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교활한 사람
* * *
쾅!
"그게 정말 독이었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나!"
막사 중앙에 있던 탁자가 쪼개질 듯 비명을 질렀다.
그럼에도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 듯 아르에나 후작은 죽일 듯한 눈빛으로 우테라 백작을 노려봤다.
일부러 그랬으리라.
분명 일부러 안 나간 것이다.
다시 한번 물을 가지고 주도권을 가지려고 분명 왕국군을 가만히 냅둔 것이리라.
자신은 왕국군이 우테라 성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언제든지 도울 수 있게 출정 준비를 마쳤었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려 들어?
"...독이라 하기엔 양이 너무 많았습니다. 게다가 그걸 뿌리는 병사들은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양이 많으면 독이 아닌가! 그걸 변명이라고 해!"
다시 한번 탁자가 비명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오늘 반 토막이 나지 않을까.
주변에서 연신 눈치를 살피는 중소 영주들은 찍소리도 못한 채 탁상의 명복을 빌었다.
"차라리 지원 요청을 보냈어야지! 그러면 우리가 저들의 주둔지라도 불 지르고 왔을 것이야! 그저 성안에만 있으면 저들이 저절로 물러가는가!"
"...죄송합니다."
결국 우테라 백작은 고개를 숙였다.
독을 푸는 왕국군의 진형이 전투 진형이었다.
저들의 눈빛은 독이 아니라 우리를 보고 있었다.
할 말은 많았지만, 우테라 백작은 속으로 삼켰다.
눈빛이니 진형이니 이런 말을 했다간, 오히려 후작의 화만 돋울 가능성이 컸다.
"위에서 내려온 명령대로 쌍둥이 성을 지켜야 하는 건 아네! 그러나 저들이 약점을 보이면 찌를 줄도 알아야지!"
"...맞습니다."
비어버린 주둔지를 공격하는 건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다.
성정은 불같으나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그러면 애초에 후작까지 되지 못했으리라.
우테라 백작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때, 막사가 열리며 전령이 들어오며 입을 열었다.
"동쪽에서 약 삼만의 부대가 접근 중입니다. 깃발로 보아 튀른 자작 영지와 단테르 자작 영지로 보입니다."
그 말에 싸늘하던 막사에 처음으로 훈풍이 돌았다.
무려 삼만이나 되는 원군이 온 것이다.
"삼만의 병사라니. 저희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맞습니다! 이제 저들과의 병력 차이도 이제 크지 않습니다."
18만 대 10만은 두 배에 가까운 수지만, 18만 대 13만은 해볼 만 하다. 밝은 표정으로 외치는 주변 귀족들의 말에 아르에나 후작 역시 처음으로 찡그려졌던 미간이 펴졌다.
"크하하! 가만히 있어도 우리는 강해지고 저들은 약해지는군! 며칠 못가 병력을 역전당하면 저들도 별수 없겠지."
"맞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몰아낼 수도 있겠습니다! 산에 살던 원숭이 같은 놈들이 평야에 발을 들이다니요."
"암. 그게 맞지! 산에 살던 놈들이 평야에 발을 들이다니..."
아르에나 후작은 그 말에 꼭 마음에 들었다.
감히 대 다나크 제국을 침략한 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뷔른 영지 역시 탈환하고 싶었다.
만약 뷔른 영지를 포함 쌍둥이 성까지 이어지는 모든 영지를 빼앗긴다면, 바로 눈앞에 저 원숭이 놈들이 터를 잡는 것이다.
"뷔른 백작은 이미 생사를 알 수 없고... 만약 우리가 뷔른 영지를 탈환하면, 우리가 나누어 가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빼앗긴 영토를 탈환해 자신들이 나눠 갖자니.
귀족으로서는 하기 힘든 노골적인 표현이었지만, 중소 귀족들은 이미 그의 성정을 알고 있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솔직하게 이야기를 꺼낸 후작의 말에 더 혹했다.
훈풍이 돌던 막사가 더욱 뜨거워졌다.
우테라 백작을 따르는 중소 영주들 역시 혹한 표정이었다.
변경백이 다스리는 지역은 결코 좁은 지역이 아니었다. 여기 있는 중소 영주 셋은 모여야 겨우 맞먹지 않을까.
"영토를 나누는 방식은 공평하게 지원 온 병력 비율로 배분해야겠지. ...그렇지 않겠는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
그 말에 막사 내 영주들의 표정이 갈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데려올걸. 미래를 대비해 병사를 나눴던 영주들은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후작의 말에 고개를 숙였던 귀족들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물론 우리가 저들을 밀어내기까지 시간이 걸릴 터이니 그전까지만 병사들을 데리고 오면 상관없겠지."
아직 안 늦었다.
아직 기회가 있는 것이다.
영토를 많이 배분받고 싶으면 영지에 숨겨놓은 병사들을 모조리 데리고 와라.
노골적인 권유였다.
그럼에도 중소 영주들은 하나같이 군침을 흘렸다.
