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 후퇴
* * *
"내일 아침, 아니 지금이라도 후퇴를 해야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카인 참모."
안 그래도 조용하던 막사가 더욱더 조용해졌다.
다짜고짜 불러놓고 한다는 소리가 후퇴하자는 말이었으니 어이가 없을 만도 했다.
마음이 급해 폭탄부터 던진 꼴이었다.
여전히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승님, 그리고 여기 계신 모든 분께 묻겠습니다. 저들이 만약 성문을 나와 저희와 대회전을 펼친다고 가정하면, 이길 확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동안 숱하게 회의했던 내용이니 높으면 팔 할, 낮아도 칠 할을 예상하는 건 너도 알고 있는 사실 아니었느냐."
뜬금없는 내 질문에 대답한 사람은 의아한 표정의 스승님이었다.
물론, 스승님뿐만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지휘관의 표정이 동일했다.
"카인 참모. 저들의 원군이 계속해서 도착하고 있고, 그 수가 대략 십오만이 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공성보단 대회전이 더 유리하다고 결론 내리지 않았는가?"
아니다.
십오만 정도가 아니다.
뷔른 성을, 그리고 그 주변 영지를 너무 쉽게 점령했다.
거기에서 온 자만이요. 방심이었다.
왜 저들이 십오만 이상을 모으지 않으리라 생각했을까.
한 번도 침략을 받아보지 못한 제국이다. 그들이 처음으로 영토를 빼앗기고 국토를 유린당하고 있는데 겁쟁이처럼 수비만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은 왜 했을까.
우리가 항상 제국을 상대로 수비만 해와서 그랬을까.
"...그럼. 만약에 십오만을 넘겨 병력이 이십만을 넘는다고 가정하면... 그건 수성을 위한 병력지원이겠습니까, 아니면 반격을 위한 지원이겠습니까?"
"...뭐?"
"이미 저들의 병력은 십오만에 가까워졌습니다. 기병을 다수 보유한 저들과의 대회전은 결코 유리하지 않을 겁니다."
막사가 다시 조용해졌다.
수성이 아닌 반격을 위한 병력 지원이라고? 저들의 병력이 이십만 이상 모인다는 확신은?
이 젊은 참모의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수많은 의심이 내게 쏠린다.
다시 스승님이 입을 열었다.
"지금 한 말에 대한 근거가 있어야 함은 너도 알고 있겠지."
스승님도, 후작도 내 말을 믿는다. 그러나 이 막사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믿느냐는 다른 문제다.
증거를 보여야 한다. 18만이나 되는 대병력을 고작 젊은 참모의 말 한 마디만 듣고 후퇴할 수는 없다.
내 능력을 떠나 근거의 문제다.
"물론입니다."
높다랗게 쌓인 두 성을 제외하면 사방이 모두 초원이다.
척후병을 더 넓게 펴야 한다.
우리의 주둔지 반대편, 성으로 들어가는 지원군을 아주 멀리서부터 파악할 수 있도록.
구슬로 봤다고 하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전쟁을 수행할 때마다, 전투를 치를 때마다 생기는 걸림돌이다.
"성 뒤편으로 척후병을 넓게 뿌려야 합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적어도 사흘 거리까지는 경계를 펼쳐 저들의 지원병력을 미리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도망칠 시간을 벌 수 있다.
마음이 급하다.
후퇴하는 이유도 설명해야 하고, 왜 후퇴가 가장 현명한 선택인지 까지 설명해야 한다.
그게 끝이 아니다.
후퇴하고 나서 어떻게 할 것인지, 병사는 어떻게 나눌 것인지까지 설명을 해야 한다.
그러나 누군가의 태클로 내 말은 끊기고 말았다.
무슨 백작이라 했는데 이름이 기억 안 난다.
"카인 참모. 자네의 말대로 저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곤 했지만, 우리 역시 십팔만이 넘는 대부대를 가지고 있네. 너무 겁을 먹은 것 아닌가?"
"저들의 기병을 피해 없이 막을 방법을 말씀해 주시면 저도 후퇴 의견을 철회하겠습니다."
"뭐?"
"십팔만의 병력 중 그 반수만 잃어도 저희는 전쟁 수행이 불가능합니다. 십만도 안되는 병력으로 뷔른 영지를 포함 쌍둥이 성까지 에어로크 왕국과 비슷한 넓이의 땅덩이를 모두 수비할 자신이 있으십니까?"
"..."
"전 없습니다. 그 정도 병력으로는 고작 지역을 안정 시키는 게 전부입니다. 그러니 후퇴를 주장하는 겁니다."
입에서 나온 말이 거칠다.
나도 알고 있다.
이 막사에서 나보다 어리거나 작위가 낮은 사람은 없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여러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눈치챘지만, 모른 척했다. 후에 안전이 보장되면 그때 가서 사과하면 되는 일이다.
"그러니까... 카인 참모 자네의 말은 후퇴를 하고 나면 저들의 기병을 막을 방법이 있다는 건가?"
"없습니다."
"..."
"...그러나, 각개격파는 가능합니다."
아르에나 후작은 최근 즐거운 취미가 하나 생겼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봤을 때 즐겁냐고 묻는다면 반수 이상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테지만, 그에겐 그 무엇보다 즐거운 유희였다.
