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13화 (113/191)

〈 113화 〉 목욕시중

* * *

차가운 한기가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작은 촛불 하나 없는 공간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알 수도 없었다.

아침마다 넓은 창 안으로 들어오는 눈 부신 햇살을 맞이하며 일어나는 삶은 사라졌다.

작은 쪽문에 난 창살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복도의 등잔이 유일한 빛이었다.

은은하게 비치는 방안은 그 존재만으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혈흔이 묻은 도끼와 작은 칼들, 정체를 알 수 없는 바늘.

붉게 물든 밧줄.

정체를 알 수 없는 의자.

벽에 가득한 핏자국.

자신이 살던 성 지하에 이런 장소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어둡고, 습하고, 춥고, 퀴퀴하다.

무엇보다, 속을 찌르는 배고픔이 그녀를 괴롭혔다.

생전 처음 느끼는 속 쓰림과 목마름에 정신이 시시각각 갉혔다.

몸을 더 웅크렸다.

목이 탈 듯이 말랐다.

자연스레 검은 머리, 검은 눈의 남자가 떠올랐다.

증오스러운 남자.

평화롭던 영지를 쳐들어온 침략자.

적 수뇌부의 총애를 받던 책사.

이곳에 갇혀 처음 그와 대면했을 때, 그녀는 그를 죽이고 싶었다.

우리 부모님을 죽인 자.

내 남동생을 죽인 자.

두 손으로 그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부모님의 복수를 하고 싶었다. 두 눈을 마주치면 정말 그에게 달려들 것만 같아, 고개를 푹 숙였다.

"정보니 뭐니... 즉흥적으로 나온 의견인 거 들었지?"

"죽고 싶으면 그냥 지금 말해. 바로 죽여줄게."

조금의 호의도 없는 목소리.

귀찮음과 짜증이 섞인 목소리.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됐다는 노골적인 감정.

지금까지 살며 아무도 자신에게 그런 말도, 감정도 보인 적 없었다.

생전 처음 느낀 모멸감에 분노가 온몸을 지배했다.

쳐들어온 것도 네놈들이고, 우리 부모님을 죽인 것도 너희들이야.

피해자인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지?

차라리 죽고 싶었다.

이렇게 사느니 그의 말대로 정말 죽는 게 났다.

"그냥 지금 죽여!"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소리쳤다.

그리고.

그와 처음으로 눈을 마주친 그녀는 심장이 탁 떨어지는 공포를 느껴야 했다.

한없이 싸늘한 눈.

조금의 호의도 없는 표정.

홧김에 던진 말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정말 저자는 고민도 없이 자신의 심장을 찌를 수 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주변으로 보이는 방 안의 풍경.

그녀는 코를 찌르던 불쾌한 냄새의 정체를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겁이 덜컥 올라왔다.

정말 죽을 용기는 없었다.

매일 정원의 꽃을 보던 눈이 난생처음 핏자국을 본 순간, 그녀는 겁에 잡아먹혔다.

"왜! 죽이라니까 겁나! 그냥 죽이라고!"

그럼에도 목소리는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겁에 질린 사실을 숨기려는 듯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남자는 끝까지 무심한 얼굴이었다.

마치 자신의 속내를 모두 파악하고 있다는 듯 지하를 울리는 비명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저 남자를 죽이고 싶어.

죽이지 못하면 죽고 싶어.

하지만... 너무 무서워.

내가 왜 이런 짓을 당해야 하지.

평생을 곱게 자란 그녀는 분노와 공포와 자존심이 한 번에 뒤죽박죽 섞이는 기분을 처음으로 느껴야 했다.

저 남자를 찢어 죽이고 싶었다.

정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입을 열지 않으리라.

하지만 죽는 건 무서웠다.

낯선 남자와 단둘이 방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숨이 턱턱 막혀왔다.

그러나 겉으로 티를 낼 수는 없다.

난 명예로운 백작 영애야.

무너진 자존심을 세우려는 듯 더 강하게 그를 노려봤다.

하나도 겁 안나.

절대 말 안 해.

