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08화 (108/191)

〈 108화 〉 자네 이름이 뭐지?

* * *

"형님. 괜찮아요?"

"괜찮아 보이냐?"

하늘이 노랗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몸에 깔린 풀잎들이 비키라며 등을 찔러댔지만, 도저히 앉을 힘도 없었다.

따끔거리는 느낌보다 숨을 쉬는 게 우선이다.

"허억, 허억... 진짜 뒤질 뻔했네."

진짜 죽을 뻔했다.

성벽 위에 미친 놈들이 진심으로 화살을 날렸다면 정말 죽었을 것이다. 그나마 중간부터 왕국군이 방패로 몸을 가려줘 재빨리 도망칠 수 있었다.

"전우애가 보기 좋군"

자신과 모지리를 둘러싸고 있는 왕국군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의사 좀 불러주십쇼."

도망칠 땐 목숨 하나 건지려고 신경도 못 쓰고 있었는데 인제 보니 왼손의 감각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러다 평생 병신으로 살까 겁이 덜컥 난다.

"이미 불렀다."

"...감사합니다."

아군에게 화살을 쏘는 저 미친놈들보단 그래도 인간미가 있다.

설마 치료를 안 해주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다행이다.

여전히 몸을 움직일 힘이 없어 팽글팽글 도는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주변이 어수선해졌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주변을 보고 싶은데, 도저히 고개를 들 힘이 없어 뒤통수를 땅바닥에 댄 채 이리저리 돌리니 보이는 건 죄 남정네들 다리뿐이다.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둘러보는 그때, 인파가 갈라지며 검은 바지를 입은 누군가가 다가왔다.

"이름이 뭐지?"

의사인가?

치료하는데 이름도 필요한가 싶지만, 허리춤에 화살통이 없는 거로 보아하니 미친놈은 아니다.

"칼슨입니다."

"칼슨..."

호구 조사가 끝났으면 손에 박힌 화살이나 좀 빼주지 도통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인다.손바닥을 찌르는 욱신거림이 점점 더 커졌다.

슬슬 짜증이 나려는 그때, 검은 바지를 입는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이름이 뭐지?"

"저요?"

"그래. 자네."

"저는 라이넬입니다."

어깨에 화살이 박힌 그가 순박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덩치도 커다란 놈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대답하니 모양새가 퍽 어색하다.

잠시 그를 바라보는 것 같던 남자가 다시 질문을 던져왔다.

아니 치료는 언제 하게.

"둘은 원래 아는 사이인가?"

"...같은 조원이긴 했습니다만 친하진 않았습니다. 저놈 이름도 지금 알았습니다."

"그런데 구해준 건가?"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을 하는 게 예의겠지만, 도저히 몸을 일으킬 힘이 없다. 칼슨은 여전히 빙글빙글 도는 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집에서 할머니가 기다린다는데, 집에 다 와놓고 죽게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

"그보다 치료는 언제 해주실 겁니까. 의사 양반. 아파 죽겠습니다."

"난 의사가 아닌데?"

그럼 누군데 와서 말을 걸어.

쓸데없이 똥개 훈련을 한 거야. 지금?

"그럼 저리 꺼지고 의사나 불......"

순간 열이 확 뻗친 칼슨이 고개를 휙 들어 그를 바라봤다.

세상 궁금증은 다 가진 놈이겠거니 싶어 눈깔에 힘을 주고 노려봤다가 이내 눈에 힘을 풀고 다시 고개를 뒤로 처박았다.

"누군진 아나 보네?"

"......살려주십쇼. 집에 여우 같은 아내랑..."

"토끼 같은 자식이 있다고?"

"...어떻게 아셨습니까?"

다나크 제국에서만 쓰는 말인 줄 알았는데, 에어로크 왕국에도 똑같은 말이 있나?

"죽은 놈들 죽기 전에 하는 말이 다 똑같더군."

"..."

아이고.

간신히 화살 비를 뚫고 도망쳤는데, 어처구니없게 목이 날아가게 생겼다.

망설임 없이 황자의 목을 베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자 아까보다 하늘이 더 강하게 돈다.

"단상 위가 좋나. 이곳이 좋나?"

"..."

아무래도 진심인 듯싶다.

