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10화 (110/191)

〈 110화 〉 강박관념

* * *

평화로운 아침이다.

밤 사이 투석기를 날리느라 잠은 평소보다 덜 잤지만, 다행히 깊게 잠을 잤는지 아침부터 기운이 넘쳤다.

"시아라가 우린 홍차 마시고 싶네."

둘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나온 지 이제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둘이 그립다.

평화롭던 작년을 생각하며 홍차를 입에 댔다. 예전보다 훨씬 향긋하고 깊은 향이 코끝을 맴돈다.

요 며칠 매일같이 차를 끓이니 실력이 좀 는 것 같기도 하고.

영지로 돌아가면 시아라와 대결을 한번 해봐야겠다.

"안에 있느냐?"

"스승님?"

"...천하태평이구나."

"홍차 좀 드시겠습니까?"

"...되었다. 내가 직접 타마"

하여간 입맛 까다롭기는 다나크 황제 저리가라다.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난로로 가까이 간 스승님이 능숙하게 홍찻잎을 넣고 뜨거운 물을 담았다. 저택에 지낼 때도 늘 스스로 우려 드신분 답다.

메이드들이 끓인 차는 깊은 맛이 안 난다나.

이내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든 스승님이 천천히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저택처럼 푹신한 의자는 아니지만, 야전에서 그런 걸 바라면 안된다.

어디가서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땅바닥에 대충 앉아 아침을 먹고 있을 병사들한테 두들겨 맞기 딱 좋다.

그렇게 스승님과 모닝티를 즐겼다.

마음이 잔잔하게 가라앉는 기분이다.

오늘은 왠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기분에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한참을 조용하던 막사에서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스승님이었다.

"...너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르는구나."

조금은 뜬금없는 스승님의 말에 절로 과거가 떠오른다.

헤르트의 수도 구석에 있는 공원에서 처음 만났었는데...

그게 벌써 삼 년이 더 지났다.

"그 인연이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 말에 스승님이 클클 웃었다. 자신 역시 이런 줄은 몰랐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나 역시 몰랐다."

"스승님이 보시기에 삼 년 동안 제 크렉스필 실력은 많이 늘었습니까?"

"아니."

"..."

거참 단호하시네.

괜히 민망스러워 홍차를 한 입 했다.

그래도 실력 좀 늘지 않았나?

지금도 이렇게 2왕자의 신임을 얻어가며 승승장구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부터 삼 년 동안 크렉스필만 주구장창 공부하던 놈이 아직도 공주님을 못 이기지 않느냐?"

"..."

그거라면 할 말 많았다.

엘라는 어릴 적부터 크렉스필을 배웠고 나는 이 세계로 넘어온 지 이제 4년밖에 안 되지 않았는가.

입 밖으로 꺼낼 말은 아니었기에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다시 찻잔을 들었다.

"스승님이 못 가르치시는 건 아닙니까?"

본인은 천재였으나 제자를 둔 적은 처음이다. 스스로가 천재인 것과 남을 가르치는 건 다른 재능이니 해본 말이었다.

우스갯소리로 던진 말인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혹시 화가 나셨나 싶어 얼른 눈치를 살피는데, 스승님의 표정이 영 이상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예?"

"내가 부족해서 너를 제대로 못 가르쳤을 수도 있겠구나."

"..."

자꾸 놀리니 이제 이렇게 반응하시려는 건가?

갑작스러운 자학에 들었던 찻잔을 다시 내려놨다.

이럴 분이 아닌데?

"...죄송합니다. 우스갯소리였습니다."

"나는 진담이다."

"..."

"혹시 지금 네가 펼치고 있는 전술도 내 가르침이 잘못 전달됐나 싶구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자세를 똑바로 고쳐 앉았다.

의자에 편하게 기댄 채 들을 이야기는 아님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스승님이 다시 말을 이었다.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괴로운지 조금 일그러진 얼굴이다.

"내가 처음으로 네게 화를 낸 날 기억하느냐."

"...병사를 소모품으로 본다고 하셨습니다."

갑자기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걸 떠나,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늘 병사를 밀어 넣는 전술만 사용하던 자네가 무슨 방법으로 병사를 아낄 전술을 쓴다는 거야!'

'병사를 아끼겠다고? 무슨 수로? 어떤 전술로?'

'그래서 자네는 지휘관의 자격이 없어.'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가.

상행을 마치고 영지로 돌아오는 길에 아직 사제지연도 맺지 않았던 때였다.

아마 그 가르침이 없었다면, 원정에서 나를 괴롭히던 트라우마를 아직도 못 벗어났겠지.

"...혹시 무리를 하고 있느냐. 포로들의 편지가 정말 효과가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내 가르침 때문에 병사들을 살리려는 것이냐?"

"..."

"물론 효과가 없어도 괜찮다. 이틀 후에 공성이 시작되면 저 성도 함락되는 건 시간문제다. 그러나 혹시라도 네가 병사를 살리는 것에 강박관념이 생겼다면...... 내가 잘못 가르침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가만히 찻잔을 내려다봤다.

여유롭게 홍차의 씁쓸함을 즐기면서 듣기엔 무거운 주제였다.

2왕자의 신임을 받던 처음과 달리 요 며칠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실 때가 있었다.

단지 요 며칠 노골적으로 질투심을 내보이는 자들이 많아져 그런 것이라 생각했는데...

"스승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는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절대 그런 건 아닙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된다. 나를 비난해도 좋다. 한순간의 실수로 병사들을 많이 잃을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런 적이 있으니까."

"..."

"모든 작전,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는 지휘관은 없다.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을 때도 있어. 혹여나... 네가 정말 강박관념이 생긴 것이라면 그런 전투를 겪고 트라우마가 다시 재발하면 내 잘못일 것 같아 미안하구나."

