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14화 (114/191)

〈 114화 〉 잘됐네요

* * *

5월에 도달하며 날씨가 완전히 따스해졌다.

드넓은 초원의 키가 점점 커지더니 이내 생명이 숨 쉬는 평원이 펼쳐졌다.

형형색색의 나비가 초원을 뛰놀고 여기저기 핀 들꽃은 초록 종이 위에 알록달록 색을 입혔다.

온 들판에 꽃이 활짝 폈을 때, 뷔른 성으로 편지가 한 통 날아왔다.

바다를 건너 마차를 타고, 겨울 호수 까지 통과한 흔적이 여실히 드러나는 헤진 편지였다.

오랜만에 모든 지휘관이 호출을 받고 대전으로 하나둘 모였다.

편지가 왔다는 소식에 한껏 늘어졌던 성내의 분위기가 다시 조여지기 시작했다.

"헤르트에서 날아온 편지입니다."

개봉된 편지를 든 2왕자의 표정이 꽤 밝았다.

2왕자의 표정을 본 지휘관들 역시 굳은 표정을 풀고 편안한 마음으로 말을 기다렸다.

"제국을 밀어내고 오히려 영토를 넘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오호라!"

그 말과 함께 대전의 분위기가 한층 밝아졌다.

혹여나 고전하고 있으면 어떡해야 하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연합군이 선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뷔른 성을 차지한 소식도 곧 전해질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사기를 높이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한 백작의 말에 모든 지휘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연합은 못 하지만, 제국의 힘을 양분하는 데에는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었다.

"또 다른 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잠시 대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던 2왕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에르딘에서 성녀가 함께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성녀... 말씀입니까?"

성녀?

갑자기 웬 성녀?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닌지 대전 내의 모든 사람이 의아함을 나타냈다.

"헤르트에서 직접 보낸 편지니, 거짓말은 아니겠지만... 병사들을 치유하고 사기를 높이는 기적을 연일 행하는 중이랍니다."

"...!"

그제야 나는 2왕자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능력이다.

새로운 능력.

에르딘의 새로운 능력이 나타난 것이다.

드디어 다른 나라의 능력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흥분으로 심장이 조금 빨리 뛰었다.

10년을 넘게 끌던 내전을 한 번에 정리했다는 소식과 함께 동맹 의사를 밝혔던 에르딘이었다.

드디어 그 능력의 정체를 알게 됐다.

병사들을 치유하고, 사기를 북돋는 다라...

까다로운 능력이다.

전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존재감이 커질 능력이었다.

병사들은 성녀의 존재 자체만으로 사기가 하늘을 찌를 것이다.

"헤르트와 에르딘이 제국을 밀어낼 정도면 그 성녀의 능력이 강력한가 봅니다."

"성녀라니! 우리 왕국 동맹의 큰 복입니다!"

나중엔 그들과 싸워야 하는 줄도 모르고...

대전에 모인 사람들의 뒤통수를 한 대씩 때리고 싶은 충동이 튀어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지금 당장은 든든한 아군이지만, 나중엔 강력한 적이 될 것이다.

성녀의 힘을 직접 견식하러 가고 싶었지만, 위험도가 너무 컸다.

들어오는 정보를 바탕으로 상대법을 찾아야 한다.

그전에...

'일단 다나크 먼저 죽이고.'

다나크를 집어삼켜야 에르딘과 국경이 만나든 말든 한다.

이번 전쟁으로 다나크를 멸망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니 어차피 에르딘과의 전쟁은 먼 훗날이 되리라.

자연스레 사색의 방향이 제국으로 넘어갔다.

전쟁이 점점 불리해지고 있음에도 다나크 제국은 이렇다 할 능력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눈치를 못 챈 걸까.

아니면 아직 여유가 있다는 걸까.

뭐가 됐든, 한시라도 빨리 제국의 능력을 알아내고 싶었다.

오늘 아는 것과 한 달 후에 아는 것은 내 전술 방향이 천지 차이가 날 것이기 때문에.

그때,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스승님이 입을 열었다.

"혹시 알만 왕국의 소식은 없었습니까?"

"으음... 있긴 합니다만..."

환히 웃던 2왕자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잠시 주저하던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왕국 내 분열이 심각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국경 수비 그 이상의 무언갈 기대하기 어렵다고 쓰여 있습니다."

모두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쳐갔다.

사방에서 제국을 압박하는 이때, 알만 왕국이 국경을 넘어 진군을 시작하면 다나크 제국은 세 방향에서 진군하는 왕국 동맹을 막아야 한다.

유리한 전황에 쐐기를 박을 수 있는 치명타가 될 터였다.

"알만 왕국이 참여하지 않은 것은 아쉬우나 동쪽에서 좋은 소식이 날아왔으니 저희도 이때를 노려 더욱 전진해야 할 듯합니다."

이어지는 스승님의 말에 대전에 있던 지휘관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할 때 몰아쳐야 한다.

뷔른 성 역시 어느 정도 안정됐으니 후방이 불안할 일은 없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음 진격을 위해 다시 정보를 모아야겠습니다."

스승님의 말을 받은 2왕자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나를 바라봤다.

"카인 참모."

"예."