영지를 늘릴 수 있는 결코 쉽게 오지 않는 기회였다. 조금이라도 빨리 영지로 전령을 보내기 위해 영주들의 몸이 달아있는 그때,
"뷔른 백작의 영지는 주인이 없음으로 제국에서 회수하지 않겠습니까. ...같은 나라의 귀족으로서 그건 부도덕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우테라 백작은 실시간으로 험악해지는 눈빛을 받아내며 끝까지 말을 이었다.
자신을 따르던 중소 영주들 역시 자신을 탐탁지 않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해야 하는 말이다.
영지를 배분하는 건 후작이 아니라 황제가 하는 일이다.
후에 후작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제국 서부는 분명히 시끄러워질 것이 분명했다.
"에어로크 왕국을 다시 몰아내면 수도에서 공로가 인정되지 않겠는가. 일단 우리끼리 내정을 하고 후에 내려오는 영토를 나누면 되는 일이야."
"..."
영지가 아닌 금전으로 보상이 내려오면?
제국 동쪽 헤르트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귀족에게 뷔른 영지가 하사되면?
할 말은 많았지만 우레타 백작은 입을 다물었다.
끝까지 말을 이어가기엔 주변의 시선이 너무 안 좋았다.
"쯧. 자네는 그게 문제야. 제장들의 사기를 올릴 생각은 안 하고 그저 안 된다는 말밖에 하지 않으니 말이야."
"..."
그제야 우테라 백작은 후작의 말뜻을 알아 들었다.
훗날은 상관없는 것이다.
여기 있는 중소 영주들의 병사를 모조리 동원해서 저들을 몰아내면, 그 공로는 지휘관인 후작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때 가서 후작이 입을 닦아버린다 해도 힘도, 병사도 모조리 잃은 중소 영주들은 감히 보상 문제를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다.
교활한 사람.
불같은 성정으로 여우 같은 속내를 숨기는 사람.
솔직한 화법으로 성격도 그럴 것으로 보이나 사실 실타래처럼 꼬인 사람.
우테라 백작은 그렇기에 아르에나 후작을 싫어했다.
그러나 이 말 역시 꺼낼 수 없었다.
자신의 생각을 증명할 방법은 없었고, 오히려 자신이 후작을 견제한다는 오해만 받을 것이 뻔했으니까.
"...그럼 오늘 회의는 이만 마치겠네. 다들 바쁜 일이 있는 것 같으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밝은 표정으로 배웅하는 중소 영주들의 인사를 받으며 아르에나 후작이 자리를 떠났다.
그와 동시에 중소 영주들이 황급히 지휘 막사를 벗어났다.
조금이라도 빨리 전령을 보내 병사를 데려와야 한다.
전쟁으로 인해 남자들이 징집된 이때, 떨어지는 콩고물은 분명 그들에겐 한 줄기 희망이었다.
농사를 지을 영토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오직 우테라 백작만이 어두운 얼굴로 홀로 지휘 막사를 지킬 뿐이었다.
"후우..."
결국 한숨이 터졌다.
저놈의 밤하늘은 언제 봐도 이쁘다.
벌써 쌍둥이 성에 처박힌 제국군을 끌어내려고 노력한 지 사흘이 지났다.
성문 바로 앞까지도 가보고, 중앙을 돌파하려는 위협도 가했지만, 제국군은 도통 성 밖을 나올 생각을 안 했다.
뭐 어떻게 해야 나오는 거야.
답답함에 다시 한숨이 터졌다.
정말 성만 지킬 생각인가? 이 넓은 영토를 전부 주고?
뷔른 영지를 포함해 지금까지 점령한 영토 크기만 에어로크 왕국의 절반이 넘었다.
웃긴 건 그렇게나 많이 점령했는데도 다나크 제국 영토의 이 할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사실, 전쟁이 끝나고 점령한 땅을 안정시키려면 지금 먹은 영토로도 충분히 체하기 직전이었다. 일순간에 땅이 갑자기 넓어지면, 당분간은 내정에 집중해야 한다.
"성벽을 날려주는 보물 같은 건 없나?"
벌써 일 년이 넘게 모습을 안 보이는 신이 떠올랐다. 정말 다나크 제국을 완전히 무너뜨려야 모습을 보일 생각인가?
그럼 앞으로 몇 년은 볼일 없을 것 같다.
내가 이렇게 초조해하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제국군의 병력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굳이 구슬로 보지 않아도, 성벽에 늘어나는 여러 깃발의 개수 만으로 쉽게 파악이 가능했다.
물론 구슬로 직접 확인사살도 매일같이 하고 있고.
괜히 심술이 나 돌멩이를 걷어찼다.
오늘도 종일 회의를 했지만, 이렇다 할 방법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오자마자 공성을 해보는 건데...
구슬로 확인한 제국군의 숫자는 이미 우리와 별반 다를게 없었다.
이 상태로는 막사로 돌아가봤자 답답해서 잠도 못 잔다. 나는 막사로 향하던 발걸음을 옮겨 작은 언덕으로 향했다.
