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11화 (111/191)

〈 111화 〉 제가 해보겠습니다.

* * *

전장이 고요했다.

아니, 어느 누가 말을 꺼낼 수 있을까.

성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성 밖을 걸어 나오는 사람들도 긴장에 휩싸여 서로를 가만히 바라봤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본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앞으로 더 걸어가도 되는 건가?

길을 비켜줘야 하나?

처음엔 수십 명이었다.

활짝 열린 성문 사이로 보이는 주민들은 고작 수십이었다.

그러나,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선두를 따라 나오는 주민들의 행렬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못해도 수백이다.

그런데도 아직 성문을 나오는 행렬은 끝나지 않았다.

가장 선두에 있는 주민들의 공포를 아는지 모르는지 주민들은 평소에는 그렇게도 커 보이던 성문이 오늘따라 유난히 좁아 보였다.

모래시계의 목을 빠져나온 듯 빠르게 성문을 벗어난 주민들은 넓은 평원에 펼쳐진 수십만의 대군을 보고 아차 싶었는지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제야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지른 지 깨달았는지 덜컥 겁을 먹은 모습이다.

천천히 걸어 나온 주민들이 연신 주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지금이라도 공격 신호가 오면 어떡하지.

들고 있는 창칼이 당장이라도 몸을 벨 것 같았다.

갑주를 입은 병사들은 더욱 그랬다. 방금 전까지 들고 있던 창을 던져 버리고 주민을 따라 나온 병사들은 발걸음은 더욱더 느렸다.

이미 뷔른 백작의 동생에게 공포를 각인 당한 주민들은 자신들 스스로 성문을 열고 나왔음에도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공포에 젖은 행렬을 구원하는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검을 내려라. 길을 열어라."

그와 동시에 모든 병사의 창이 밑으로 떨어졌다. 검을 든 부관들이 납검을 했다.

이번에도 확성마법이다.

바로 어제 성안까지 들려오던 신기한 마법이었다.

어제와는 조금 다른 목소리였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주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병사들이 갈라진 사이로 걸음을 옮기는데 마치 범의 아가리 속으로 걸어가는 기분이다.

저들이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수십만의 검 사이로 들어가는 건 또 다른 긴장감을 안겨줬다.

"...정말 자네 말대로 성문이 열렸군."

그 장면을 바라보던 2왕자는 연신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끝없이 등줄기를 훑는 소름 돋는 감각에 조금만 힘을 빼면 몸이 부르르 떨릴 것 같았다.

그만 그럴까.

언덕 위에 있는 모든 지휘관들 역시 등골이 오싹함을 느끼고 있었다.

정말 문이 열렸다.

모두가 비효율적이라 반대하는 상황에서 꿋꿋하게 주장을 굽히지 않아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는가.

젊은 참모의 아집이라 생각했다.

사람은 늘 성공만 할 수는 없다. 그가 뛰어나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이번만은 실패하리라 생각했는데...

"제 의견을 들어주신 지휘관분들과 왕자님 덕입니다."

"..."

조용히 들려오는 대답에 그들은 다시 침묵했다.

차라리 으스대면 질투라도 하겠는 걸, 저렇게 겸손하게 자신을 빼니 앞으로 무슨 작전을 내든 반대는 할 수도 없게 됐다.

"그나저나...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까지 동조할 줄은 몰랐군."

"수십만이 넘는 대군을 종일 봐야 했으니 어쩌면 주민들보다 사기가 낮았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아군 포로가 화살에 맞아 죽는 걸 직접 봤으니 말입니다."

생전 처음 보는 기이한 행렬을 가만히 바라보던 2왕자의 나직한 혼잣말을 후작이 받았다.

조금씩, 조금씩 그들을 포위한 부대로 다가오는 그들은 마치 사람 손 위에 놓인 도토리를 먹으려는 다람쥐 같았다.

조금만 위협해도 멀리 도망갈 것 같은 분위기로 천천히 다가오는 걸 끈질기게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행렬의 선두가 천천히 포위망 사이로 들어왔다.

벌어진 길이 조금 더 넓어진다.

한참을 그렇게 조심스럽게 병사들 사이로 걸음을 옮기며 느릿하던 속도가 어느 순간 점점 빨라졌다.

찾은 것이다.

벌어진 길 사이로 포로들이 앉아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언제 공포에 떨었냐는 듯 주민들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두 손을 묶인 채 하나같이 앞섶이 잘려있다.

저 앞섶으로 편지를 썼구나.

품 안에 담긴 편지의 정체를 깨달은 젊은 아낙네가 왈칵 눈물을 쏟았다.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다.

