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 쌍둥이 성
* * *
일주일이 넘는 장마 동안 흠뻑 젖었던 대지는 그 힘을 원천으로 생명을 움틔었다.
빗방울에 떨어진 꽃잎들은 다시 토양으로 돌아가 더욱 크고 화려한 꽃잎으로 환생했다.
작은 야생동물들, 나비와 벌, 이사를 하는 개미들.
그러나 평화도 잠시, 조용하던 초원에 뿔피리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열 명도, 백 명도 아니다.
무려 십수만에 달하는 회색 물결이 푸른 초원을 뒤덮기 시작했다.
꽃이 떨어지고, 작은 들풀이 짓밟혔다.
그들은 생명을 죽이기 위해 작은 생명을 죽이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쌍둥이 성까진 발걸음으로 열흘 정도가 걸린다는 건가?"
"맞습니다. 말을 타고 움직여본 적은 없지만, 분명 제 걸음으론 열흘이 걸렸습니다."
개인의 발걸음보다 부대의 걸음이 더 느리다.
인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속도가 느려짐은 당연하니 쌍둥이 성이 보이려면 보름이 조금 못 되게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말을 타는 기병은 빠르면 일주일 거리다.
가장 빠르게 이동하는 전령은 나흘에서 닷새.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다.
그때, 왼손에 감긴 붕대가 보였다.
저런 상처를 입었는데 칼은 쥘 수 있나?
"그 손은 아직 안 나았나?"
내 말에 그가 다급히 손을 숨겼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고개를 으쓱한다.
"다 나았습니다. 이건 그저 겉멋으로..."
"풀어봐."
"예?"
"풀어보라고."
"..."
내 말에 그가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천천히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정말입니다. 이제 흉터만 남았..."
"잔말 말고 빨리 풀어봐."
"..."
아파서 그런지, 상처를 들켜서 그런지 그가 식은땀을 흘리며 붕대를 풀었다.
마침내 붕대가 모두 풀리고 보이는 그의 왼손은,
"그럼 그렇지."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겨우 상처가 아문 손바닥 중앙은 피고름이 가득했다.
살이 뚫리고 뼈가 뚫렸다. 고작 며칠 만에 나을 상처가 아니다. 현대에서도 큰 수술을 받아야 할 상처인데 금방 낫는다고?
"..."
"자네 집에 가족들 있다 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어. 돌아가."
고개를 돌리면 아직 저 멀리 뷔른 성이 보인다.
이런 손으로 무슨 전투를 한다고.
성벽 사다리는 탈 수 있나?
"아, 안됩니다! 저는 제가 책임질 열 명의 조원이...!"
"..."
"조원이..."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분대장이 분대원 걱정에 전역을 미룬다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자기도 말도 안 되는 변명임을 아는지 말을 하다 만다.
"돌아가."
"...제가 돈을 벌어가야 가족들을 먹여 살립니다. 전쟁 중이라 물가도 높고... 할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여기 있게 해주십시오. 싸울 수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권유했으면 이제 그의 목숨은 그의 책임이다.
"잘하는 게 있나?"
"잘하는 거 말씀입니까?"
내 말에 희망을 찾은 듯 잠시 고민을 거듭하던 그가 이내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참는 거! 참는 거 잘합니다! 화살에 맞아도 끝까지 동료를 데리고 오는 것 보지 않으셨습니까?"
"...고문도 잘 버티겠군. 그럼 쓸데 많겠네."
"그건..."
말이 왜 그렇게 됐냐는 표정으로 그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뱉은 말이다.
아니라고 하면 정말 집으로 갈 것 같았는지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칼슨이라 했나?"
"...예."
"앞으로 자주 보겠군."
"..."
"정말 아무도 없군요."
"그렇습니다. 카인이 가져온 정보가 정말인 듯 합니다."
벌써 두 번째였다.
뷔른 영지를 벗어나 마주한 다른 성들이 텅텅 비어있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미 피난을 갔는지 마을은 텅 비어있었다.
