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19화 (119/191)

〈 119화 〉 유혹

* * *

"크하하하! 저들을 좀 보게나!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군!"

"역시 뛰어나신 안목입니다. 유일한 희망이 눈앞에서 사라졌으니 저들의 사기도 떨어졌을 겁니다."

"그렇지, 그렇지! 역시 자네는 뭘 좀 아는구만!"

당황해서 진군도, 철수도 못 하는 저 왕국군을 보라.

아르에나 후작은 연신 호탕한 웃음을 내뱉었다.

성과 성 사이에 주둔지를 설치하는 건 자신이 꺼낸 의견이었다.

혹시나 저들에게 물길을 점령 당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아르에나 성이 받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에어로크 왕국도 칼을 갈고 왔나 봅니다. 이십만에 가까운 병사는 왕국의 거의 전 병력이나 다름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도 별수 있겠는가?. 우리도 이미 십만이 넘는 대부대가 모이지 않았는가?"

아르에나 후작은 다시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저들보다 병력은 적지만 그것도 며칠 안에 해결된다. 주변 영지의 병력이 모두 모이면 무려 20만이 넘는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저 주제도 모르는 왕국군보다 더 많은 병사가 모인다.

그 기세를 몰아 저들을 몰아내고 뷔른 영지까지 탈환할 수 있지 않을까.

"차라리 주변 영지의 병력이 모두 모이면 우리가 공격하는 건 어떻겠는가? 여긴 우리의 안방이니 저들을 쉽게 물리치지 않겠는가?"

아르에나 후작은 일부러 더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며 화두를 던졌다. 전선이 길어진 저들에 비해 자신들은 아직 쌩쌩하니 충분히 가능성이 보였다.

그 말에 주변에 있던 중소 영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뷔른 영지와 이곳 쌍둥이 성 사이 영지를 다스리던 영주들이 더욱더 강하게 긍정을 표했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자신들의 영지가 짓밟히는 중이다. 하루라도 빨리 저들을 물리치고 영지로 돌아가고 싶었다.

"좋은 생각입니다! 대회전이라면 저희가 저들보다 기병의 수를 압도합니다."

"그렇습니다. 역시 아르에나 후작님이십니다!"

"클클."

아르에나 후작은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매일 저 고지식한 우테라 백작만 상대하다 다른 귀족들을 만나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저들이 지쳐있는 지금 잠깐 탐색전을 하는 건 어떻습니까? 우리의 매운맛을 보면 저들도 감히 공격해오지 못할 것입니다."

"오호라!"

주변에 있던 귀족의 말에 아르에나 후작은 귀가 번쩍 뜨였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발이 날랜 병사들과 기병으로 흔들어 놓기만 해도 저들은 위축되리라.

영주들이 모여있는 막사가 흥분으로 점점 달궈지는 그때였다.

"안됩니다. 수도에서 분명히 쌍둥이 성을 지키라고 명령이 내려온 것을 아르에나 후작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

사십을 조금 넘긴 듯한 중년의 사내가 막사를 들어오며 고개를 저었다.

굳게 다문 입술과 길게 넘긴 머리카락은 한 눈에 봐도 심기가 강해 보인다. 날카로운 눈매가 그 성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아르에나 후작의 눈에는 그저 고지식하고 고집이 센 모습으로 보였다.

"잠깐 탐색전이야 괜찮지 않겠는가? 설마 우리가 선공을 하리라곤 생각도 못 할 것이네."

"그래도 안 됩니다. 뷔른 영지가 순식간에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지 않으셨습니까. 분명 저희가 모르는 한 수가 있을 겁니다."

"..."

늘 그랬다.

매사에 겁이 많고 신중한 우테라 백작과 자신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의견이 안 맞았다.

그럴 때마다 마음 같아선 영지 전을 걸고 쓸어버리고 싶었지만, 늘 상상으로 멈춰야 했다.

식수.

그놈의 식수가 문제였다.

작은 언덕 위에 세워진 아르에나 성은 전적으로 우테라 성에서 흘러오는 물길에 의존해야 했다.

'건방진 새끼...'

후작인 자신이 백작에게 의견을 굽힐 때마다 박살 난 자존심은 이제 그 흔적도 찾기 힘들다.

오랜만에 다른 영주들과 합이 맞아 기분이 좋았는데 한순간에 모든 자존심이 박살 났다.

자신이 침묵하자 동조를 하던 다른 영주들도 눈치를 보며 뒤로 물러난다.

