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16화 (116/191)

〈 116화 〉 못생겼어

* * *

"...헤일리를 조심하세요."

"뭐?"

"다나크 제국에 헤일리라는 사람이 있어요."

은발 머리카락에 윤기가 좔좔 흐른다.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고는 다시 아무렇지 않게 홍차를 마신다.

보송보송한 그녀의 피부를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유라페스 헤일리... 다나크 제국 유라페스 공작 가문 사람이에요."

"유라페스?"

어디서 들어본 성이다.

다나크 사람과 인연이라곤 하나 없는 내가 들어본 성이라...

헤르트 전쟁 밖에 연관점이 없다.

"아무튼 그 사람이 왜."

"...말을 굉장히 잘하는 듯해요. 변경백이었던 우리 아버지가 그녀를 만난 후 중앙으로 진출하고 싶어 하셨어요."

"..."

말을 잘 한다라.

너무 광범위했다.

함께 오는 근거도 빈약했다.

지금까지 그랬듯 별거 아닌 정보 같은데.

그런 것 치고는 말하는 폼이 꽤나 당당하다. 어제까지 벌벌 떨던 여자는 어디 가고 도도한 영애가 홍차를 마시고 계실까?

"지금까지 준 정보 중에 제일 쓸모없어."

"...이게 제일 중요한 거예요."

"그래? 그럼 이제 네 쓸모는 다 한 건가?"

"..."

이것 봐라?

무서워하지를 말던가, 째려보지를 말던가.

갑작스러운 협박에 두 눈이 잔뜩 흔들리는 주제에 똑똑히 나를 바라본다.

"내가 너무 잘해줬나?"

"..."

그제야 붉은 두 눈이 밑으로 깔렸다.

그러나 어제의 그 느낌은 전혀 아니었다.

그저 내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였을 뿐, 얼굴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헤일리란 여자에 대해서나 더 말해봐."

"으음... 작년 여름에 저희 영지를 찾아왔어요. 제국 내에 숙청의 바람이 불고 있던 찰나에 공작 가문의 후계자가 찾아온 것이죠. 영지는 귀빈을 모시기 위해 난리가 났었어요."

"왜? 공작도 아니고 후계자일 뿐인데."

"그 숙청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게 유라페스 공작 가문이니까요."

"...!"

그제야 나는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기억의 편린을 붙잡을 수 있었다.

유라페스 에슬러.

헤르트 원정 때 페틸 자작을 포섭하고 엘라가 지키던 성을 공격했던 지휘관이었다.

분명 작년 여름 마틴 경이 가져온 정보에도 제국 내 권력 싸움이 심화되고 있다는 소식이 있었다.

유라페스 에슬러.

그리고 유라페스 헤일리.

"유라페스 에슬러는 어떻게 됐지?"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패전의 책임을 물고 곧바로 처형됐어요. 그것도 공작이 직접 황제한테 제안했대요."

"그래서 헤일리라는 여자가 후계자가 된 거고."

"맞아요."

머릿속의 퍼즐들이 하나둘 맞춰진다.

자신의 영토를 짓밟은 제국에 강렬한 증오를 가졌던 페틸 자작이 에슬러의 꾐에 넘어가 헤르트를 배반했었다.

헤일리라는 여자 역시 같은 핏줄이니 말솜씨가 범상치 않으리라.

"네 아버지에 대해서 더 자세히 이야기해봐."

다나크 제국의 대리자가 누군지는 모른다.

헤일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제국에 피바람을 몰고 온 공작 가문의 후계자에 대한 정보라면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우리 가문은 백여 년 전부터 이 뷔른 영지를 다스렸어요. 아버님 역시 제국의 변경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 능력도 충분하셨고요."

...아닌거 같던데.

그러나 딸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묵묵히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작년 여름 헤일리라는 사람이 다녀간 뒤 사람이 변했어요. 무언가 다급해 했고... 중앙으로 가고 싶어 하셨어요."

"이 영지를 버리고?"

"네. 그리곤 뷔른 영지는 뒤로 한 채 주변 후작, 공작 가문와 연을 맺기 위해 돌아다니셨어요."

"그러다가 이번 전쟁 때 황자가 원군으로 왔고."

"그... 황자라는 사람 한 명이 우리 영지를 좌지우지했어요."

그녀의 눈에 슬픔이 깃들었지만, 모른 체했다.

위로해줄 관계도 아니었고, 이유도 없었다.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계속해서 올라왔다.

이 영지를 다스리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중앙으로 가기 위해 영지를 뒤로한다?

어딘가 어색하다.

비록 백작이라는 작위에 그쳤지만, 변경백이라는 권력은 웬만한 후작과 맞먹을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다.

국경을 지키는 대신 넓은 자치권과 군사력을 가질 수 있다.

굳이 중앙으로 가지 않더라도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데 굳이?

"직접 본 적은?"

"만찬 때 한번 본 적이 있긴 했어요. 물론,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지만..."

처음으로 그녀가 쓸모 있었다.

직접 만날 일은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알고 있어서 손해 볼 일은 없다.

외모를 묻는 내 질문에 그녀가 잠시 기억을 떠올리려는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굉장히 수수한 인상이었어요. 아, 외모는 정말... 여자인 제가 봐도 반할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갈색 머리에 갈색 눈 때문에 오히려 미모가 깎인다고 해야 할까요?"

