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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책사 시점-122화 (122/191)

〈 122화 〉 술래잡기

* * *

지휘 막사는 지금까지 모였던 그 어떤 회의보다 싸늘한 분위기였다.

누구 하나 섣불리 말을 꺼내는 자는 없었지만, 그들의 표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불안감.

모든 영주민이 피난을 갈 순 없다.

누군가는 성을 지켜야 했고, 누군가는 남아있는 주민들을 관리해야 했다.

또 누군가는 피난을 가기 너무 늙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 있는 중소 영주들은 연신 불안한 표정으로 아르에나 후작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분명 그라면 성문을 열어 공격을 주장할 것이다. 그 말에 힘을 보탤 생각이었다. 대신 자신들의 영지를 가장 먼저 갔으면 했다.

"이래도 성을 지키자 주장할 텐가?"

"...여러 부대로 나뉜 왕국군의 위치를 정확히 모릅니다. 혹여나 그 중 하나가 크게 돌아 비어버린 성을 공격하러 온다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자네다운 대답이야. 그런데 우테라 백작. 나보다 여기 있는 영주들을 설득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 하나?"

"..."

막사를 한번 둘러본 우테라 백작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라고 이들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영지가 짓밟히고 있는 상황에 그저 성만 지키자고 주장한다면 분명 납득하기 어려우리라.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건 좋지만, 그 소가 자신만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희생이라면 말이 달라지니 말이다.

최악의 경우 이 자리에 있는 지원 병력이 모조리 돌아갈 수도 있었다.

"우테라 백작. 자네의 영지만 지키고자 함은 이 자리에 모인 여러 영주들을 너무 무시하는 처사 아니겠는가?"

"그건...!"

물론 성을 지키면 지킬수록 자신의 영지는 안전해지는 것은 맞았다.

우테라 성을 넘어야만 비로소 우테라 영지가 나오니 말이다.

그러나, 후작의 말은 명백한 억지였다.

자신이 권력이나 힘으로 이들을 불러 모은 게 아니었다. 그저 지리적으로 좋은 위치에 있기에 쌍둥이 성을 막으라는 명령이 수도에서 내려온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영주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게 아님을 모두들 잘 알고 있으시지 않습니까. 아르에나 후작님. 지휘 체계를 분열시키는 언행은 주의해주셨으면 합니..."

"그런가? 내가 실수했군. 그런데 말이야... 결국 결과는 똑같지 않나? 자네 영지는 아무런 피해도 없고 이 자리에 있는 영주들은 모두 영지를 빼앗길 위기인데 말이야."

간악한 자.

교활한 자.

비열하기 짝이 없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우테라 백작은 필사적으로 표정을 유지했다.

결국 그가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성문을 여는 것.

성문을 열어 왕국군을 처단하러 가는 것.

그렇게 공적을 쌓아 뷔른 영지를 꿀꺽 삼키는 것.

우테라 백작은 외통수에 걸렸음을 깨달았다. 이미 자신을 보는 주변의 눈초리는 사나울 대로 사나웠다.

결국 성문을 열 수밖에 없다.

저들이 가장 원하던 일을 제 손으로 해주는 것과 다름이 없다.

사람이기에 부족할까.

성을 지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알면서도 그들은 성문을 나가고자 했다.

감정이 있기에, 제국의 운명보다 자신의 작은 영지가 소중하기에 생긴 일이다.

"...알겠습니다."

우테라 백작은 결국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담함 감정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만장일치로 회의가 끝남과 동시에 조용하던 쌍둥이 성이 부산스러워졌다.

이틀간의 출전 준비가 끝난 제국군은 드디어 성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왕국군이 후퇴를 한 날부터 엿새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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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초원은 봄의 끝자락에 선 채 다가오는 여름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늘도 자신을 반기는지 날씨도 화장하다.

시원하게 말을 타고 평야를 달리기 딱 좋은 날씨였다.

아르에나 후작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따라오는 부대를 한번 훑어봤다.

무려 14만에 달하는 병력이었다.

다른 영지의 병사들까지 한 번에 통솔하는 건 그 역시 처음이었다.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그리고 그 어깨에 힘을 넣는 원인은 한 가지 더 있었다.

"결국 끝까지 안 나왔습니다."

"겁쟁이는 겁쟁이 아니겠습니까?"

"백작 역시 성을 지키는 중요한 일을 맡은 것 아니겠는가? 너무 뭐라 하지 말게."