미리 언질이라도 받았는지 포로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주민들을 보면서도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럼에도 상기된 표정은 숨기질 못한다.

하나같이 묶인 두 손을 꽉 쥔 채 주민들을 연신 살폈다.

마침내 포위망을 완전히 벗어난 주민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 앉은 포로들 사이로 쏟아져 들어갔다.

"뤼크!"

"살아 있었구나... 살아 있었어..."

언덕 위에서 바라보니, 마치 바둑판 사이로 퍼지는 바둑알을 보는 느낌이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바둑알들이 이내 자신의 자리를 찾아 멈췄다.

하나, 둘 제 짝을 찾은 바둑알들이 점점 많아졌다.

그러나 칸수는 이만, 바둑알은 삼만.

테레스 산맥에서 목숨을 잃은 병사들은 이 자리에 없다.

주민들은 눈물을 훔치며 연신 주변을 돌아다녔다.

제발 자신의 자리가 있기를 바라면서.

"...다나크 제국 서쪽을 지키는 최전방 성이 뚝 떨어졌군."

"그것도 아무 피해도 없이 말입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휘관들은 2왕자의 혼잣말에 만감이 교차했다.

영웅이 탄생했다.

오직 머리 하나로 성 하나를 통째로 얻은 영웅이 탄생했다.

영웅의 영광스러운 첫걸음을 함께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 질투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그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포로들을 바라보던 2왕자는 다시 성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정말 아무런 행동도 없이 길을 비켜주자 그제야 안심했는지 주민들보다 검을 버린 병사들이 더 많았다.

다시 한번 소름이 좌악 돋는다.

카인.

카인이라.

이젠 그가 자신에게 잘 보이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에게 잘 보여야 하리라.

그가 자신과 함께한다면, 불리하던 후계자 다툼도 전황을 뒤집을 수 있지 않을까.

뷔른 성을 바라보는 2왕자의 눈이 빛났다. 가슴 깊은 곳에서 오랜 잠을 자던 열망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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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여전히 시아라가 우려준 차 맛이 안 난다.

야전에서 쓰던 차도구보단 훨씬 좋은 향을 냈지만, 여전히 맛이 떨어졌다.

그래도 이 정도면 감지덕지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들고 창가로 향했다.

뷔른 성내가 한눈에 보인다.

온 거리를 물든 하얀 깃발을 보며 천천히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호록

"..."

주민들이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온 날.

그날 저녁 공성전 역시 끝났다.

성안에 갇혀 온 몸이 묶인 채 발견된 뷔른 백작의 동생은 그대로 거리로 끌려 나와 목이 잘렸다.

지금도 중앙 광장엔 그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을 것이다.

거리를 가득 메운 하얀 깃발들이 천천히 성 밖으로 향했다.

높은 성벽에 막혀 그다음 목적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디로 갈지는 알고 있었다.

희생자가 없는 전쟁이 있을까.

아니, 만약 희생자가 없다면 그걸 전쟁이라 부를 수 있을까.

왕국군도, 제국군도 단 한번의 전투만을 치렀지만, 희생자가 없을 순 없었다.

황자가 외부에서 끌어온 일만의 기병을 제외하면 이 성에 있던 보병은 총 사만.

그중 일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저 깃발 하나 하나가 목숨을 잃은 병사들이다.

죄책감을 가지느냐?

전혀.

저들이 죽지 않으면 우리 병사들이 죽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성을 다스리던 뷔른 백작과 그의 동생에게 감사를 표했다.

바른 정치를 펼치던 성군이었다면, 아마 성문이 열릴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보다 더 과격한 방법으로 성문이 열렸을 것이고, 도로를 가득 메운 저 깃발 역시 지금의 두, 세배는 되지 않았을까.

'네가 병사를 희생시키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이 생겼을까 걱정이다.'

스승님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떠올랐다.

...그럴 일 없습니다. 스승님.

저는 염세적이고 현실적이라 제가 집으로 돌아가는 게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합니다.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뜨거운 김과 함께 흘려보냈다.

네 목표를 위해 수만, 수십만의 목숨을 희생하는 게 옳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어쩔 수 없다 대답할 것이다.

각박하고 현실적인 세상에서 삽십 년 넘게 살다 온 인생이기에, 이 대륙을 관장하는 신들도 등 떠미는 이 세상에서 전쟁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없다.

어차피 내가 안 하면 다른 대리자에게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발악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전쟁을 시작한 건, 내 의지가 아닌 신들의 의지다.

