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 골라라
* * *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쏟을 듯 어두컴컴했다. 혹여나 성 밖으로 나올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말라는 듯 연신 천둥이 울음을 터트렸다.
뷔른 성을 뒤로하고 진군을 준비하던 에어로크 왕국군은 싸던 짐을 다시 풀러야 했다.
진탕된 초원을 밟아가며 진군할 정도로 급한 일도 없었고, 비를 피할 곳도 없었다.
그러더니 결국,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장마의 시작이라 했나.
계획이 틀어진 건 아쉬웠지만, 비를 맞아가며 초원을 횡단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따뜻한 홍차가 입 안을 맴돌며 사라졌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는 여기나 현대나 비슷하다.
홍차 말고 막걸리면 딱 좋을 텐데.
김치전도 하나 부치고.
이젠 습관이 된 비교질을 연신 하며 다시 찻잔을 들었다.
"요리 좀 할 줄 아나?"
"네?"
"...아니다."
밀가루와 계란은 있는데, 부침가루의 재료가 뭔지를 모른다.
현대에 있을 때 엄마는 늘 부침가루와 밀가루를 반반 섞어 김치전을 만들었다.
생각해보니 김치도 없다.
이 넓은 초원에 오징어가 있을 리는 더더욱 없고.
"...잘은 못 하지만 기본적인 건..."
"됐다니까."
"..."
기본적인 거 말고 김치전 먹고 싶다고.
침대에 앉아 불안한 눈빛으로 내 눈치를 살피던 샬롯이 이내 입을 다물었다.
윤기가 흐르던 은발이 부스스하다.
그런 날이 있다.
외면하던 상처가 다시 끄집어 올라오는 날.
비가 오는 감성적인 분위기 때문일까. 공포가 가득한 그녀의 눈빛 때문일까.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유독 그녀의 시선이 아프게 느껴졌다.
"내가 밉나?"
"..."
"묻잖아."
"...아니요."
"거짓말."
미워 죽을 것 같잖아.
씻을 때마다 수치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지 못하잖아.
매일 머리카락을 빗겨주던 하녀도 빼앗겨 부스스해졌잖아.
너를 자유롭게 풀어주면 나도 내가 살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너를 자유롭게 풀어주면 신도 나를 풀어줄까.
내가 집에 가기 위해 너를 가뒀다.
내 목에 걸린 목줄을 풀기 위해 너에게도 목줄을 채웠다.
두려운 눈으로 시선을 마주치던 그녀가 이내 고개를 푹 숙인다. 붉은 눈동자가 밑으로 사라지는 그 모습이 가슴을 한 번 더 후벼팠다.
결국 짜증이 치밀었다.
대륙 통일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왜 하필 난가.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뭐 하나 특별하지도 못한 내가 강제로 끌려와 목줄을 차야 했는가.
왜 나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혀야 하는가.
왜 나는 저 여자에게 공포 어린 시선을 받아야 하는가.
이빨이 까득 갈렸다.
그 소리에 샬롯의 어깨가 한 번 더 움찔 떤다.
"너도 잘 알겠지만, 이제 네가 살던 과거는 없다. 영지도, 저택도, 신분도."
"..."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주는 것뿐이다."
내 목줄은 풀 수 없으니 네 목줄이라도 풀어주마.
어차피 정보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
홧김에 나온 말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나왔다.
"골라라. 평민. 하녀."
천천히 올라오는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동그랗다.
뜻밖의 말에 놀랐는지, 아니면 분노로 일그러진 내 표정을 보고 놀랐는지.
"평민을 고른다면 적당히 살 집은 하나 마련해주마. 허나 살길은 알아서 모색해라."
"..."
"하녀를 고른다면 이 저택에서 계속 살 수 있게 해주마. 그러나 네가 받을 시선은 너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동그랗던 그녀의 두 눈이 더 커졌다. 진심인지 농담인지, 다시 한번 자신을 절망에 빠트릴 생각인지 알 수 없다는 듯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둘 다 싫다면 죽어라."
목줄을 풀어주는 것도 싫다면 죽어라.
목줄을 풀고 싶어도 못 푸는 사람에게 그건 기만이니까.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만 방안을 맴돌았다. 아직 저녁 먹을 시간도 안 됐는데 벌써 창밖이 어두컴컴하다.
내 표정에 드리운 분노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는지, 그녀는 더 이상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유를 모르겠어요. 무슨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네가 알 바는 아니지 않나?"
"..."
비가 와서 그렇다.
하필이면 한가할 때 비가 와서 그렇다.
하필이면 김치전이 생각나서 그렇다.
또 하필이면 부모님 생각이 나서 그렇다.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선택이다.
회계사로 밥 먹고 살려면 절대 금기시되는 행동이다.
이곳에 와 매일같이 칼만 보고 살아서 그럴까.
아니면 참고 참은 분노가 폭발해서 그럴까.
평소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함께 있던 샬롯 역시 이런 내 모습이 처음인 듯 싸늘한 내 말투에도 여전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신도 사람이었군요."
"그럼 괴물인 줄 알았나?"
"...지금까지 제게 한 행동이 사람다운 행동이었나요? 하녀를 감금시키고, 씻는 모습조차 감시하는 당신이?"
"널 건들지 않은 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신사답게 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당연한..."
쯧.
