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09화 (109/191)

〈 109화 〉 성문

* * *

세상 어느 곳이나 해는 뜬다.

그곳이 전쟁터든, 시장이든, 어느 집 안방이든 아침이 오면 해가 뜬다.

그런데도 거리는 황량했다.

전쟁통에도 바글거리던 시장도, 한가로운 햇살을 맞으며 문을 열던 상점도 모두 문을 열지 않았다.

밤사이 들려오던 정체 모를 파공성은 뷔른 성의 주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공기가 찢어지는 듯 쐐액 거리는 소리와 어딘가 부딪혀 터지는 퍽 하는 소리.

성 밖 너머에서 날아오는 무언가의 정체를 차마 확인할 자신이 없던 주민들은 문을 걸어 잠갔다.

차라리 바위를 던지면 땅을 진동시키는 폭음에 내성으로라도 도망을 가겠다만, 들려오는 소리는 절대 딱딱한 유기물이 아니었다.

바로 전날 해방됐던 포로들이 화살에 맞아 돌아간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주민들은 그 소음의 정체가 쓸모를 다한 자신들의 아들, 남편이 아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문밖을 나섰다. 밤새 쏟아진 정체 모를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

공포보다 호기심이 더 큰 사람.

투석기로 던져질 가족이 없는 사람.

상관의 명령으로 돌아다니는 병사들.

용기 있던 자들은 투석기를 통해 던져진 물건을 찾았다.

아니, 찾을 필요도 없었다.

골목마다, 거리마다 온통 흰 종이와 천이 나부끼고 있었다.

대부분은 헤진 천이었다.

옷가지를 잘라다 넣은 듯 단추가 달린 천도 있었고, 마감이 뜯어진 천도 있었다.

"...이건."

집을 나선 젊은 아낙네는 문 앞에 떨어져 있던 낡은 천을 집어 들었다.

약지에 끼워진 은반지가 수수한 옷차림에 비해 퍽 어색하다.

「내 아내에게 꼭 전해 주시오. 북쪽 광장 뒷골목 파란 지붕. 헥터」

이게 무슨 뜻일까.

밤새 공포로 떤 아낙네의 손이 여전히 덜덜 떨린다.

헤진 천에서 시선을 떼 골목을 바라보니 담벼락 위에도, 지붕 위에도, 골목마다 천 조각이 널브러져 있다.

천천히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다른 천을 향해 다가갔다.

「할머니한태 전해 주새요. 동쪽 광장 뒷골목 붉은 담벼락. 라이넬」

「엄마 금방 갈게요. 중앙시장 두 번째 골목 하얀 대문. 말렌」

.

.

.

「마누라 보고 싶어. 딸도. 남쪽 광장 잡화점 뒷건물. 칼슨」

손이 덜덜 떨렸다.

조금 전과 다른 의미의 떨림이다.

혹시나 잃어버릴까 손으로 꽉 쥐었다.

작은 천 조각에서 남편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그제야 젊은 아낙네는 이 천 조각의 정체를 깨달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 살아있었다.

숲에서 모조리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그날 성 안은, 온통 울음바다였다.

2만 명이 넘는 포로가 보인다는 소식엔 혹시나, 정말 혹시나 했다.

제발 그이가 그 안에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제발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길 빌었다.

성안까지 들려오는 포로를 풀어주겠다는 젊은 남자의 목소리에 딸아이를 붙잡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가.

드디어, 드디어 남편을 볼 수 있겠구나 싶었다.

부디 살아있기를 바랬다.

조금 다쳤어도 좋으니 살아왔으면 했다.

그런데 화살이라니.

평생을 여기에서 살던 우리 남편한테 화살을 쏘다니.

세상에 이런 법은 없다.

가족을 전쟁터에 보낸 주민들은 정신을 놓고 내성으로 달려가 성문을 두들겼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칼날이었다.

주민들을 해산시키라는 명령을 듣지 않은 병사들을 가장 먼저 죽인 뷔른 백작의 동생은 내 성문 앞에 모인 주민들을 가차 없이 베었다.

어제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주민들은 완전히 마음이 떠나버렸다.

차라리 하루빨리 왕국군이 성문을 열고 이곳을 점령해주었으면 했다.

...이럴 때가 아니다.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길바닥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들고 있는 이 천 조각들.

손바닥만 한 작은 천 조각에 쓰인 주소로 가야 한다.

이들의 생사를 전달해 줘야 한다.

칼슨의 이름이 써진 천 조각을 품에 꼭 넣은 젊은 여인이 다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골목을 벗어난 젊은 여인은 생전 처음 보는 아수라장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남쪽 광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수많은 주민이 뛰쳐나와 천 조각을 줍고 있었다.

광장 곳곳마다 작은 동앗줄이 굴러다녔다.

천 조각들을 저 줄로 꽁꽁 묶어 날려 보냈다 보다.