그러니 전쟁으로 고통받을 사람들 때문에 나를 비난할 거라면, 너희들이 믿는 신을 비난해라.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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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른 성을 점령한 왕국군은 한동안 진군을 멈췄다.

테레스 산맥을 넘을 보급로도 다시 정비해야 했고, 혹시나 모를 주민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식량을 풀었기 때문이다.

전쟁은 이제 시작이지만, 전후처리는 끝없이 산재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중요한 안건이 아침 회의에 올라왔다.

"카인 참모.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왕자를 향해 속으로 진땀을 뺐다.

스스로 성문이 열리는 마법 같은 일이 발생한 후로 왕자는 노골적으로 나와 가까워지려 했다.

차를 마시러 부른다던가, 크렉스필을 두자고 한다던가.

나야 대장군에 해당하는 그와 가까워지는 것이 좋기만 했지만, 점점 왕자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평소 대외활동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영지 문제에도 관여하지 않았다고 하니 직접적인 죄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 말에 모두의 시선이 대전의 중앙으로 향했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뷔른 백작과 그 가신들이 사용하던 대전은 이제 2왕자과 그를 필두로 한 왕구군의 지휘관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전 한가운데 젊은 처녀가 두 팔을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기껏 스무 살이나 됐을까.

긴 은발 머리를 늘어뜨린 여인이 가만히 바닥을 바라보고 있다.

평생 햇빛을 본 적 없는 것처럼 피부는 머리카락처럼 하얗다. 살짝 내려간 눈매와 얇은 눈썹이 피부와 시너지를 일으켜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으음..."

누가 봐도 가녀린 소녀였다.

동그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차마 그 모습을 보고 목을 자르라고는 하기 힘든지 2왕자가 고민이 깊은 신음을 터트렸다.

"가만히 풀어주자니 후환이 두렵습니다. 여전히 이 성엔 뷔른 백작을 따르던 사람들이 남아있을 겁니다. 만약 왕국군이 자리를 비운 사이 반란이 터진다면, 일이 커질 수 있습니다."

안타까운 눈으로 여인을 바라보던 후작이 이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정확한 정론이다.

뷔른 백작의 딸을 살려두기엔 뒤가 찜찜했다.

잠시 고민하던 표정을 짓던 2왕자가 이내 굳은 얼굴로 입을 열려는 순간,

"이렇게 죽이기엔 아깝지 않겠습니까?"

스승님이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뷔른 백작의 딸이었으니 여러 정보를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따로 심문해 정보를 얻는 것만으로 큰 이득이 될 것입니다."

"..."

"그 정보의 가치에 따라 살려줄 수도, 죽을 수도 있겠지요."

시선은 2왕자를 향했으나 마지막 말은 여인에게 하는 말이었다.

2왕자 역시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여인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완전히 삶을 포기한 걸까. 유일하게 살아남을 길을 외면하고 있었다.

잠시 여인을 바라보던 2왕자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좋은 방법이나 협조할 마음이 없어 보이오."

"제가 직접 심문을 해보겠습니다."

"...카인 참모가?"

여인을 바라보던 시선들이 한번에 내게 쏠렸다.

이번에도 나서냐는 듯 날카로운 시선이 몇몇 보였다.

사실, 스스로도 당황하는 중이었다.

이미 삶을 포기한 여자를 어떻게 설득해.

게다가 여기 모인 사람들은 자신의 아버지를 감금하고 성을 뺏은 원수들 아닌가.

갑작스레 온 몸을 휘감는 무형의 불안함과 함께 입이 절로 열렸지만, 내 의지가 아니라는 말을 누가 믿어.

"...예."

이미 튀어나온 말이니 되든 안 되든 수습은 해야 했다.

신뢰를 잘 쌓나 했더니, 이상한 곳에서 가치를 깎아 먹게 생겼다.

"...혹시라도...... 아니네."

"예?"

"흠흠... 저 여인의 미모가 출중한 것은 알지만 괜한 소문이 퍼지면 주민들이 불안해 할 것이니 조심하게."

"..."

그런 생각 조금도 안 했는데요.

2왕자의 말에 나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눈빛들이 더 강해졌다. 이젠 후작과 스승님마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눈빛에 찔려 죽겠다.

불순한 생각은 조금도 안 했는데 파렴치한이 돼버렸다.

괜히 찔려 무릎 꿇은 여인의 눈치를 살폈는데,

...쟤는 눈빛이 또 왜 저래.

원망이 가득 찬 눈으로 표독스럽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미간에 구멍 나겠다. 이 년아...

째려보지를 말던가, 눈물을 닦던가.

...아이고.

괜한 일에 꼬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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