등에서 나는 식은땀이 고통 때문인지, 공포 때문인지 헷갈린다.

그러나 마냥 죽으란 법은 없는 걸까.

누군가 서둘러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젊은 참모에게 말을 걸었다.

"이런, 상처가 많이 벌어졌습니다. 곪기 전에 화살을 빼내야 할 것 같습니다."

"저 라이넬 이라는 사람 먼저 치료해주시오."

"알겠습니다."

손을 뚫린 자신보다 저놈이 더 상처가 심하긴 했다.

정말 죽일 생각은 없었나 싶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때,

"이 사람은 치료를 안 해도 될 것 같거든."

"..."

잠시 그쳤던 식은땀이 다시 줄줄 샌다.

그 잠깐 사이에 천당과 지옥을 맛보는 중이다.

젊은 참모의 검은 바지 사이로 뷔른 성이 보였다.

아이고 마누라.

나 여기서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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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크 제국의 최서단을 지키는 뷔른 성은 고요한 적막 만이 감돌았다.

그 누가 말을 꺼낼 수 있을까.

자신의 손으로 이웃에게 화살을 날린 그 순간부터, 뷔른 성은 천천히 죽어가기 시작했다.

소문은 퍼질 수 밖에 없다.

오늘 낮 화살을 날린 병사도, 식량 배급을 위해 차출된 아낙네들도 서로 얼굴을 아는 이웃들이었다.

알음알음 퍼진 소문은 채 하루가 가기 전에 성내를 휩쓸었다.

"식량이 빨리 소모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을 받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다같이 굶어 죽으면 되는 겁니까?"

"..."

"게다가 거기에 첩자라도 끼어있으면 막을 방법은 있습니까? 고작 삼만의 병사로 이만 오천에 달하는 포로를 일일히 신분 확인을 언제하고 있습니까!"

팰컨은 눈 앞의 늙은 가신이 참으로 한심했다.

만약 성문을 내렸다가 왕국군이 진군을 시작하면?

포로들이 미끼였다면?

채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성이 함락됐을 것이다.

자신의 목은 성벽에 걸렸을 테지.

"저는 형처럼 바보 같은 짓은 안 합니다! 버티고 버티다 보면 언젠가 원군이 올 겁니다!"

황자를 따라 성 밖을 왜 나가는가.

애초에 내려온 명령은 이 성을 사수하라는 명령이었다.

공적에 눈이 멀어 황자를 따라간 형 역시 한심했다.

'차라리 거기서 죽으시오. 형님.'

형보단 이 뷔른 성을 더 잘 다스릴 자신이 있었다.

젊은 조카가 하나 있었으나 평소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으니 순조롭게 백작 위를 물려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병사들의 사기가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풀어준 포로를 향해 화살을 쐈다고 성 내에 소문이 퍼졌습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은 일이 아닙니다. 화살에 맞은 포로들의 가족들이 이 성에..."

"괜찮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 겁니다! 오히려 제국을 위해 죽었으니 영광으로 알아야죠!"

"..."

팰컨을 설득하던 늙은 가신은 말이 안 통함을 깨닫고 입을 꾹 다물었다.

주민들이, 징집된 병사들이,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이 제국을 위해 희생한다는 개념을 알까.

그저 배부르고 등 따시면 행복할 사람들이 제국을 위해 죽었다고 영광스러워 할까.

아니다.

이해할 리가 없다.

오늘 낮 정확히 똑같은 말을 하다가 목이 달아난 황자가 떠올랐다.

'...'

늙은 가신은 집으로 돌아가야 함을 깨달았다.

이 곳에서 더 이상 자신이 할 일은 없다.

뷔른 백작도 붙잡혔다.

주군의 동생이라 예의를 차렸을 뿐, 그를 위해 목숨을 걸 생각은 없었다.

배에 구멍이 뚫렸으면, 침몰하기 전에 내리는 게 옳다.

...그리고 혼자 내리는 것 보단, 다같이 내려야 마음이 편하리라.

주군의 동생에게 고개를 숙이고 나오는 늙은 가신의 눈이 날카로워졌지만, 등을 돌린 팰컨은 그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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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낮의 일은 인상 깊었네."

"별 일 아니었습니다."

"확성 마법을 부탁하더니 이유가 있었군."