미처 퍼지지 못한 천 조각들을 헤집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자신처럼 여러 개의 천 조각을 든 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보인다.

우는 사람.

웃는 사람.

고함을 치는 사람.

평소에도 사람이 바글거리는 광장이었지만,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때, 누군가가 광장 중앙에 있는 단상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었다.

꽤 부유한 옷이다. 어깨엔 가신을 뜻하는 작은 견장이 달려있었다.

몇몇 병사가 그를 호위하며 단상 주변을 둘러싸자 주민들의 시선이 점점 몰리기 시작했다.

젊은 아낙네 역시 그 노인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주 어릴 적부터 이 성의 재정을 맡던 가신이었다.

하나둘 땅바닥을 바라보던 주민들이 단상을 바라봤다.

마침내 광장 내 모든 주민의 시선이 집중됐을 때, 가만히 주변을 바라보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제가 누군지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지금 우리 영지는 큰 위기에 빠졌습니다. 20만이 넘는 왕국군이 이 성을 포위 중입니다. 만약 그들이 공격해온다면,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을 여러분들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였다.

큰 소리로 외치는 게 조금 힘든 듯 말을 잠깐 쉰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약탈을 하러 온 것이 아님을 직접 증명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걸 막은 건 누구입니까."

"..."

"이 자리에 있는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아버지를 향해 화살을 날린 사람이 누구입니까."

"..."

"......그렇다면 정말로 우리를 생각하는 나라는 어디입니까? 다나크입니까. 에어로크입니까."

젊은 여인은 저도 모르게 손에 쥔 천 조각을 꽉 쥐었다.

품에 든 작은 천 조각에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지만, 여전히 천 조각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절망에 빠져 있을 것이다.

"만약 적들의 공성이 시작되면...... 잠재적 위협인 포로들을 그대로 살려두리라 생각하십니까. ......이 광장에 모인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 말에 광장이 다시 한번 시끌시끌해졌다.

자리에 주저앉은 사람.

끊임없이 우는 사람.

붉은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사람.

젊은 여인 역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다리 힘이 풀리고 말았다.

어떻게 알게 된 생환 소식인데.

...공성이 시작되면 죽을 거라고?

그건 안된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며칠 동안 천국과 지옥을 계속해서 오가는 기분이다.

혼란이 깊어지는 광장을 바라보던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거의 다 됐다.

"......저는 지금 성문으로 향할 생각입니다. 그곳으로 가서 성문을 열 생각입니다."

"...!"

노인의 말에 시끄럽던 광장이 순식간에 침묵으로 내려앉았다.

반란.

역모.

노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국을 버리고 에어로크 왕국을 받아들이자고.

누구 하나 섣불리 말을 하지 못하던 그때, 누군가가 노인을 향해 소리쳤다.

"겨우 우리 인원으로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는 겁니까?"

모두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아무리 이 광장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지만 맨몸으로, 무기 하나 없이 성문으로 가면 오히려 개죽음을 당하지 않을까.

불안감이 잔뜩 낀 눈빛을 보내왔음에도 노인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우리만 가는 게 아닙니다."

"...그럼?"

"서쪽에서도, 북쪽과 동쪽 광장에서도 저와 뜻을 함께하는 가신들이 있습니다. 한 명은 불가능하지만, 열 명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것이 모이고 모여 만 명이라면...... 가능합니다."

다시 한번 광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면 된다.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작은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큰 뜻은 없다.

세상을 뒤집거나 권력을 붙잡자는 큰 뜻 따위는 없었다.

그저, 포로로 붙잡힌 가족이 보고 싶었다.

우리 손으로 남편을, 아들을 잃을 수는 없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노인이 단상에서 내려왔다. 광장의 모든 시선이 그를 따라 단상을 내려갔다.

천천히 단상을 내려온 노인은 곧장 성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정말 가는 걸까.

병사들이 가로막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럼에도 노인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도 가지 않으면 정말 자신 혼자라도 가겠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는 그때, 누군가가 비틀거리며 노인을 따라갔다.

"우리 아들... 우리 아들."

머리가 산발이 된 노파가 앞서가는 노인의 뒤를 쫓았다.

신발도 없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계속해서 노인을 쫓아갔다.

힘 없는 노파의 눈에서 작은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혹시나 성문 앞에서 죽을지라도 자식은 살리겠다 중얼거리고 있었다.

"..."

"..."

이내 곧, 노파의 눈에 있던 불길이 점점 주변으로 옮겨붙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발걸음을 옮겼다.

노인을 따라 천천히 성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작은 불길은

동쪽 광장에서도

북쪽 광장에서도

서쪽 광장에서도

마침내 모든 주민들의 눈 속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칼슨."

왼손에 껴진 약지를 연신 쓰다듬으며 젊은 아낙네 역시 노인의 뒤를 따랐다.

내가 갈게.

아직 자고 있는 딸아이가 생각난다.

금방 돌아갈게.

아빠랑 같이 돌아갈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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