"...그대의 말도 일리가 있군."

백작에게 고개를 숙이는 후작.

주변 다른 영주들에게 이 모습을 보인 아르에나 후작은 수치심으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뜨겁게 달궈졌던 막사가 어느새 차게 식었다.

호전적인 후작과 신중한 백작.

우테라 백작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벌써 막사 내 분위기가 반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후작을 따르는 자들과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나눠진 것이다.

'그래도 안 돼.'

이 유리한 전장을 벗어나 적들과 대회전을 할 수는 없다.

영지를 빼앗긴 다른 영주들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쌍둥이 성까지 무너진다면 제국의 수도가 코앞이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한다.

고지식한 겁쟁이라 불러도 된다.

이 성을 안전하게 지킬 수만 있다면, 뒤에서 무슨 말이 나오든 자신은 인내할 수 있었다.

"그럼 아르에나 후작님. 모두 모였으니 회의를 시작..."

"됐네. 어차피 성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안 하는데 무슨 작전이 필요하고 회의가 필요한가."

"..."

"병사들 밥이나 잘 챙겨주게. 아니, 식량만 축내고 아무것도 안 할 테니 살이 피둥피둥 찌려나? 오히려 식량을 적게 배분해도 되겠군."

"...그건."

"아무튼, 그런 사소한 건 자네가 주도해서 하게. 난 이만 쉬러 가야겠으니 말이야."

차게 식었던 막사가 더욱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자리에 있던 중소 영주들이 두 사람의 눈치를 필사적으로 살피고 있었다.

"이렇게 모이는 일도 흔치 않은데 나와 술이나 한잔할 사람들 있는가? 내가 좋은 놈으로 대접하지."

이젠 노골적인 편 가르기였다.

백작의 눈치를 보던 몇몇 중소 영주들이 후작을 따라 막사를 벗어났다.

거의 반수에 가까운 숫자였다.

"..."

우테라 백작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회의는 이미 글렀다.

반이나 빠져나간 마당에 무슨 회의를 하겠는가.

'...그래도 안 된다.'

저들은 우리가 나오길 바라고 있을 것이다.

후작을 말리지 않았더라면 저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인 것이 되어버린다.

"...회의는 다음에 하겠습니다."

"..."

여전히 눈치를 보는 자들.

자신과 비슷한 뜻을 가진 자들.

우테라 백작은 참담한 기분에 눈을 감았다.

­­­­­­­

"성을 지키는 제국군은 약 십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생각보단 많은 수가 아니군요."

쌍둥이 성이 저 멀리 보이는 초원에 왕국군은 주둔지를 펼쳤다. 저들의 병력을 모르니 접근도, 후퇴도 어려웠다.

저녁을 먹고 시작된 회의는 시작부터 무거웠다.

저마다의 생각이 이리저리 떠다닌다.

저 성을 무시하고 지나가면 어떨까.

보급로가 잘린다.

무리를 해서라도 성과 성 사이의 중앙을 점령하면?

세 방향에서 기다리는 범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호수를 점령하면?

그 넓은 호수에 풀 정도로 독이 많지 않았다.

어휴.

머리가 지끈거린다.

누구 하나 시원하게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사람의 생각은 다 거기에서 거기다. 그다음은 상대의 빈틈을 찾고 공략할 창의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합류하는 제국군이 더 많아질 거란 사실입니다."

"..."

조용하던 막사가 더욱더 침묵으로 가라앉는다.

안 그래도 공략 방법이 난해한데, 타임어택까지 해야 한다.

그때, 스승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가 공격을 하게 되면 세 방향에서 협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요."

2왕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두 성을 동시에 공략하기엔 힘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한 성만 집중적 공격하면 분명 뒤를 공격당할 것이다.

"그럼 저들이 오게 해야 합니다. 대회전이라고 마냥 유리한 것은 아니지만, 공성보다는 훨씬 쉬울 것입니다."

"오게 할 방법이라... 록센 자작께선 마땅한 방법이 있습니까?"

"저들도 저희의 수작을 파악할 테니 웬만해선 꼼짝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데 까진 해봐야지요."

우리가 갈 수 없으니 저들을 부르자.

상당히 괜찮은 생각이었다. 적어도 공성보단 난이도가 낮을 듯했다.

다른 지휘관들도 별다른 의견이 없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적들을 성 밖으로 빼낼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제장들께선 기탄없이 의견을 말씀해 주십시오."