말을 꺼내는 스승님의 얼굴이 괴로움으로 일그러져있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작은 막사 내에 침묵이 돌았다.

정말 내게 강박관념이 생겼나?

저렇게 괴로운 얼굴로 말씀을 하시니 없던 혼란이 생기는 기분이다.

'병사를 소모품으로 생각하지 마라.'

확실히 내 가슴속 깊은 곳에 박힌 말이긴 했다.

어느 전략을 짜든, 어떤 전술을 배치하든 계속해서 머리속에 떠다니는 말이었다.

근데 그게 강박관념이라고?

그 정도로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나? 정말 필릭스의 주장처럼 바로 공성을 하는 게 좋았을까?

...잘 모르겠다.

스스로 단 한번도 강박관념이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생긴 기분이다.

"...스승님. 설사 내일까지 성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포로들의 옷을 찢어 짧은 편지를 쓰게 하고, 새벽 내내 투석기로 날려 보낸 일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약탈을 하고 떠날 곳이면 무의미한 일이 맞습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비효율임을 알 수 있습니다."

"뷔른 성을 두고두고 점령해야 하니 민심을 달랬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냐."

"스승님도 잘 알고 계시는 것처럼 그렇습니다."

포로들도 뷔른 성의 주민들이다.

그들을 먹이고, 물을 주고, 최소한의 통제만 하는 것은 이들은 미래의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스승님의 말씀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정말 저 스스로 강박관념이 생겼을지 말입니다."

"..."

"뷔른 성을 단지 약탈을 위한 성이라 생각하니 가정은 쉬웠습니다."

"...어떻게 말이냐."

"아마 이틀 전에 뷔른 성을 무너뜨리고 내성에서 다 같이 아침을 먹고 있을 겁니다."

작은 막사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다 식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뷔른 성을 단지 약탈하기 위해 왔다면?

'새벽 내내 날아간 게 편지가 아니라 포로들이었겠지.'

성벽과 지붕 위로 떨어지는 수많은 포로, 사방으로 비산하는 편육들.

자신들의 남편이, 아들이 하늘을 날아 산산조각이 나는 모습.

적들의 사기를 떨어트리는데 이것보다 좋은 방법이 있을까.

그리곤 곧바로 공성을 시작했을 것이다.

적들이 혼란에 빠졌을 때가 가장 공격하기 좋으니까.

병사를 소모 시키는 것을 강박관념으로 느끼는가.

아니다.

전혀 아니다.

가슴 속의 제1 명제로 남아있을 뿐, 그 말에 잡아먹히진 않았다.

"..."

그러나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듯 스승님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살짝 모인 눈썹과 굳게 닫힌 입 끝은 분명히 덜 나온 말이 있음을 암시했지만, 나는 못 본 척했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이라면 하실 거다.

지금은 좋은 타이밍이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 다음에 또 꺼내실 거고.

"저는 스승님에게 가르침을 받은 걸 가장 큰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스승님께서 그런 걱정을 하신다는 건, 제가 부족하다는 뜻도 됩니다. 그러니 저를 조금만 더 믿어주십시오."

"...너는 잘하고 있다."

"그럼요. 누구 제자인데요."

그 말과 함께 씨익 웃었다.

일부러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과장되게 눈꼬리를 휘자 스승님이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시더니 이내 같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이가 드니 걱정이 많아진 걸 수도 있겠구나."

"그럼요. 스승님인데요."

"...?"

이크.

다 식은 차를 음미하던 스승님이 내 마지막 말에 잠깐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찻잔을 움찔 떨었다.

살짝 들렸다 내려온 게 저거 분명히 찻잔을 던지려 한 거다.

"버르장머리는 잘못 가르친 게 틀림없어."

"그럼요. 누구 제자인데... 아악!"

"내가 언제 그렇게 가르쳤어! 이놈아!"

당했다.

반대 손에 있던 지팡이를 못 봤다.

소드 마스터의 그 궤적과 비슷한 움직임을 보인 지팡이가 이마로 곧장 떨어졌다.

하늘이 노래지더니 눈물이 핑 돌았다.

진짜 더럽게 아프다.

하여간 맨날 골골대시더니 이럴 때 보면 힘이 넘친다.

그렇게 스승님과 투닥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다급히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막사의 입구가 벌컥 열렸다.

"카인 참모님! 왕자님께서 급하게 찾으십니다!"

"지금?"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지?

아직 아침 회의가 시작되려면 여유가 있는데...?

스승님과 함께 지휘관 막사로 향했다.

혼자였다면 뛰어갔겠지만, 스승님과 함께 가니 발걸음이 여유롭다.

덕분에 상황에 맞지 않게 아침 산책을 나온 기분으로 스승님과 걸음을 맞췄다.

"무슨 일 같습니까?"

"나도 잘 모르겠구나. ...혹시."

"혹시?"

그러나 거기까지 이야기한 스승님은 입을 꾹 다물었다.

사람을 화나게 하는 세 가지 중 첫 번째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카인 참모!"

"왕자님?"

"카인!"

"아버지?"

지휘관 막사가 지어진 야트막한 언덕 위에 지휘관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있었다.

무슨 일인데 이 무거운 양반들이 다 막사 밖으로 나와 있어?

2왕자도, 후작도 나를 불렀을 뿐 다시 고개를 언덕 너머로 향했다.

하나같이 굳은 얼굴에 괜히 불안하다.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스승님 역시 무슨 일이 생긴 걸 깨달았는지 연신 무언가 중얼거리며 지팡이를 재촉했다.

그리고 마침내 언덕 너머로 성의 첨단이 보이기 시작했고...

"..."

"..."

언덕을 모두 오른 나와 스승님 역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성문이 열려있었다.

활짝 열린 성문으로 주민들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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