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 돈 많이 벌어올게
* * *
장장 일주일간 내리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먹구름을 뚫고 내려오는 햇살은 만화영화 속 피날레와 비슷해 보였다.
이 세계에 어딘가에 있던 마왕이 죽은 걸까.
누군가가 그리울 땐 하늘을 본다 했다.
자연스러운 본능일까. 사람들의 관습일까.
허나 하나 확실한 건 이 세계로 넘어오고 나서부턴 하늘을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도, 맑은 구름이 떠다니는 낮에도 고개를 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나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사색에서 깨어났다.
방에 온 뒤로 계속 아무 말도 없었으니 궁금할 만 했다.
"못생긴 여자는 알 필요 없어."
"..."
어이가 없는지 대답이 없다.
그리곤 이내 밥맛이야. 라는 여인의 속삭임이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질문은 내가 하는 거지. 네가 하는 게 아니야."
"이제 물어볼 말도 더 없잖아요."
"그 말은 네가 포로로서 쓸모없다는 소리도 된다."
"...죽일 마음도 없으면서."
"..."
뒤로 돌아 꿀밤을 한 대 때릴까 하다가 말았다. 괜히 살려준다고 약속했나 잠깐 후회가 든다.
터치 하나하나가 정이 되고 연이 될 것이다.
다신 볼 일 없는 여인이다.
나는 대답 대신 먹구름을 뚫고 내려오는 햇살들을 다시 바라봤다.
"장마가 지나가면 한동안 초원이 진흙탕이 돼요. 한두 명이면 모를까 수십만이 넘는 대군이 지나기에는 무리가 있을 거예요."
"이젠 적군도 돕는 건가?"
"이젠 평민이니까요. 당신들에 대한 적대감은 하녀가 되기로 마음먹은 순간 다 날렸네요."
"..."
정말 버렸을까.
아니, 버림을 강요당했다.
그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
그 분노를 떠안고 살아가기엔 너무나 힘드니까.
자조적인 목소리로 체념한 그녀를 향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샬롯 같은 여인을, 뷔른 백작 같은 귀족을 몇 번을 죽이고 끌어내려야 내가 집에 갈까.
창문에서 시선을 떼고 몸을 돌렸다.
이게 문제다.
꼭 고개만 들어 하늘을 보면 사람이 감성적으로 변했다.
그래서 안 할 거야?
그냥 죽을 거야?
답답한 소리 하지 마라.
어차피 내게 선택권은 없으니까.
완전히 몸을 돌리자 침대 위에 앉아있는 샬롯이 보인다.
추운 고문실이 문제였는지 아니면 원래 몸이 약한 건지 그녀는 늘 침대에서 살았다.
"요즘은 머리카락이 안 부스스 하군."
"...배웠으니까요."
그녀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서서히 적응하는 것이다.
하녀가 없는 삶.
스스로 해야 하는 삶.
겨우 머리카락을 관리하는 일이지만, 그녀 스스로 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오늘은 어떤 일을 물을까 하다가, 오늘 아침에 있던 회의 내용을 꺼냈다.
"뷔른 성이 무너진 게 생각보다 타격이 컸던 모양이더군. 근처에 있던 다른 영지가 모조리 뒤로 물러났다."
"아마 쌍둥이 성으로 갔을 거예요."
"쌍둥이 성?"
"뷔른 성에서 수도로 가려면 아르에나 영지를 꼭 지나가야 해요. 그 영지에 있는 두 성이 쌍둥이 성이에요."
작은 영지가 22만이나 되는 왕국군을 막을 방법 따위는 없다.
몰아치는 해일을 피해 후방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쌍둥이 성.
다 거기로 모인 건가?
좋은 정보를 얻었다.
"더 자세히 이야기 해봐."
"뷔른 성을 제외하면 제국 서부에 있는 거의 유일한 방어 목적의 성이에요. 두 성의 거리가 가깝고 유기적이라 한 성만 공격하다간 등을 맞을 수도 있어요."
"두 성의 거리가 얼마나 되지?"
"말을 타고 한 시간이 안 걸려요."
그 정도면 서로 보이겠는데?
생각보다 훨씬 가까웠다.
기습을 통한 함락도 불가능에 가깝단 소리다.
"장마로 발이 묶인 동안 제국에서 원군을 보냈을 거예요. 근처 영주들이 병사들을 이끌고 모인 것까지 하면... 왕국군보다 적은 수는 아닐 거에요."
"성이 그 정도로 크다고?"
"대신 거기가 뚫리면 수도 근처까진 별다른 방어 거점이 없어요."
다나크 제국의 자신감이 느껴진다.
침략하던 입장에 선 그들에게 수비를 위한 성은 필요가 없었으리라. 그 자만심이 비수가 되어 돌아오는 중이었다.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당장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전술이 없다.
구슬을 통해 직접 확인해 봐야 뭐라도 나올 듯싶었다.
만약 쌍둥이 성까지 뚫는다면?
대륙을 가로로 양분한 제국 중 하나를 무너뜨릴 수 있지 않을까.
그곳을 지나면 수도까진 곧장이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또 다른 정보는?"
"으음... 제가 아는 건 그게 전부에요. 왜 쌍둥이 성이 지어졌는지... 그런 건 안 궁금하시죠?"
"그런 거 말고."