저기 앉아서 성이나 조금 바라보다 가자.
한참 쳐다보면 혹시나 무너지지 않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연신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후우..."
기껏해야 삼 분이면 오르는 작은 언덕인데 이것도 언덕이라고 밤하늘이 가까운 것 같다.
언덕 꼭대기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니 오늘도 여전히 달 세 개가 잔인하게 떠 있다.
여기 지구 아닌 거 알아 이 새끼들아.
그래도 밤하늘은 이곳이 더 좋다.
수를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별이 천장에 박혀있다.
지구에선 굳이 찾으러 간다는, 혹시나 발견하면 소원을 빌어야 한다는 별똥별은 일 초에 수 개씩 떨어진다.
지구보다 아름다워서 밤하늘을 보는 습관이 생겼을까.
아니면 이곳이 지구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 밤하늘을 바라보게 됐을까.
여전히 시선을 하늘을 둔 채 품속에 손을 넣어 구슬을 쥐었다.
"..."
20만에 가까운 병사들이 드넓은 초원에 자리를 잡은 모습은 언제봐도 장관이다.
수천 개가 넘는 막사가 일정한 대형으로 쳐져 있고, 중앙엔 커다란 막사가 하나 있다.
잠시 땅 밑을 내려다보다 시선을 옮겼다.
"..."
왕국군이 자리를 잡은 반대편에서 약 일만의 병력이 성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봤던 모습이다.
그런데 늘 이상한 것은, 성으로 접근하는 병력은 늘 아르에나 성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병력을 유지하기 쉬운 건 호수가 가까운 우테라 성 아닌가?
그러나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아르에나 성으로 들어간 여러 병력은 결국 사방으로 흩어졌으니까.
시선을 조금 더 멀리 보내자 저 멀리 오천에 가까운 또 다른 병력이 성으로 접근 중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지원군을 부른 거지?
이미 쌍둥이 성은 포화 상태였다.
두 성과 성 사이에 있는 병력을 모두 합하면 15만이 훌쩍 넘는다. 거의 20만은 되지 않을까.
도대체 왜?
수성이 가능한 최대한의 병력 차는 3대1이다.
우리가 18만이니 저들은 이론상 6만의 병사만 있어도 수성이 가능하단 소리다.
성이 두 개이니 나눈다 치면 처음에 있던 10만의 병사로도 충분히 수성이 가능했다.
그런데 왜 지원 병력이 끝도 없이 올까.
'...'
그때, 머릿속으로 작은 생각의 편린이 스쳤다.
만약... 수성을 위한 병사가 아니라면?
그러면 말이 된다.
수성이 아니라 역습을 위한 병력이라면 말이 된다.
그럼 저들은 지금 힘을 모으는 중인가?
성에 수용할 수 있는 병력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 일시에 뛰쳐나오려고?
'...'
소름이 좍 돋았다.
공성보다 대회전이 유리하다 했지, 제국보다 우리 군이 대회전이 좋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다나크 제국은 기병이 강하기로 유명하다.
테레스 산맥을 넘느라 기병을 거의 못 데려온 우리가 저들과 평원에서 싸운다면?
볼 것도 없이 개발린다.
게다가 병력도 우리가 모자란다.
정직하게 정면승부를 하면 무조건 진다.
지금까지 얻은 영지는 물론 뷔른 영지까지 모조리 뱉어야 할 수도 있다.
아니, 뱉어야 한다.
저들은 테레스 산맥 입구까지 쫓아온 다음에야 말머리를 돌릴 것이다.
병사는 병사대로 모두 잃고, 영토는 영토대로 다시 빼앗긴다.
그럼 제국과 다시 전쟁을 할 힘이 남아 있을까...?
'...!'
...이럴 때가 아니다. 다급히 눈을 떴다. 시야가 순식간에 땅으로 쑥 떨어졌다.
눈을 뜨니 밤하늘이 보인다.
"경계병!"
서둘러 언덕을 내려가며 병사를 불렀다.
"지금 바로 지휘 막사로 긴급 소집 내려! 카인 참모가 요청했다고! 빨리!"
마음이 급하다.
느긋하게 오르던 언덕 길을 전속력으로 뛰어 내려갔다.
"카인?"
"지금 급하게 전달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다시 막사로...! 막사로 가주십시오!"
회의는 아까 끝났지만 아직까지 대화를 나눴는지 지휘 막사 앞에 있던 스승님과 후작을 다시 막사로 밀어 넣었다.
회의가 끝난 지 얼마 안 됐었기에 흩어졌던 지휘관들이 다시 막사로 모이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턱 끝까지 올랐던 숨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모든 지휘관이 모였다.
"카인 참모? 무슨 일인가?"
2왕자의 말을 필두로 모든 시선이 몰렸다.
의아한 시선, 피곤한 시선, 덩달아 다급해 보이는 시선.
그 시선을 받아내며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목이 탄다.
"후퇴... 후퇴해야 합니다."
"...뭐?"
"내일 아침, 아니 지금이라도 후퇴를 해야 합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