고슴도치가 몸을 웅크리고 가시를 세우듯 더 크게 비명을 질렀다.

...제발 저자가 가시에 겁을 먹고 포기하기를 바라며.

그러나 겨우 하루.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가 온몸의 가시를 뽑히는 데 걸린 시간은 하루였다.

안전한 땅굴에만 살던 고슴도치의 가시가 단단할 리가 없었다.

겨우 하루 만에 그녀는 겁에 질린 속내를 모두 들켜버렸다.

"이제 좀 말할 준비가 됐어?"

샬롯은 눈앞의 남자가 미소 짓는 모습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잔인할 정도로 환하게 웃는 그를 보며 마음 속에 있던 마지막 희망의 불씨가 꺼지기 시작했다.

****

"좋은 데서 살았네?"

"..."

"대답해야지."

"...네."

방안 곳곳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졌다.

정말 외부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는지 반쯤 그려진 그림이 걸린 캔버스, 작은 화분, 이 세계에서 보기 힘든 인형까지 있었다.

누가 봐도 방 주인은 여자임이 명백했지만, 나는 마치 내 방처럼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방 한 쪽에 있는 서랍장도 열어보고,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나왔다.

그때마다 문 앞에 선 샬롯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그뿐이었다.

그녀가 내게 속내를 들킨 순간, 나는 그녀를 데리고 방으로 데려왔다. 이미 저항이 꺾인 그녀를 굳이 고문실에 가둘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춥고 비위생적인 고문실에 계속 두기엔 그녀의 몸이 너무 약했다.

"속옷이 너무 유아틱한 거 아니야?"

"..."

서랍장 한켠에서 나온 속옷 중 하나를 덜렁덜렁 흔들며 그녀를 향해 웃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녀에게 무례하게 굴었다.

그녀의 삶을 파괴한 주제에 이제 와서 착하고 예의 있게 그녀를 대하는 건 위선이자 가식이다.

차라리 이런 모습으로 반항할 생각은 꿈도 못 꾸게 하는 게 서로에게 좋았다.

"...제게 듣고 싶은 정보가 겨우 속옷 취향 같은 거였나요?"

"응."

"..."

"그리고 도발하지 마. 지금 네가 입은 속옷까지 보여주기 싫으면."

"..."

"대답."

"...네."

몇 남지 않은 가시가 힘없이 뽑혔다.

겨우 싸늘한 눈초리 하나에 겁을 집어먹은 그녀가 눈을 내리깔았다.

생각보다 마음이 편안하다.

처음부터 그녀를 적으로 가정하고 상대해서 그럴까. 연약한 여자를 괴롭힌다는 불편함이 의외로 없었다.

어차피 난 침략자고 저 여자는 피해자다.

그녀의 가족이 지하에 갇혀있다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사이가 좋아질 조금의 껀덕지도 없는 관계다.

"일단 씻어라. 냄새 나니까."

"...알겠어요."

누군가에게 냄새난다는 말도 처음 들어볼 것이다.

그것도 낯선 남자에게.

수치스러운 와중에도 반가운 말이었는지 그녀가 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는 몇 걸음을 채 걷기도 전에 다시 제자리에 멈추곤 나를 바라봤다.

"저... 혹시."

"왜."

"목욕시중을 들 하녀를... 불러줄 수 있나요?"

자신이 생각해도 얼빠진 소리라는 건 알았는지 그녀가 머뭇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뭐, 그 정도야. 원래 시중들던 하녀 이름이 뭔데?"

"저, 정말 불러 주실 건가요?"

"싫어?"

"아, 아니에요. 패티, 셀리아... 그 둘이 원래 제 목욕 시중을 들던 하녀들이었어요."

페티, 셀리아.

나는 두 이름을 중얼거리며 방문을 열고 고개만 내밀었다.

그리곤 문 앞을 지키던 병사 둘을 불러 방 안으론 목소리가 안 들리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할 말을 모두 끝내고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가만히 서 있다.

"또 평소 친하던 하녀들 이야기 해 봐."

"저, 정말요?"

