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12화 (112/191)

〈 112화 〉 기싸움

* * *

"마셔라."

"..."

습관처럼 홍차를 들이밀었다.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니 내 전부를 준 것이나 다름없지만 반응은 없었다.

"뭐 탔을 거 같아서?"

"..."

그럼 먹지 마라.

곧바로 그녀 앞에 있는 차를 빼앗았다.

생전 처음 옥에 갇혀 얇은 입술이 터져있었지만, 못 본 체 했다.

"그렇게 긴장하면 안 하던 짓도 하고 싶게 만들어."

"..."

그럼에도 반응이 없다.

고개를 얼마나 푹 숙였는지 은발과 정수리만 보인다.

협박도 안돼, 회유도 안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겨우 이 정도로 협박이니 회유니 하는 게 웃기긴 했다만, 그녀만큼이나 나 역시 의욕이 없었다.

말할 생각이 없는 여자와 물어볼 생각이 없는 남자.

환상의 조합이다.

"정보니 뭐니... 즉흥적으로 나온 의견인 거 너도 들었지?"

"..."

"죽고 싶으면 그냥 지금 말해. 바로 죽여줄게."

진심이었다.

말발로 회유하는 것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한테나 하는 거지 이 여자한테는 아무 소용 없다.

자신의 가족을 가두고 영지를 빼앗은 적에게 주절주절 정보를 뱉는다?

나 같아도 말 안 하고 만다.

원하는 게 있어야 대화가 성립된다. 모든 것은 기브 앤 테이크다.

정보를 대가로 복수를 바란다면?

그건 안된다.

정보를 대가로 안전을 바란다면?

그건 된다.

"..."

그러나 눈앞의 여자는 기브도, 테이크도 말하지 않았다.

벽마다 걸려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날 붙이는 보고만 있어도 소름이 돋는다.

보통의 여자라면 무서워서라도 입을 열어볼 만 한데, 내성 지하 고문실에 끌려온 이후에도 그녀는 말이 없었다.

"쯧."

결국 혀를 찼다.

방에서 늘어지게 쉬려했더니 이게 뭔 생고생인가.

그냥 돌아가서 낮잠이나 자다 밤에 올까.

"이따 밤에 다시 오마. 그땐 칼을 가져오지. 그때도 말이 없다면..."

여자를 벤 적은 없는데.

아니, 사람을 벤 경험 자체가 별로 없다.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딱딱한 나무의자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고문실을 울리는데, 그 소리가 꽤나 오싹했다.

그녀가 입을 연건 그때였다.

"...그냥 지금 죽여."

"뭐?"

"그냥 지금 죽이라고!!!"

그제야 그녀의 얼굴을 처음 볼 수 있었다.

은발 사이로 보이는 적안.

시아라와 똑같은 붉은 눈이었다.

"왜! 죽이라니까 겁나! 그냥 죽이라고!"

이 여자. 대전에선 눈물만 죽죽 쏟길래 심약한 여인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보다.

그렇게 목청이 좋으면 물어볼 때나 입을 열지.

내가 아쉬운 건 하나도 없다.

"싫어."

"...뭐?"

"밤에 보자."

"...어? 야! 야!!!"

설마 거절을 할 줄은 몰랐는지 잠시 멍한 얼굴을 지은 그녀가 곧바로 나를 불렀지만, 나는 그대로 고문실을 벗어났다.

바로 그때, 고문실 안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문 사이로 흘러나왔다.

"꺄아아악!!!"

...미친년.

드디어 입을 열었기에 이따 저녁엔 대화 좀 할 수 있을까 기대했더니. 제대로 미친년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를 걸었다.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는 통에 귀가 떨어질 것 같다.

"무슨 일이십니까?"

지하실 전체가 떠나갈 듯이 비명을 질러대는 통에 결국 감옥을 지키던 병사 둘이 허겁지겁 뛰어왔다.

...그런데 이놈들 눈빛 좀 보게?

"엎드려."

"예?"

"엎드리라고."

무슨 일이 생겼나 뛰어온 두 병사가 영문도 모른 채 바닥에 엎드렸다.

"지금 빈 방 많지? 지금 철문을 열어줄 건데, 니들이 생각하는 일이 안 일어났으면 그 방 너네가 차지할 거야."

왕자가 오해를 한 것도 짜증 났는데 이젠 하다 하다 병사들까지 눈빛이 번들거린다.

재워놓고 겁탈이라도 한 줄 아나?

진짜 했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죄, 죄송합니다."

"왜. 우리도 좀 즐기자는 눈빛이던데."

"..."

"일어나."

현대나 이곳이나 엎드리는 속도보다 일어나는 속도가 빠른 건 불변의 진리인가?

"이따 밤에 올 건데, 저 여자 건드린 흔적 있으면 경계조 싹 다 황자 따라갈 거야."

"..."

"인수인계 똑바로 해라."

"알겠습니다."

여전히 지하실에 울려 퍼지는 비명을 들으며 계단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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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꽃이 초원을 뒤덮은 4월 중순이지만, 밤은 여전히 쌀쌀했다.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지하는 유독 더 한기가 돌았다.