사소한 것도 괜찮다. 그걸 통해 다른 작전을 생각해 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제야 조용했던 막사에 조금씩 목소리가 오고 갔다.

처음부터 큰 숲을 그리는 건 어렵다. 그러나 나무 하나 정도라면, 그릴만 하다.

"호수를 점령하면 저들이 불안해서 뛰쳐나오지 않겠습니까?"

"한쪽 성을 먼저 위협해서 반대 성의 병력을 꺼내는 건 어떻습니까?"

실제로 통하느냐는 그 이후의 문제였다.

저들을 성 밖으로 꺼낼 수 있다면, 뭐든지 해봐야 했다.

그렇게 수많은 의견이 오고 가며 어느 정도 결론에 도달했을 때, 2왕자가 자리를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우선, 호수를 점령하는 것부터 시도해보겠습니다. 우테라 성 맞은편으로 접근해 적들을 유인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시간에 제한은 없다.

그러나, 저들의 원군이 오기 전 최대한 빠르게 전투를 하는 게 최선이었다.

달들이 떠오름과 동시에 시작했던 회의는 중천에 가서야 끝이 났다.

지휘관들은 저마다 맡은 임무를 기억하며 막사를 벗어났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진군 준비를 끝낸 왕국군이 서서히 이동을 시작했다.

목적지는 우테라 성의 호수 맞은편.

왕국군은 성문을 박차고 나올 적들을 대비하며 전투 진형을 유지한 채였다.

"과연 저들이 나와 줄까요?"

글쎄...

옆에서 재잘거리는 루시의 말을 들으며 생각에 빠졌다.

저들이 성문을 열고 뛰쳐나올 확률?

백에 하나 아닐까.

호수는 생각보다 컸다.

드넓은 호수 맞은편으로 우테라 성이 보인다.

마침내 호수에 도착한 우리는 천천히 우테라 성으로 접근했다.

화살이 날아올 거리보단 멀리, 그러나 저들이 우리를 똑똑히 볼 수 있을 만큼 가깝게.

그럼에도 그들은 반응이 없었다.

혹시 거리가 닿는지 일제히 화살이 한 번 날아왔지만, 그게 전부였다.

가만히 성을 바라보던 2왕자가 손을 들어 명령을 내렸다.

"준비해온 것을 푸세요."

"예."

뿔나팔이 전장에 길게 퍼졌다.

그와 동시에 뒤에서 대기하던 병사들이 보따리를 짊어지고 와 호수에 풀었다.

보따리에서 흘러나온 검은 가루가 호수에 흩어진다. 그 수가 수백 개였다.

얼마 안 되는 양이지만 성에서 최대한 가까운 곳에 풀었으니 우테라 성으로 흘러 들어가리라.

과연 드디어 성벽에서 반응이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병사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반응이 있습니다!"

사실 호수에 푼 검은 가루는 요리를 하느라 사용된 숯가루였지만 저들이 알겠는가. 그저 검은색이니 불안해 할 수밖에.

지휘관, 병사 할 것 없이 모든 시선이 성벽 위를 향했다.

처음 진군할 때부터 갖춰진 전투 진형으로 저들이 성문을 내린 순간 공성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전투 준비!"

드디어 울려 퍼진 2왕자의 외침에 호수에 숯가루를 풀던 병사들이 허겁지겁 뒤로 물러났다.

그 빈자리를 보병들이 메웠다.

성문만 내려가면.

성문이 열리면 공성이 시작되리라.

전장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최대한 빨리 성을 공략해야 한다.

저 멀리 있는 아르에나 성에서 올 지원군이 오기 전 성벽을 넘어야 희망이 있었다.

"..."

"..."

그러나 우테라 성은 성벽 위에 병사들만 분주할 뿐 도통 문이 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긴장감으로 번들거리던 전장에 고요한 침묵이 맴돌았다. 한참을 기다리던 2왕자는 결국 다시 명령을 내려야 했다.

"...다시 숯가루를 뿌리세요."

"예."

온몸에 검댕이 뭍은 병사들이 다시 호수로 다가갔다. 또다시 호숫가가 검게 물들었다.

그럼에도 제국군은 반응이 없었다.

결국, 애타게 기다리던 짝사랑이 깨지듯 왕국군은 별 소득 없이 주둔지로 돌아가야 했다.

그날 유일하게 땀을 흘린 건 포대를 나르던 병사들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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