"과연 너그러우십니다!"

후작을 따라 나온 중소 영주들은 연신 후작의 주변을 맴돌며 달콤한 말을 꺼냈다.

그저 콩고물을 얻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영지를 조금이라도 빨리 구하기 위해 그러는 행동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르에나 후작은 기분좋게 그들의 아부를 받았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아부를 받겠는가?

다 힘이 있고 자격이 있어야 남들에게 떠받듬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우테라 백작은 6만의 병사와 함께 쌍둥이 성에 남았다.

쌍둥이 성 뒤에 영지가 있어 왕국군의 사정거리에 들지 않는 자들도 함께였다.

겁쟁이 같은 새끼들.

그러니 그들은 평생 자작, 백작이나 하는 것이다.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한번 기회가 왔다면 직접 달려 나가 잡을 줄도 알아야 한다.

뷔른 백작이 죽고 변경백이 사라진 지금, 자신이 뷔른 영지를 흡수하면 제국 서부를 아우르는 새로운 변경백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땐 우테라 영지도 함께 흡수하리라.

모든 영지를 빼앗긴 채 절망하는 그의 얼굴을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었다.

그렇기에 후작은 성문을 박차고 나왔다.

왕국군에 의해 짓밟히고 있는 중소 영주들의 영지를 되찾기 위해?

그건 마음에도 없는 명분일 뿐이다.

"저... 후작님. 혹시 어느 영지를 가장 먼저 가실 생각이십니까?"

주변에 있던 영주 중 가장 성격이 급한 누군가의 질문에 한창 기분 좋은 상상에 잠겨있던 후작이 깨어났다.

그 질문에 주변 영주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뷔른 영지에서 쌍둥이 성까진 다섯 개의 영지가 존재한다.

그중 몇 개는 영지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작은 영지들도 있었지만, 그 마을을 다스리는 영주들 역시 후작의 입에 귀를 기울였다.

오히려 크기가 작으면 작을 수록 그 영지가 소중하기에.

"흐음... 우선 가장 가까운 영지부터 되찾은 후에 상황을 봐서 병사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후작의 말에 영주들의 희비가 갈렸다. 그들 중 하나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역시 현명하십니다! 가까운 곳부터 차근차근 정리하는 것이 옳다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웃는 영주였다.

무려 14만이 넘는 대병력은 보무도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가장 가까운 영지는 쌍둥이 성에서 사흘 거리.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설마 왕국군이 비효율적으로 18만 대군을 한번에 운용하지는 않으리라.

후작은 우선 가장 가까운 영지에 있는 왕국군을 압도적인 병력 차이로 단번에 잡아먹을 생각이었다.

그 후에 다른 영지로 곧바로 쳐들어가 갈라진 왕국군을 한 번 더 몰살시키면, 오히려 자신들의 병력이 더 많아지게 된다.

자신들의 병력이 더 많아진 그때, 후작은 왕국군을 추격해 전면전을 펼칠 생각이었다.

기병이 더 많은 자신들의 병력 특성상 대회전에선 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후작의 작전은 시작부터 난관에 휩싸였다.

"...모두 물러났다고?"

성벽에 걸린 시체가 왕국군이 다녀갔음을 알 수 있었다. 성내의 주민들을 통솔하던 가신이나 관리였으리라.

"사, 사흘 전에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 끌려온 노인이 벌벌 떨며 후작에게 대답했다.

자신들을 구하러 온 아군이었지만, 평생 볼 일도 없을 것 같던 고위 귀족을 대면한 어쩔 수 없는 반응이다.

"어느 방향으로 갔지?"

"뷔른 성이 있는 서문으로 물러났습니다. 야, 약 사만여 명이었습니다."

사만.

자신의 예상대로 왕국군은 18만의 병력을 다섯 갈래로 나눈 건가?

너무 늦게 출발했다.

원래 계획대로 이틀만 일찍 출발했으면 따라잡을 수 있었는데...

우테라 백작에 대한 증오심이 한층 더 강해진 후작은 혀를 찼다. 맘 같아선 이 부대를 이끌고 그대로 돌아가 우테라 성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어쩔 수 없지. 이곳에서 하루 쉬고 다음 영지로 가야겠네."

"알겠습니다."