"..."

"..."

얇은 드레스가 유난히 더 추워 보인다.

파랗게 질린 입술이 덜덜 떨리면서도 그녀는 눈앞에 놓인 홍차를 들지 않았다.

따뜻한 김을 내뿜던 홍차가 점점 온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돌겠네 진짜.

대화가 좀 시작되나 했더니 도루묵이다.

"내일 아침에 오마."

이쯤 되면 오기가 생긴다.

적어도 이 여자 이름은 직접 듣고 목을 자르든 해야겠다.

"...그냥 죽여."

"싫어."

"..."

아침과 똑같은 장면이다.

의자 끌리는 소리가 고문실에 울렸다.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언제까지 이 짓을 반복해야 하나 속으로 한 숨을 쉬었지만,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고문실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잡았을 때, 등 뒤에서 가녀린 목소리가 흘러왔다.

"...왜 안 죽이는 거야."

"내가 물어본 질문은 그게 아닐 텐데."

"..."

"내일 아침에 보자."

끼익 거리는 문이 복도를 울린다.

이번엔 비명을 지를 생각이 없어 보인다.

다행이라 해야 하나.

천천히 지하 복도를 걷자 저 멀리 경계병 둘이 보인다.

시시덕거리며 잡담을 하던 둘은 내 모습이 보이자 입을 다물고 자세를 바로 했다.

소문 좀 퍼졌나 보네.

"별일 없나?"

"예!"

절도 있게 대답하는 두 경계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

이놈들 이거 긴장하는 거 봐라.

황자가 죽은 게 충격적이긴 했나 보지?

바짝 굳은 얼굴로 긴장한 둘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고문실을 자주 확인해라."

"예?"

"오늘 밤 자살할 확률이 높다. 죽으면... 알지?"

뜬금없는 소리였는지 잠깐 얼을 타던 두 병사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협박이 잘 통했는지 경계병들의 얼굴이 살짝 질렸다.

이게 낫다.

나이 때문에 무시를 당하느니 성격엔 안 맞지만 고압적인 태도로 병사들을 대하는 게 나았다.

"참, 담요 하나만 가져다줘라. 그걸로 목을 맬 수도 있으니 더 자주 확인하고."

"알겠습니다."

내 손으로 죽이면 죽였지 그녀가 혹여나 자살하거나 얼어 죽으면 뒷맛이 찝찝해진다.

게다가 괜히 헛소문이라도 돌면 지금까지 쌓은 이미지를 한번에 잃을 수도 있었다.

아까보다 더 굳은 경계병들을 뒤로 하고 지하를 벗어났다.

"...어휴."

지하를 완전히 벗어나자 그제야 한숨이 튀어나온다.

그냥 죽이는 게 속 편할까.

대외 활동을 하지도 않은 그녀가 뭐 얼마나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겠는가.

잠시 밤하늘을 보며 고민을 하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내일.

내일까지 대화를 시도해보고 입을 열지 않으면 그녀를 처리하리라.

사실, 대화의 기회는 이미 두 번이나 있었다.

그러나 내가 고문실을 나오기 전 그녀가 입을 열었음에도 대화를 시작하지 않는 이유.

'주도권.'

그녀도, 나도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없었다.

나는 그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그녀는 침략자인 나를 찢어 죽이고 싶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먼저 대화를 시도하려고 노력하면?

기세에서 지고 들어간다.

말을 열어도 그녀가 먼저 말을 열어야 하고, 대화를 시작해도 그녀가 먼저 시작해야 한다.

그녀가 정말 중요한 인질이라면 살살 달래가며 어떻게든 정보를 뽑아냈겠지만, 평생을 방에 틀어박혀 있던 여인이 뭘 알겠는가.

"에휴."

다시 답답한 한숨이 터졌다.

방으로 돌아가서 잠이나 자자.

하늘을 수놓는 별똥별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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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샬롯."

"나이."

"...열...아홉."

그녀는 오늘 아침에 떠오른 해가 그녀가 볼 마지막 해였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까.

담요를 뒤집어 쓴 채 드디어 입을 연 그녀를 바라보며 속으로 미소 지었다.

이 곳에서 비참하게 굶어 죽긴 싫은가 보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뜨거운 홍차도 두 손으로 꼭 쥐곤 마지못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오늘은 죽여달란 소리 안 하네?"

"...미친놈."

미친년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기분이 두 배로 나쁜데.

담요를 전해줬음에도 밤새 추웠는지 담요를 두른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죽을 용기도 없으면서 죽여달라고 한 사람이 누군데?"

"...뭐?"

"허세 떨지 말라고."

얌전했던 그녀의 눈이 다시 표독해졌다.

분노로 일그러진 그녀가 이를 빠드득 갈기 시작했다.

간신히 시작된 대화가 제대로 시작도 못한 채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개소리하지 마! 나한테 칼만 있었어도 고민 없이..."

"개소린 네가 하고 있네."

