후작과 부대를 나눠 북상을 시작한 이후 도착한 영지마다 똑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여전했다.
주민들은 건들지 않았다.
그러나 성벽에 걸린 시체들을 대신해 주민들을 관리하던 부관들이나 참모들을 똑같이 성벽에 매달고 도망갔다.
주민들에게 배급했던 식량 역시 훔쳐 달아났다.
"...주민들에게 다시 식량을 나눠주면 군량이 부족해집니다."
"..."
참담한 얼굴로 보고하는 부관의 말에 칼리파 백작은 눈을 감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르에나 후작이 자신을 믿고 병사를 나눠 주었다.
그러나 수확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가는 곳마다 군량을 배급하고 다니니 이건 군대가 아니라 구휼 단체다.
"...이 곳에서 부대를 나눈다. 삼만은 영지를 지키고 사만은 그대로 북상한다."
어차피 영지를 돌아다니는 왕국군 역시 사만을 넘지 않는다고 했다.
저 쥐새끼 같은 왕국군을 붙잡는 방법은 이 방법이 유일해 보였다.
"알겠습니다."
이번엔 반드시 잡으리라.
아르에나 후작께서도 분명 자신과 비슷한 전술을 사용하고 계실 것이다.
어떻게든 왕국군을 붙잡고 전령을 보내기만 하면, 금방 지원군이 도착할 것이다.
그때가 저들의 제삿날이라.
다음 날 아침 칼리파 백작은 작전대로 3만의 병사를 영지에 주둔시키고 북상을 시작했다.
남은 군량이 얼마 없었다.
조금 서둘러서 후작과 합류해 군량을 보급받아야 했다.
다음 영지를 지나, 그 다음 영지가 후작과 합류하는 영지였다. 마음이 조금 다급해진 백작은 병사들을 독촉해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칼리파 백작은 자신이 가는 길 앞에 그토록 바라던 왕국군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무려 13만이 넘는 왕국군이.
"일이 쉬워졌습니다."
"..."
"..."
후작을 포함한 지휘관들은 여유롭기까지 한 그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떻게?
아니, 후작과 록셀 자작은 헤르트에서 카인의 진면목을 보았다.
그러나, 전장을 파악하고 시기적절하게 부대를 운용하는 기술은 볼 때마다 믿기 어려웠다.
아무리 모든 척후병을 전 초원에 뿌렸다고는 하지만, 그의 능력은 그 이상을 보여줬다.
"저희는 눈을 뜨고 있고, 저들은 감고 있습니다. 그 차이입니다."
그동안 고생을 했는지 갑주는 흙먼지로 가득했고 머리카락은 산발이었다. 조금 야윈 것이 며칠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은 듯했다.
그럼에도 카인읜 표정은 여유로웠다.
마치 별일 아니었다는 듯 시종일관 느긋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본대와 떨어져 나온 부대를 모두 정리했으니 이제 본대만이 남았습니다. 이제 슬슬 쌍둥이 성에서 전령이 도착했을 테니 다급히 쌍둥이 성으로 향할 겁니다."
"..."
"정말 좋은 소식은 본대 역시 삼만, 사만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저희는 그 중 하루 거리로 뒤따르는 삼만의 부대를 칠 겁니다."
원래는 7만의 본대가 왕자의 부대를 칠 때 뒤를 노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행운이 찾아왔다.
본대도 반반으로 갈렸으니 잘라 먹을 수 있게 됐다.
물론 왕자가 버텨야 하는 시간이 조금 더 늘었지만.
"나머지 사만의 부대는 어찌 하고 말이냐."
"왕자님께서 버텨 주셔야죠."
우리가 뒤떨어진 삼만의 부대를 잡아먹는 동안 말이다.
"너무 위험하지 않겠느냐. 차라리 앞으로 가는 사만의 부대를 공격하는 건 어떠냐."
"그럼 뒤에서 오던 삼만의 부대가 합류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쪽의 피해도 커질 겁니다."
"..."
잔인할 정도로 갈라쳤다.
실제로 7만의 제국군을 잡아먹은 왕국군은 그 피해가 2만이 조금 안 됐다.
더 무서운 것은, 그들은 자신들이 이리저리 찢어져 잡아 먹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마 본대는 여전히 왕국군이 여러 부대로 나뉘어 활동하는 줄 알 것이다.
이미 반절이 초원에 몸을 눕힌 지도 모른 채.
처음 카인을 의심하던 참모들과 지휘관들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장이 그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이 넓은 초원이 그의 손바닥 안이었다.
척후병을, 그리고 정보를 이렇게 세세하게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다섯 개로 갈라진 부대를 제국군의 위치를 보며 실시간으로 조절할 수 있는가?
이론적으론 가능했다.
책상에 앉아 지도만 바라보며 들어오는 보고를 바탕으로 실시간으로 명령을 내리면 되니까.
그러나 이 젊은 참모는 직접 제국군을 따라다녔다.
여유롭게 책상 앞에 앉아 작전을 짤 시간?
있었을 리가 없다.
머릿속으로 모든 상황 판단을 내린 것이다.
후작을 비롯한 지휘관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물론 단순한 척후병의 보고가 아닌 구슬로 확인했었으니 빠르고 정확한 명령이 가능한 일이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저희에겐 하루의 여유가 있으니 내일 아침 출발하는 게 어떻습니까?"
하루의 여유가 있다는 말도 사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말 머릿속에 지도가 있는 건가?
실시간으로 움직이는 제국군의 위치를 어떻게 알고?
그러나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이 알아서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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