이 영지에서 나눠진 왕국군을 잡아 먹을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자신도 함부로 병력을 나눌 수 없게 됐다. 혹여나 다섯 부대로 나눴다가 각개격파를 당할 수도 있었다.

만약 우테라 백작까지 모두 나왔다면...

20만의 병력이 모두 성문을 나왔다면 왕국군보다 수가 많다.

14만 대 18만과 20만 대 18만은 그 느낌부터 다르다.

굳이 이렇게 몰려다닐 필요 없이 왕국군처럼 다섯 부대로 나누면 순식간에 격파가 가능했을 것이다.

끝까지 도움이 안 된다.

아르에나 후작의 이가 까득 갈렸다.

두고 보자.

이 왕국군만 정리하고 나면, 그다음은 우테라 백작 네놈이 될 테니까.

"후작님. 혹시 그 다음은 어디로 가실 생각이신지..."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영지로 가야 하지 않겠나. 함부로 병사를 나눴다간 각개격파를 당할 수도 있어."

"옳으신 말씀입니다."

이번에도 단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영주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후작의 주장 역시 정론이었기에 그들은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설마 이 초원에서 18만이나 되는 왕국군의 부대 중 하나를 안 만나겠는가.

다음 영지엔 왕국군이 있기를.

그들은 간절히 바라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틀을 더 걸어 도착한 영지 역시 왕국군의 자취는 찾을 수가 없었다. 성문에 걸린 시체만이 지휘관들을 반겼다.

"이미 떠났다고?"

"...예. 이틀 전에 서쪽으로 빠져나갔습니다."

"..."

이번에도 늦었다.

이틀 전이면 자신들이 출발할 때다.

"병사 수는?"

"삼만이 조금 넘어 보였습니다. 이 성을 관리하던 가신들을 곧장 죽이더니 저희의 식량을 모조리 빼앗고 성을 빠져나갔습니다."

식량을 모두 빼앗아?

설마 군량미도 아닌 일반 주민들이 먹을 식량을 훔쳐 갔단 소린가?

제국의 지휘관들은 어이가 없었다.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전술이다.

"...그래서 성내의 주민들은 먹을 게 없습니다... 혹시 가능하시다면..."

"...군량을 조금 풀어주게."

뭐 하자는 건가.

주민들을 죽인 것도 아니고, 성에 불을 지른 것도 아니다.

술래잡기도 아니고 빙빙 돌기만 하니 후작은 화가 머리끝까지 날 수밖에 없었다.

"...후작님 다음 영지는 혹시..."

"이미 두 영지를 지나쳐왔네. 남은 영지는 세 개 뿐이니 이제 와서 나누는 것도 의미가 없어."

"..."

부대를 다섯 개로 나누어 적들을 각개격파한다는 전략은 이미 유명무실해졌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싸우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왕국군의 꼬리만 쫓아 빙빙 도니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지휘관들을 바라보던 후작은 결국 화가 터졌다.

"애초에 우리가 성문을 일찍 열고 나왔으면 진작 해결됐을 일이야! 이게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가?"

"아, 아닙니다."

"이 영지에 만약 이전 영지의 병력까지 합쳐 칠만의 왕국군이 있었다고 하면, 부대를 나눈 고작 삼만의 부대로 탈환이 가능했으리라 보는가!"

이들의 다급한 마음은 이해했다.

그러나 단순한 산술 계산도 하지 못하는 모습에 후작은 속이 터졌다.

이렇게 속이 좁으니 작위도 남작, 자작인 것이다.

한번.

딱 한 번만 더 이동해보고, 그다음에도 왕국군이 없다면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수확 없이 쌍둥이 성으로 돌아갈 순 없다. 조금 불안하더라도 부대를 나누어 왕국군을 찾을 생각이었다.

"마지막이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가보고, 그때도 왕국군이 도망쳤다면 부대를 나누겠네."

"알겠습니다."

그제야 중소 영주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 모습을 보며 후작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모두 죽여버리고 싶었다.

별다른 작전 하나 못 내면서 그저 자신의 영지만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한심스러웠다.

결국 진절머리가 난 후작은 몸을 돌려 막사로 향했다.

또 며칠 동안 이동해야 하니 쉴 수 있을 때 쉬어야 한다.

차라리 가장 먼 영지로 달려가 볼까.

저들도 척후가 있으니 자신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후작은 머리를 굴리며 간이침대에 누웠다.

저 높은 하늘 위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건 꿈에도 모른 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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