피난을 가지 못한 소수의 주민만 불안한 눈으로 이곳을 바라봤다.
"여기서 하루 쉬었다 가야겠습니다."
"예. 숙영지를 피겠습니다."
뷔른 성에 남은 4만의 부대를 제외한 18만의 부대는 이름 없는 작은 마을을 끼고 초원에 숙영지를 펼쳤다.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뷔른 성을 떠난 지 벌써 나흘이 지났지만, 적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네가 심문을 잘했나 보구나."
"도움이 돼서 다행입니다."
잘했나?
뭐 한 건 없다.
샬롯이 알아서 술술 불었을 뿐.
"...혹시."
"...스승님도 그러시기 입니까?"
샬롯이 이뻐서 그런 거야. 아니면 애인이 둘이라 그런 거야.
왜 난봉꾼 이미지가 붙었는지 모르겠다.
진짜 건드렸으면 할 말이라도 없지. 오해를 받느니 그냥 할 걸 그랬다.
"클클클.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네놈을 놀리겠느냐?"
"..."
억울해하는 내 표정이 웃겼는지 스승님이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평소에 한 짓이 있는지라 할 말이 없다.
나 역시 가만히 찻잔을 들었다.
"...정말 안 했느냐?"
"..."
"클클클."
샬롯에게 얻은 정보를 풀 때마다 들을 생각을 하니 아찔하다. 그냥 말을 하지 말까 잠깐 생각이 들었지만, 어떻게 그러겠는가. 전쟁은 이겨야지.
"그것보다... 스승님께선 쌍둥이 성 같은 전투를 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이렇게 가까운 적은 없었지."
역시 그럴까.
말을 타고 고작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성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였다.
"우선 가서 제대로 확인을 해 봐야겠구나. 한쪽을 먼저 격파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겠지만... 불가능하다면 방법을 달리해야겠지."
"이간질은 어떻습니까?"
두 성을 이간질만 시킬 수 있다면 훨씬 싸우기 좋았다.
한 성을 먼저 함락시키고 다른 성을 공략하면 되니까.
만약 샬롯의 말대로 우리군보다 더 많은 부대가 성을 지킨다면, 정공법은 너무 위험했다.
그러나 스승님의 표정은 어두웠다.
내 말에 잠깐 생각하는 듯 찻잔을 잡은 두 손이 까딱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다."
"이유가 뭡니까?"
"평시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두 성엔 두 영주만 있으니, 그러나 지금은 인근 영지의 귀족들이 모이고 있다 하지 않났느냐. 두 성의 신뢰를 트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두 명을 이간질하는 건 쉽다. 그냥 나쁜 소문을 퍼트리면 되니까.
그러나 열 명은 어렵다. 누군간 이간질을 파악할 테니까.
만약 그 수가 스무 명이면? 서른 명이면?
스승님의 말처럼 불가능에 가깝다.
"...우선 아까 말한 대로 가봐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겠구나. 그 영애의 말을 모두 믿기엔 신뢰가 부족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설마 샬롯이 거짓말을 했을까 싶었지만,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의 말처럼 직접 가서 상황을 봐야 할 듯 싶었다.
그러나 표정에 티가 났을까.
나를 보던 스승님이 돌연 미소를 지었다.
"그 영애도 애인 후보냐?"
"예?"
"왜 신뢰가 부족하다니까 언짢은 표정을 짓느냐? 이 스승에게만 솔직히 말해보거라."
"..."
"어디 왕국이라도 세우려고 그러느냐? 참모 중에 루시라는 여인과도 뭔가 있는 듯 하더니 가는 곳마다 애인을 두려고..."
"아닙니다."
결국 나는 스승님의 말을 끊었다.
샬롯도 아니지만, 루시는 더더욱 아니다.
그 수상한 여자가 애인 후보라고? 차라리 독이 든 사과를 먹고 말지.
그러나 스승님의 눈꼬리는 여전했다. 지금까지 당한 것을 모두 풀겠다는 듯 더 호쾌하게 웃을 뿐이었다.