그녀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이래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어딘가를 향하던 분노가 자신에게 돌아갔다는 것을 느꼈는지 그녀가 말을 멈췄다.
"당연? 내 언질이 없었으면 진작 병사들한테 능욕당했을 거란 생각은 안 했나 보지?"
"...뭐, 뭐라고요?"
"내가 너를 때렸나? 지하 고문실에서 털끝 하나 건든 적 있나? 네가 덮고 있던 담요는 땅에서 솟았나?"
"..."
"아니면 가족을 데려와 협박이라도 했나? 오히려 네 방으로 데려와 잘 먹이고 잘 재우지 않았나? 너는 지금 이 곳이 죄수를 감금하는 고문실로 보이나?"
다 쓸데없다.
지랄 맞은 세상.
"네가 남들보다 좋은 대접을 받고 있다는 걸 깨달아라. 남자였으면 이미 손가락 절반은 바닥에 뒹굴고 있었어."
"..."
더 이상 대화를 나누기 싫었다.
그녀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준 것도, 충동적인 언행을 내뱉은 것도 모두 마음에 안 들었다.
쯧.
한 번 더 혀를 차고 몸을 일으켰다.
시작도 못 한 심문이 끝났다.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방을 나서곤 문을 쾅 닫았다.
"참모님?"
방을 나서자 마자 문을 지키던 두 병사가 나를 바라봤다.
벌써 나올 줄은 몰랐는지 두 병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성에서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하녀를 하나 불러 목욕시중을 들게 해라. 혹여나 무슨 짓을 꾸미면 남편의 목이 달아날 거라 단단히 주의시키고."
"알겠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분노로 일그러진 내 표정을 보곤 병사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잠이나 자자.
오늘 같은 날은 일도 손에 안 잡힐 것이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복도를 걸었다.
"머릿결이 다 상하셨어요... 어떡해."
자신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으며 안타까워하는 하녀의 목소리가 귓가로 들렸다.
겨우 며칠 혼자 씻었다고 머리를 만지는 손길이 퍽 어색하다.
아니, 그 남자가 지켜봤으니 혼자는 아니었나.
"혹시 무슨 일은 없었죠? 저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젊은 하녀가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에 향유를 바르며 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정말이에요?"
"응."
걱정이 가득 담긴 하녀의 말이 오히려 비수가 돼서 다가온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맞은 적도, 자신을 건드린 적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말대로 죄인 치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지금도 자신의 가족들은 감옥에 갇혀있다.
하녀를 불러 씻는 전쟁 포로라니. 그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을 부탁했었음을 다시 깨달았다.
오히려 자신 때문에 감옥에 갇힌 하녀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미안해. 나 때문에 갇힌 하녀들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페티랑 셀리아... 감옥에 갇혔잖아. 나 때문에."
"아~ 괜찮아요. 하루 만에 풀렸는걸요. 이 방에 접근하지 말라는 말만 들었대요."
"..."
왜 그랬을까.
왜 그 남자는 자신에게 잘해주는 걸까.
다른 사람이 자신을 심문해도 이렇게 대했을까.
아니.
절대 아니다.
아마... 그의 말대로 벌써 능욕을 당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쥐도 새도 모르게 차가운 고문실 바닥에서 이미 죽지 않았을까.
그는 최선을 다해 자신을 괴롭히며, 최선을 다해 자신을 걱정했다.
"다행이다..."
하녀들이 곧바로 풀려나서 다행이라는 건지, 그 남자가 자신을 심문하게 된 것이 다행인지는 샬롯 스스로도 잘 모르겠지만,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이었기에 내뱉고 싶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에 대한 감정이 점점 변하고 있음을 느꼈다.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 그러나 그 안에 보이는 괴로움, 슬픔.
방을 나서기 전 그가 보였던 표정은 샬롯을 충격에 빠트리기 충분했다.
그도 사람이구나.
한없이 잔인한 괴물인 줄 알았는데 사람이었구나.
그제야 그가 자신을 챙겨줬던 모든 부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로소 공포와 분노가 걷히자 보인 것이다.
"...주민들은 잘 지내니."
"으음... 네. 식량을 대대적으로 배급해서..."
"...그렇구나."
역시 자신에게 말하기 힘든 내용이었을까.
머뭇거리며 이내 말을 멈춘 하녀였지만, 샬롯은 그것만으로 모든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정말 끝이다.
뷔른 백작 가문은 끝났다.
다양한 생각이 동시에 떠오르고 사라진다.
영지를 빼앗겼다는 분노.
영지의 주인이 바뀌었음에도 불만이 없는 백성들에 대한 서운함.
무능력했던 황자에 대한 분노.
황자의 눈치를 보던 아버님에 대한 실망.
'골라라. 평민, 하녀.'
그는 알고 있던 것이다.
그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이미 평범하게 살기는 글렀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던 것이다.
그냥 죽이면 편할 걸 그 와중에도 자신에게 선택지를 내밀어준 것이다.
그래서 그가 좋아졌는가 누군가 물어본다면, 절대 아니었다.
아무리 자신에게 잘 대해준다고 하더라도 침략자이자 가문을 무너뜨린 원수다. 예전처럼 찢어 죽일 만큼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그의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받은 은혜는 갚아야 하지 않을까.
목욕통 속에 들어간 샬롯의 손이 꽉 쥐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