"...이익! 이 개 같은 새끼...!"

결국 화가 터진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뒤로 넘어간 의자가 넘어지며 우당탕 거리는 소리가 고문실에 울려 퍼진다.

그리곤 뺨을 때릴 생각인 듯 그녀의 손이 휙 들렸다. 그 바람에 몸을 덮던 담요가 펄럭였다.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손을 가볍게 붙잡고 말을 이었다.

"시끄러워. 찢어진 담요나 숨기고 말해."

"......뭐?"

손목을 붙잡힌 그녀가 안간힘을 쓰다 내 말에 담요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안색이 새파래졌다.

"자살도 못하는 년이 칼이 어쩌고 죽이는 게 어쩌고."

"..."

목을 맬 생각을 했었는지 길게 찢어진 담요 끝자락이 하늘거린다.

험한 일 한번 못 겪어본 년이 스스로 자살을 해?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붙잡힌 손이 파르르 떨렸다.

허세를 들킨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네가 정말 영지를 지킬 생각이었다면 뷔른 백작을 대신해 주민들을 통제했어야지. 성문이 스스로 열릴 동안 네가 한 게 뭐지?"

"..."

"이제 와서 분노한 척, 슬픈 척 허세 부리지 마라. 스스로 성문을 연 주민들은 우리 앞에 당당히 설 용기라도 냈다. 이 성을 무너뜨린 건 주민들이 아닌 너야."

대화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고문실이 조용해졌다.

미친년.

아니, 미친척 하는 겁쟁이년.

분노한 척, 슬픈 척 어떻게든 주도권을 잡고 살길을 모색하려 한 모양인데, 그러면 담요를 완전히 숨기던가 찢어버리던가 끝까지 철저했어야지.

겨우 추위 하나 못 이겨 반쯤 찢은 담요를 덮은 주제에 누굴 속이려 들어.

손목을 잡던 힘을 탁 풀자 그녀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알량하던 연기가 들통나니 그 민낯이 여실히 드러났다.

"아, 아니야...! 이건 자다가 실수로..."

"진짜 죽고 싶은가 보지."

"..."

더욱 낮게 깔린 내 목소리에 그녀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방금 전까지 잔뜩 분노한 얼굴로 뺨을 때리려던 여자는 어디 가고 겁에 질린 소녀만 남았다.

"...부모님을 죽이고 우리 영토까지 빼앗는 놈들에게 줄 정보는 없다. 그냥 죽여라."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여전히 손을 덜덜 떨면서 끝까지 강한 척이었다.

다 들통난 주제에 마지막 자존심은 챙기고 싶다는 건가?

진심으로 체념한 듯 붉은 눈동자가 담담해졌다.

눈동자는 시아라를 닮았는데 행동은 엘라 같네.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눈빛을 보자 못된 성격이 다시 치고 올라온다.

그 가면을 깨트리면 어떻게 될까.

끝까지 저항할까.

아니면 절망할까.

"네 가족이 죽었다고 누가 그랬지?"

"...뭐?"

"어제 네가 지른 비명을 바로 옆에서 똑똑히 듣고 있었을텐데."

담담하게 가라앉았던 붉은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개소리하지 마라."

"뭐, 안 믿으면 어쩔 수 없고."

"...역시 그럴 줄 알았다. 그런 새빨간 거짓말 따위에...... 뭐 하는 거지?"

"옆방 가려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나를 보며 다시 자신감을 회복하던 그녀가 갑작스러운 내 돌발행동에 당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옆방엔 왜 가지?"

"비명소리가 누군지 맞춰봐."

"...뭐?"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

"뷔른 백작? 백작부인? 네 남동생? 누구 목소리가 듣고 싶나."

내 말에 그녀의 입이 헤 벌어졌다.

충격을 받은 듯 서서히 회복하던 안색이 다시 창백해졌다.

"한 명만 골라 봐. 둘도 좋고."

"...머, 멈춰라."

"안 믿는 다며. 믿게 해줄게."

"아, 아니다. 미, 믿겠다."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그녀가 황급히 일어났다.

그러나 이미 문은 열렸고, 나는 복도로 나서고 있었다.

"제, 제발! 멈춰라!"

다급하게 다가온 그녀가 내 팔을 붙잡았다.

붉은 눈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모습이 바로 앞에서 보인다.

이 정도쯤이야 별 힘도 안 들이고 떨쳐낼 수 있었지만, 나는 못 이긴 척 제자리에 섰다.

"미, 믿을게... 믿을 테니... 가족만은..."

스스로 자살도 못 할 정도로 나약한 영애는 정말로 죽을 마음을 가지자 마자 가족들의 생존 소식을 알게 됐다.

이제 됐다.

장장 하루가 걸린 기싸움은 당연한 결과를 내며 끝났다.

붉은 눈동자에 가득 찬 물방울을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좀 말할 준비가 됐어?"

뷔른 성 포크 개수부터 네 속옷 색까지 모조리 말해야 할 거야.

가족을 살리고 싶다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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