"한 김에 끝내게. 빨리."

"아... 감사해요."

제인, 레아, 헤이즈.

생각보다 꽤 많다.

이거, 차질이 좀 생길 수도 있겠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되뇌며 다시 고개를 방 밖으로 내밀었다. 한 명은 시킨 일을 하러 갔는지 안 보이길래 남은 한 명을 불렀다.

"더 있습니까?"

"지금 불러주는 이름들도 같이 전달해."

"알겠습니다."

명령을 모두 내리고 방으로 들어오자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하늘거리는 은발 머리카락이 치렁거렸다.

"...감사해요."

"뭐, 고마울 건 없고."

"..."

"이제 씻으러 들어가."

"네? 아... 네."

아직 하녀도 도착하지 않았는데 벌써 들어가라고 한 것에 당황했는지 그녀가 의아한 얼굴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 하녀가 오면 바로 욕실로 들어오라고... 해주세요."

"안 오는데?"

"그게 무슨..."

"안 온다고. 아무도."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아무래도 내가 하녀들을 부르러 간다고 오해한 모양인데.

"...하녀들을 부르러 나갔다 오신게 아닌가요?"

"무슨 소리야. 걔네들도 다 잡아 넣으라고 시킨 건데."

"...네?"

"네가 욕실에서 무슨 수작을 부릴 줄 알고 불러."

내가 미친 것도 아니고 하녀들을 왜 불러.

혹여나 욕실에서 자살을 할 수도 있고, 하녀에게 무언갈 시킬 수도 있다.

쓸데없는 귀찮음은 사양이었다.

그녀와 접촉한 모든 하녀들을 일일이 감시하느니 모조리 가두는 게 낫지.

평소 친하게 지냈다면 그들 역시 샬롯을 움직일 좋은 패가 될 것이다.

충격으로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환하게 미소 짓자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더 강하게 떨렸다.

마지막 노림수마저 간파 당한 그녀의 눈은 절망에 물들어있었다.

"또 친했던 하녀들 있어?"

"...차라리 죽여 주세요. 그냥 죽는 게..."

"무슨 짓을 꾸미려고 하긴 했었나 보지?"

"..."

눈앞의 여자가 큰 정보를 가지고 있을 확률?

거의 없지.

다만, 정보의 중요도와 상관없이 그녀가 내뱉을 말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 힘든 건 사실이기에, 기를 꺾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될 수 있으면 철저하게, 감히 거짓말을 할 수 없도록 절망으로 끌어내리는 중이었다.

약자를 괴롭힌다는 자괴감?

그 역시 전혀 없다.

그녀의 입에서 나올 잘못된 정보가 우리 군을 얼마나 희생시킬지 아무도 모른다.

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이까짓 야비한 짓은 얼마나 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녀의 가족이나 하녀들을 건든 적도 없고 말이다.

도의적으로 그녀에게 미안하지 않냐고 묻는다면, 미안했다.

이 전쟁의 원인이 그녀에게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러나 지금까지 백작 영애로 행복한 삶을 살았다면, 그 권력에 대한 책임 역시 짊어져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게 그녀의 죄다.

절망에 빠진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구석에 몰린 생쥐처럼 몸을 떠는 게 손끝으로 느껴진다.

"찝찝하지 않아? 얼른 씻어."

"..."

"나도 욕실로 따라 들어갈 건 알지? 혹시나 네가 자살하면 큰일이잖아. 몸은 안 건들 테니 걱정 마."

공포로 덜덜 떠는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신사적인 미소를 지었다.

맘 같아선 그녀를 능욕하고 싶지만, 그래선 안된다.

정말 망가지면 쓸모가 없어지니까.

조심스럽게.

깨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다뤄야 한다.

그녀를 계속해서 구석으로 몰아넣고 절망에 빠트린다.

그런 그녀에게 감옥에 갇힌 가족을 미끼로 다시 희망을 불어 넣는다.

정신이 피폐하면 피폐해질수록, 정보를 얻기 쉬워질 것이다.

"벗어."

그리고 지금은 그녀를 몰아넣을 차례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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