인구, 성벽의 재료, 주변 수원의 유무, 지형, 성의 구조.
수집 가능한 모든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아무런 전략도 없이 손짓 하나로, 말 한마디로 성을 무너뜨리는 건 신의 영역이다.
내가 인간인 이상 동원 가능한 모든 수를 써야 한다.
"두 성의 주인이 다르다는 건... 정보가 될까요?"
"자세히."
"두 성이 지어진 이유와 같은 이야기이긴 한데, 원래는 성을 하나만 짓기로 했대요. 가까운 거리에 성을 두 개나 짓는 건 비효율적이니까요."
"그렇지."
"그런데 인접한 두 영지가 서로 자신의 영토에 성을 지으려 했대요. 서로의 지형이 수성에 더 유리하다면서요."
"...그래서 둘 다 지었다고?"
"뭐... 두 영주의 자존심 싸움이었죠. 수도에서는 성이 두 개면 나쁠 건 없으니 가만히 둔 거고요."
그녀의 말에 따라 수많은 단어가 떠올랐다 가라앉는다.
이간질?
정보 차단?
기만?
회유?
정말 중요한 정보였다.
아무리 단단한 성벽이라도 그 틈 사이엔 금이 간 돌이 있다.
그 틈새를 노린다.
그곳만 계속해서 때리면, 언젠가 성벽이 무너질 테니까.
스승님과 이야기할 차례다.
쌍둥이 성에 적들이 모이고 있다는 정보는 분명 나쁜 소식이었지만, 공략법이 있다면 오히려 일망타진할 기회가 되리라.
자리에서 일어나 여전히 침대에 앉아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안 죽이길 잘했어."
"뭐, 뭐라고요?"
갑작스럽게 머리에 손이 올라오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바짝 굳었던 샬롯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으니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힌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못생긴 거 용서해줄게."
"하...!"
남자가 머리를 쓰다듬은 건 처음인지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 와중에도 기가 찬다는 듯 나를 노려보는데 눈초리에 영 힘이 없다.
"부끄러워?"
"...이익! 나가요!"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구름 한 점 없다. 대지를 적신 비는 초원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초원을 가로지르는 도로는 사람이 없던 그 잠깐 사이에 다시 초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다녀올게."
"..."
칼슨은 집 앞까지 마중 나온 아내를 꽉 끌어안았다. 왼손은 여전히 붕대를 칭칭 감은 채였다.
"울지마."
흔들리는 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우리 마누라 울음이 많아서 어쩌나.
"아빠!"
"어이구. 우리 딸."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딸을 들어 올렸다.
저번 주에 세 살이 된 딸아이가 품에 안겼다.
"엄마 말 잘 듣고 있어. 아빠 돈 많이 벌어올게."
"히히, 응!"
한 손은 딸내미, 한 손은 와이프를 안았다.
정말 가기 싫다.
정말 가기 싫어.
라이넬 그놈처럼 손바닥 말고 어깨에 화살이 박혔으면 안 갔을 텐데.
해맑게 웃으며 형님, 형님 하는 그놈이 떠오른다.
"이제 십인장이라 직접 싸울 일도 없어! 너무 걱정하지 마!"
라이넬을 살렸던 일로 공적을 인정받아 얼결에 십인장이 됐다.
주변 병사들에게 귀감이 되었다나 뭐라나.
귀감이라는 단어도 처음 들어본 칼슨은 그저 봉급이 올랐다는 사실이 기뻤다.
십인장이든 일반 병사든 칼 들고 적과 싸우는 건 똑같지만 아내가 알 리가 있는가.
그저 자신감 넘치는 남편의 표정을 보며 불안감을 삭힐 뿐이었다.
"다녀오면 우리 둘째나 나을까?"
"셋째도 낳아줄 테니까 무사히 돌아오기만 해..."
셋째?
셋째까지 낳으면 허리가 휘지 않을까.
그래도 일단 웃었다.
자신이 웃어야 그녀가 덜 울 테니까.
"...꼭 무사히 다녀와야 해."
"당연하지. 이래봬도 참모님과 안면까지 튼 사이야."
벌써 백 번은 넘게 아내에게 자랑했던 말을 또 꺼냈다.
굳이 따지면 말 몇 번 섞고 욕 한 번 잘못했다 죽을 뻔한 거였지만, 뭐 어떤가. 라이넬 그놈 말고는 진실을 아는 사람은 없는데.
저 멀리 병사를 호출하는 뿔나팔 소리가 들려온다.
두 여자를 다시 한번 꽉 끌어안고 천천히 품에서 떼어냈다.
이제 정말 갈 시간이다. 여전히 울음을 터트리는 아내에게 손을 흔들었다.
전쟁이니 복수니 무슨 상관이겠는가.
위에서 시키는 대로 가자니까 가고, 오라니까 오는 거다.
자신은 그저 여우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딸내미에게 따뜻한 빵 사줄 돈만 받으면 만족했다.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어 인사하곤 몸을 돌렸다.
골목마다 보따리를 잔뜩 싼 병사들과 그 가족들이 배웅하는 중이다.
이 골목에도, 조금 더 걸어간 그 옆 골목에도.
성내의 모든 사람이 문밖을 나와 가족을 배웅하고 있었다.
살아 돌아오자.
무조건 살아오자.
밥 잘 먹고 있어.
돈 많이 벌어서 돌아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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