"백작 영애는 어떤가? 듣자 하니 고문실에서 방으로 데려갔다고 하던데..."

거기까지 이야기한 2왕자가 모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머리 속에 그것밖에 없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희번덕거리기 시작해 서둘러 입을 열었다.

"몸이 지나치게 약해 고문실의 추위도 버티지 못했습니다. 병사들로 하여금 문 앞을 지키도록 했으니 도망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즉, 문 앞에 병사들이 있어 헛짓은 안 했다는 말을 돌려 말한 것이다.

이런 오해를 받아 가면서 까지 심문을 해야 하나 싶었지만, 생각보다 얻은 정보가 많았기에 꾹 참았다.

"...그렇군. 영애에게 얻은 정보는 있는가?"

"몸이 약해 고문이 불가능하니 입을 여는 게 쉽지 않습니다. 곧 입을 열 듯하니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면 바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이미 들을 건 다 들었다. 중요한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대외 활동도 하지 않은 그녀가 중요한 정보를 알 리가 있는가.

그러나 아직 쓸모가 많았다.

무엇보다, 진격을 시작하고 혹여나 모를 뷔른 성의 소요사태를 잠재울 중요한 열쇠였다.

"어쩔 수 없군. 조금만 더 노력해주게."

"죄송합니다."

의심이나 안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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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이 분은...?"

"다나크 제국 유라페스 공작가의 새로운 가주님이시다."

"예? 이 젊은 분이..."

"그리고 우리 제국파를 후원해주시는 분이기도 하지. 인사드리거라."

이렇게 젊은 여자가 전 대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라페스 공작가의 새로운 가주라고?

타오를 듯이 붉은 머리카락이 가슴 밑까지 흘러내렸다.

짙은 갈색의 눈동자가 여유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훑어보는 게 느껴졌다.

"유라페스 공자 가문의 새로운 가주. 유라페스 헤일리에요."

"아, 예. 안녕하십니까. 엑센 후작 가문의 엑센 미하일입..."

고개를 숙여 인사하던 미하일은 불현듯 파고드는 불안감에 몸이 떨렸다.

이게 무슨 느낌이지?

등줄기를 가로지르는 소름 끼치는 감각이다.

"...입니다."

그것과 별개로 간신히 인사를 끝냈다.

상대는 제국의 공작이다.

혹여나 무례를 저지르면 열렬한 제국파의 수장이신 아버지가 크게 화를 낼 것이다.

"아들이 최근 몸이 안 좋아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너무 괘념치 않으셨으면 합니다."

"괜찮아요."

진땀을 뻘뻘 흘리는 엑센 후작을 향해 젊은 여인이 미소를 지었다.

일견 요염하기까지 한 그 모습에 미하일은 다시 한번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혹시 저희 영지는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뭐? 아니 이 녀석이! 이 아비와 할 말이 있어 오셨겠지! 그걸 네가 왜 물어보느냐!"

질문은 공작에게 했는데 대답은 아버지한테 나왔다. 사실, 미하일 역시 이유 없이 그녀를 경계하는 스스로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인사에 이어 또 다시 이어진 무례한 상황이었음에도 붉은 머리의 여인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미하일을 똑바로 바라보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흐음... 기억 안 나시나요? 전 이곳에 자주 왔었는걸요. 기억나시죠?"

"..."

맞다.

그랬었다.

잠깐 까먹고 있었다.

분명 이 여자는 우리 영지에... 자주... 왔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기억을 잠시"

"흐음... 다행이네요."

"네?"

뭐가 다행이라는 걸까.

자신이 되물었음에도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붉게 물든 두 눈이 매혹적이다.

...원래 눈이 붉은색이었나.

"혹시 미하일님의 능력이 뭔가요?"

"능력... 말씀이십니까."

"예. 능력이요. 저는 믿을 만 하니 말해주는 게 당연하잖아요."

"...예. 당연...합니다. 믿으니까... 확실하진 않지만, 예지몽을 자주 꿉니다."

"...어머. 잘됐네요."

"..."

뭐가 잘됐다는 걸까. 생각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머리 속에 안개가 낀 듯 답답했다.

"그럼, 미하일님. 제국으로 돌아갈 준비는 되셨나요?"

"...제국으로 말입니까."

"네. 분명 저랑 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었잖아요. ...저번에."

그랬었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니, 최근 몸이 안 좋더니 기억력도 감퇴한 것 같다.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괜찮아요. 아직 여유는 있으니까요."

헤일리는 이번에도 여유롭게 대답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미하일님은 카인이라는 사람을 아나요?"

"카인... 에어로크 왕국 사람이라면 한 명 알고 있습니다."

"...어머."

시종일관 여유롭던 표정을 짓던 그녀가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이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잘됐네요."

그녀의 붉은 눈이 더욱 붉어졌다.

미하일은 젊은 공작의 눈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잘 됐다고 했다.

뭐가 잘 된 걸까.

잘 모르겠다.

그래도 그녀가 잘됐다고 했으니 잘 된 거겠지.

머리가 조금 지끈거렸다.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걸까.

한참을 웃던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눈처럼 붉은 입술이 매혹적이다.

"그 카인이라는 남자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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