아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는 중이었고, 적군의 사기는 땅을 기는 중이다.

어떻게 이런 인재가 이제야 발견이 됐지?

2왕자는 카인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혹시... 처음부터 적들이 포로들을 받아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

다음 작전을 위해 모든 지휘관과 참모들이 모인 자리였다.

그럼에도 카인은 아무런 긴장도 되지 않는 듯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확성 마법을 부탁드린 순간부터 예상했습니다. 적들 역시 우리의 속셈을 알게 됐으니 쉽사리 열지 않겠다 생각했습니다."

"호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열면 여는 대로 이득이다.

반대로 열지 않아도 적들의 사기가 떨어진다.

적들은 외통수에 걸린 것이다.

이게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전략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눈 앞의 젊은 청년을 수도로 데려가는 건 어떨까.

두고두고 옆에서 중요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저 성문은 언제 열릴 것 같은가?"

"빠르면 내일... 늦어도 모래라고 생각합니다."

"뭐?"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지휘관들과 참모들이 일제히 경악성을 터트렸다.

식량이 얼마나 남았을지는 모르겠지만, 하루치가 남진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2주는 예상했는데 바로 내일이라니?

"말도 안됩니다."

결국 막사 내에 있던 인원 중 한 명이 붉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사건건 카인과 충돌하던 필릭스였다.

그의 전략이 뛰어나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방금 카인의 말은 무리수였다. 말도 안되는 말로 2왕자를 현혹하는 걸 납득할 수 없었다.

사실 그는 지금이 작전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도 안된다고?"

"예. 무엇보다 지금 카인 참모의 전략은 비효율적이기 짝이 없습니다."

카인을 바라보던 시선이 모조리 필릭스에게 향했다.

승승장구하던 카인을 견제할 새로운 인재가 나타났을까.

필릭스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던 사람들은 열망의 눈빛을 보냈고, 별 상관 없던 사람들은 흥미로운 눈빛을 보냈다.

"어떻게 비효율적인지 설명해보게."

"그건 우리 군과 적군의 머리 수 차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22만의 대군이다. 반면 적들은 불과 삼만 명에 불과했다.

모든 병사를 동원해 공성을 시작하면 며칠 못 가 성벽을 넘을 것은 자명했다.

굳이 이렇게 시간을 써가며 포위만 하고 있는 건 지나치게 비효율적이었다.

필릭스의 설명을 들은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인의 방법이 피해가 적은 것은 맞지만, 굳이 머리를 써가며 스스로 성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사실 없었다.

이미 압도적인 무력 차이가 나니까.

"안됩니다."

그러나 이번엔 카인의 입에서 반대의 말이 나왔다.

"이유는?"

"괜한 병력 소모입니다. 한 명도 안 죽고 성문을 열 수 있는 걸 굳이 병사들을 소모 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전쟁을 하러 나온 거라네. 병력의 소모는 필연적인 일이야."

카인은 가만히 필릭스를 바라봤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더니 기어코 딴죽을 걸었다.

내기에서 지면 다시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했는데, 뻔뻔하게 회의에 참석한 저 모습을 봐라.

지휘관들 앞에서 내기 내용을 꺼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때 2왕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지. 카인 참모. 자네의 말대로 내일이나 모레 안으로 성문이 열리면 좋겠지만, 만약 열리지 않으면 사흘 후에 공성을 하도록 하지. 언제까지 기다릴 수는 없으니 말이야."

2왕자의 말에 막사 내에 있던 인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병력의 소모를 최소화 할 수 있다면 우선 기다리는 게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카인 역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정말 이틀 안으로 적들이 문을 열거라 생각하는가?"

"예. 제 생각대로라면 가능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 있게 말을 꺼낸다.

이쯤 되면 카인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정확히 설명해보게."

"저희가 가만히 있으면 2주, 혹은 그 이상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니 적들을 더 흔들어야 합니다."

"...지금보다 더 흔든다고?"

"예. 문을 열 준비는 됐으나 나서서 문을 열 사람이 없을 겁니다. 문을 열 사람을 만들어 주면 됩니다."

"..."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좌중의 시선이 카인의 입으로 몰렸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열린 그의 입에선 전혀 뜻밖의 말이 나왔다.

"투석기가 필요합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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