"클클클. 결혼식 한번 성대하겠구나."
"..."
주변의 성이 모두 빈 것을 확인한 왕국군은 척후병을 더 멀리 보냈다.
결과는 샬롯의 예상대로 였다.
뷔른 성에서 쌍둥이 성 사이에 있는 모든 영지가 비어있었다.
척후병의 보고를 들은 왕국군은 전투 진형을 완전히 풀고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일주일을 더 전진한 왕국군은 마침내 저 멀리 쌍둥이 성을 시야에 둘 수 있었다.
"...큰일입니다."
"..."
"..."
저 멀리 쌍둥이 성을 눈앞에 둔 지휘관들은 2왕자의 말에도 침묵을 유지했다.
성벽 위로 보이는 수많은 깃발.
적어도 여섯 개는 넘어 보이는 종류.
좌우로 보이는 두 성이 모두 그랬다.
성벽 너머에 있는 병사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인근 영주들이 겨우 군사 몇백만 데리고 오지 않았으리라.
"왼쪽에 있는 흰 성이 아르에나 성, 오른쪽에 있는 검은 성이 우테라 성입니다."
갑작스러운 호출로 얼결에 지휘관들에게 설명하게 된 칼슨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말을 이었다.
"우테라 성은 작은 호수와 붙어있어 수원이 풍부합니다. 대신 지반이 약해 성벽 높이가 조금 낮은 편입니다."
"계속하게."
"예, 예... 아르에나 성은 작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러나 수원이 적어 우테라 성으로부터 물길을 끌어와 쓰고 있습니다."
그때 지휘관 중 하나가 눈빛을 빛냈다.
"그럼 그 물길만 잡으면 아르에나 성은 자연히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지원 병력이 성에 꽉 들어찬 상황이라면 물 부족이 극심할 것입니다."
아니다.
물길은 어떻게 잡을 건데.
역시나 곧바로 태클이 들어왔다.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연 건 후작이었다.
"저 두 성 사이에 자리를 잡으면 앞뒤로 협공을 받을 텐데 버틸 수 있겠는가? 저 깃발의 수만 봐도 우리보다 적은 수는 아닐 듯 한데."
"...그건."
"그럼 방법만 찾으면 아르에나 성을 함락할 수 있겠군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전략입니다."
그때, 치고 들어온 2왕자의 말에 침몰하던 지휘관의 눈이 다시 빛났다.
마냥 틀린 말은 아니다.
아르에나 성으로 들어가는 물길만 막으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그 회의는 열리기도 전에 끝이 났다.
서서히 접근하는 우리를 발견한 두 성에서 곧장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이내 성문이 열리고 병사들이 튀어나왔다.
한눈에 봐도 수만에 달하는 병력이었다.
우리에게 오는 건가?
성벽을 놔두고 대회전을 해?
성을 바라보던 지휘관들의 눈빛에 긴장감이 도는 그때,
"...저들이 지금...?"
"..."
"...물길을 수비할 생각인 듯 합니다."
성과 성 사이의 평야가 병사들로 메꿔지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저기까지 반나절은 더 가야 도착한다.
바로 눈앞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전략 하나가 사라지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성을 비워두고 성과 성 사이를 수비하겠다는... 겁니까? 수성은 포기하고?"
수성을 포기해?
아니다. 그럴 리는 없다.
성을 포기하고 물길을 막는 건 몸을 지키겠다고 헬멧을 벗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럼 왜 나왔을까?
...도대제 왜?
그때, 머릿속을 꿰뚫는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야. 아닐 거야.
저렇게 많은 병력이 성 밖으로 나왔는데 그건 아닐 거야.
그럼에도 본능은 확신을 가져왔다.
저렇게 많은 병사를 초원으로 내보내도 되는 이유.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보란 듯이 병사들을 꺼낸 이유.
"...그게 아닙니다."
이 전투... 생각보다 더 어려울 듯 하다.
"저렇게 중앙을 막아도 성을 수비 할 병사들이 남았다는... 뜻입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