"저들은 이 맑은 하늘을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지 모르겠군."
"천둥벌거숭이 같은 원숭이 놈들이 뭘 알겠습니까. 그저 처음으로 밟은 평야에 놀라 뵈는 게 없을 겁니다."
"크하하!"
목을 타고 넘어가는 와인이 달다.
성벽에 앉아 왕국군을 바라보는 그 자체만으로 아르에나 후작은 즐거웠다.
여전히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뒤로 돌리자 도로마다, 광장마다 병사들이 꽉꽉 들어찬 성내가 보인다.
형형색색의 깃발이 나부낀다.
그 모습만으로 아르에나 후작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저 왕국군의 목덜미를 물어 챌 든든한 지원군이다.
"나흘 후에 칼리파 백작이 이끄는 삼만의 부대가 도착한다는 전령이 왔습니다."
"그럼 딱 이십만이 채워지는군."
붉은 와인이 저들의 피처럼 보인다.
몸이 근질거렸다. 지금이라도 성문을 열고 저 무지렁이들을 초원에 눕히고 싶었다.
필사적으로 공격을 반대하는 우테라 백작 그놈도 더 이상 별수 없을 것이다.
"휘하 제장들에게 전하게. 칼을 잘 닦아 놓으라고 말이야. 나흘 후에 성문을 열 것이야."
"알겠습니다."
이 지루한 교착상태도 끝이다.
아르에나 후작은 자신이 가장 선두에 설 생각이었다.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먼저 왕국군의 피를 취하고 싶었다.
상상만으로 즐거워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성벽에 앉아 왕국군의 주둔지를 바라보던 아르에나 후작은 그 웃음을 금방 멈춰야 했다.
"...?"
아침부터 유난히 분주하다 싶었는데, 저들의 행동이 무언가 이상했다.
수백여 개에 달하던 막사가 하나둘 무너지고 있었다.
가장 후방에 멈춰있던 수레가 시야에서 점점 멀어졌다.
저들이 뭐 하는 거지?
미쳤다고 제 손으로 막사들을 부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설마 후퇴를 하려는 건가?
아르에나 후작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장면을 보는 성벽 위에 병사들 역시 동요하는 표정이었다.
"회의를 소집해라! 우테라 성에 있는 지휘관들까지 모조리 소집해!"
자신을 포함해 성벽 위에 올라있는 수백 명이 단번에 미쳐버린 게 아닌 이상, 저들의 행동은 명백했다.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것이다.
아르에나 후작의 이빨이 까득 갈았다.
바로 눈앞에 있는 먹잇감을 이렇게 쉽게 놓칠 수는 없다.
날듯이 성벽을 뛰어 내려왔다.
저 모습을 보면 그 겁쟁이 같은 우테라 백작도 성문을 열자 주장하리라.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아르에나 후작은 막사로 달렸다.
그러나, 아르에나 후작은 자신이 우테라 백작을 너무 대충 봤음을 깨달아야 했다.
"무슨 소리인가! 저렇게 대놓고 도망가는데 무슨 함정!"
답답함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설마 반대의 목소리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지금까지 저희를 성문 밖으로 끌어내려고 갖은 수를 다 쓰지 않았습니까. 성문이 열리는 순간 저들이 몸을 돌려 공격해 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 병력도 이미 십칠만을 넘겼네! 불리한 부분은 전혀 없지 않은가!"
"성문은 좁고, 한 번에 나갈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대열을 정비하지도 않고 저들과 싸우면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속에서 열불이 끓어올랐다.
그러나 우테라 백작이 하는 말은 정론이었다.
만약 이게 정말 함정이라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는 셈이었다.
나흘.
딱 나흘만 기다리면 삼만의 원군이 온다.
저들이 조금만 늦게 후퇴하거나 원군이 조금만 빨리 왔으면 좋았을걸...
"자네들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의견들을 말해 보게!"
"..."
"..."
막사엔 아르에나 후작과 우테라 백작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열 명 가까이 되는 중소 영주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말을 꺼내는 자가 없었다.
아르에나 후작의 말도, 우테라 후작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에 쉽게 편을 들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르에나 후작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마지막이다.
정말 마지막으로 참는 것이다.
다음에도 반대한다면, 차라리 따로 부대를 운용하리라.
"자네의 말도 일리가 있으니 이번엔 양보하겠네. 그러나, 훗날 이 일로 인해 무언가 사건이 발생한다면 그것 역시 자네의 책임이네."
"...알겠습니다."
결국 아르에나 후작은 후방으로 도망가는 왕국군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마치 쫓아오라는 듯 저렇게 여유로울 수가 없다.
식량이 가득 담긴 수레를 바라보며 회의 전 마셨던 와인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
"..."
그토록 달던 와인이 썼다.
그렇게 아르에나 후작의 즐거운 취미는 그 와인잔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그리고 며칠 후 새로 들어온 정찰병의 보고에 아르에나 후작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을 맛봤다.
"...왕국군이 후방을 정리 중이라고...?"
"예. 영지마다 남아있던 관리들의 목이 모두 성 밖에 걸려 있었습니다. 제가 확인한 영지만 세 곳이 넘습니다."
"......회의를... 회의를 소집하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