갈색 머리에 갈색 눈.

거기에 아름다운 외모.

눈앞의 그녀처럼 은발에 적안처럼 특이한 색에 비해 너무 평범했다.

아마 길가에서 마주치더라도 못 알아보지 않을까.

그래도 기억해둬서 나쁠 것은 없었기에 그녀의 말을 들으며 차곡차곡 기억을 정리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정보를 정리하느라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빠져있는데, 그녀가 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게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할 말 있어?"

"...만약 우리가 적으로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유혹해도 소용없어."

"...하."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린 그녀가 이내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저도 당신 유혹할 생각 없어요."

"그럼 그런 소리 하지 마."

갑자기 그런 말은 왜 하는가.

만약이라는 말은 좋아했지만, 지금은 의미가 없었다.

"원래 그렇게 까칠해요?"

"응."

"아닌 거 같은데."

"내일 뜰 해는 보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

이 여자가 오늘따라 왜 이러지?

어제만 하더라도 눈도 못 마주치더니 오늘은 뭐 잘못 먹었는지 영 이상하다.

창밖을 보니 해가 슬슬 지고 있었다.

좀 있으면 저녁 먹을 시간이다.

오늘 일과는 여기까지.

직장인이 가장 좋아하는 칼퇴를 솔선수범하는 입장으로서 오늘은 이만 방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그때, 여전히 나를 쳐다보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전 이 성에 남고 싶어요."

"뭐?"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서요. 하녀가 될래요."

"진심이야?"

"네.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요. 전쟁이 끝나면, 착한 영주님이 올 수 있게 해주세요."

"그건 내 권한이 아니야."

"그땐 있을 거예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작위도 없고 직급도 겨우 참모인 내가 영지 임명권에 왈가왈부할 권한이 어디 있다고.

어이없는 시선을 보냈지만, 그녀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맘대로 해라."

"고마워요."

"알겠지만 지금은 안돼. 전쟁이 끝나면 실종 처리로 바꿔줄 테니까 그때부터."

"알겠어요."

그래. 너라도 목줄을 풀고 자유롭게 살아라.

비록 이전보단 못난 삶이겠지만, 지금처럼 감옥 같은 삶보단 주체적이지 않겠냐.

네가 원하는 삶을 택했으니 네가 원하는 자유를 꿈꿔라.

나는 못하니, 너라도 그렇게 해라.

어쩌면 나는 그녀를 통해 나를 투영했을지도 모르겠다.

내 손에 잡힌 그녀와, 신의 손에 잡힌 나와 별 다를 게 없어 보였으니까.

분노로 가득 찼던 어제에 비해 지금은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어제 그 말은 실수였다고 취소할 생각은 없었다.

만약 내가 취소하면, 신도 약속을 취소할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저한테 잘해줘요? 당신이야말로 저 좋아해요?"

"뭐?"

"그렇잖아요. 세상에 전쟁 포로를 이렇게 잘 해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못생겨서 그래."

"...네?"

"못생겨서 안타까워서 그랬다고."

그녀한테 나를 투영했다는 소리는 절대 할 수 없다. 말해도 이해 못 할뿐더러 오히려 오해만 살 이야기다.

그렇기에 그냥 아무렇게나 던진 말인데 생각보다 반응이 격했다.

"...제가 못생겼다고요?"

"응."

사실, 예쁜 얼굴이었다.

가슴 밑까지 내려오는 은발 머리카락과 그에 못지않는 흰 피부는 남자의 마음을 동하기 충분했다.

조금 말라 보이는 게 흠이었지만, 드레스를 입었음에도 튀어나오는 넓은 골반은 남자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거, 거짓말 치지 마세요. 살면서 한 번도 그런 말..."

"목 떨어지고 싶은 게 아니면 변경백 딸한테 그런 말 못 하지."

"...그래서 제가 씻는 모습을 매일 보면서도 안 건드린... 건가요?"

"응."

아니.

탕 속으로 얼핏 보이는 가슴에 매일 수십 번씩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만약 영지를 떠난 지 한 달이 아니라 일 년이 지났었다면 못 참지 않았을까.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충격을 받았는지 붉은 눈이 사정없이 떨리는 모습에 괜스레 미안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내일 다시 오겠다."

"..."

대답이 없으니 더 미안하네.

그래도 이게 낫다.

여기서 그녀와 친해진다 한들 어떻게 할 건가.

아무리 엘라와 시아라가 멀리 있다고 한들 샬롯을 가지고 놀기엔 마음에 걸렸다. 친해지기 전에 벽을 세우는 게 가장 좋다.

게다가 가족도 없이 갑작스레 혈혈단신이 된 그녀에게 내가 접근하면, 그녀는 몸도 마음도 내게 의존할 것이다.

유일한 버팀목이 나 밖에 없으니까.

그러다가 내가 영지로 훌쩍 돌아가 버리면?

'사람 하나 죽겠지.'

의심할 여지도 없다.

몸도 마음도 연약한 그녀에게 겪게 하기엔 너무 잔인한 짓이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그때까지 여전히 충격을 받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샬롯이 휙 고개를 들고는 소리쳤다.

"내일부터 오지 마세요!"

"그건 안돼."

"못생긴 여자 보러 뭐하러 와요!"

"..."

끄응...

남은 며칠이 피곤할 듯싶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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