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 운 없는 새끼
* * *
"다나크 제국의 황자. 그대에게 모든 죄를 물어 이 자리에서 참하겠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가."
꿀꺽
연신 반지를 쓰다듬던 병사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등줄기가 연신 싸늘했다.
온몸을 돌아 손끝까지 소름이 끼쳤다.
정말 죽일 생각인 건가?
정말로?
또다시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터진다.
이 상황을 믿지 못하는 사람.
저 사람은 대역이라는 사람.
고성을 지르며 환호하는 사람.
웅성거림이 군중 사이로 서서히 퍼지는 그때,
"개소리하지 마!!!"
찢어지는 목소리를 내뱉은 황자가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제국을 위해 백성들이 희생하는 건 당연한 거다! 오히려 전투에 패배한 저 야만인들을 모조리 죽여버려야 옳아! 나 하나 지키지 못하는 병사들이 무슨 필요가 있다는 거야!"
그의 고함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성을 포위한 왕국군도, 고향을 눈앞에 둔 포로들도, 성을 지키는 병사들도 처참한 꼴을 한 황자의 말이 똑똑히 들렸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나도 형들처럼 동쪽으로 갔어야 했다! 그곳이면 내 능력을 펼칠 수 있었을 터인데!!! 이 모자란 놈드..."
촤학
쉬지 않고 병사들을 저주하던 황자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목이 잘리고도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목이 날아간 몸뚱이가 피 분수를 터트리며 털썩 쓰러진다.
4황자의 목이 데굴데굴 굴러가 단상 밑으로 떨어졌다.
아무렇지 않게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젊은 참모가 다시 앞을 바라봤다.
"이로써 너희들의 죄는 사라졌다."
"..."
제국의 황자를 죽인 사람 치고는 너무나 무미건조한 말투다.
정말로.
정말 죽였다.
정말 저 젊은 청년이 제국의 황자를 죽였다.
오히려 충격을 받은 포로들이 제 목이 잘린 것 마냥 덜덜 떨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너희들을 풀어주겠다."
그와 동시에 포로를 감싸고 있던 왕국군이 천천히 포위를 풀었다. 벌어지는 인파 사이로 성문이 보였다.
딱 10분만 걸어가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
그러나 누구 하나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바로 눈앞에 성문이 떡하니 보이는데도 주변의 눈치를 살필 뿐 포로들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가만히 이 모습을 보던 젊은 참모가 다시입을 열었다.
"뷔른 백작 역시 우리 손에 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성을 바라보던 포로들이 일제히 시선을 옮겼다.
뷔른 백작이 왕국군의 포로로 잡힌 게 무슨 뜻이라는 걸까.
"그러니 지금 성으로 들어가 우리에게 검을 쥐는 순간, 그 결과는 그대들의 책임이다. 지금처럼 황자가 대신해서 너희들의 죄를 사해줄 경우는 없다."
"..."
"스스로 검을 들어 우리에게 저항할 생각이면, 그래도 된다. ...그러나, 성문이 열리고 난 후 우리에게 칼을 들었던 자는 모두 황자의 뒤를 따라갈 것이다."
성으로 돌아가 검을 다시 쥐는 건 허락하겠으나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져라.
누군가의 명령이 아닌 너희들 스스로 검을 들었으니 말이다.
젊은 참모가 하고자 하는 말을 깨달은 포로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목이 잘린 시체로 향했다.
화려한 갑주가 온통 붉은 빛으로 젖어있다.
살아생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그는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그때, 포로 중 한 명이 큰소리로 외쳤다.
"만, 만약! 검을 안 들면... 안 들면 살려주시는 겁니까!"
사십이 조금 안 된 중년 포로였다.
공포로 몸을 벌벌 떨면서도 그는 꿋꿋이 젊은 참모를 바라봤다.
가만히 포로를 바라보던 젊은 참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땅은 정복 전쟁의 시작점이다. 그대들이 칼 대신 농기구를 든다면, 우리의 적이 아니다."
"..."
"우리 왕국의 소중한 백성이 되는 것이다."
넓은 평야가 다시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그제야 포로들은 눈 앞의 젊은 참모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았다.
그는 우리를 위로하고 있었다.
황자의 밑에서, 뷔른 백작의 밑에서 고통받은 자신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황자를 죽였다.
뷔른 백작 역시 성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 운명을 결정지을 기회를 준 것이다.
칼을 들고 전부 죽을지.
농기구를 들고 백성이 될지.
만약 칼을 든다면...
뷔른 성엔 개미 한 마리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제 출발해라."
"아, 안 가면 안 됩니까!"
"가라."
"..."
어디선가 터진 또 다른 질문에 젊은 참모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보류는 없다.
상황을 보고 선택할 기회도 없다.
20만이 넘는 대병력으로 성을 포위한 채 선택지를 던졌다.
사실상 답이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나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충분히 관용을 베풀고 있음을 알고 있는 포로들은 감히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천천히.
천천히 가장 앞에 있던 포로들부터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는 못 갈 줄 알았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건만 발걸음이 무거워 보인다.
포로들은 연신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앞으로 걸어갔다.
황자를 죽임으로써 신뢰를 보여줬지만, 들어본 적도, 겪은 적도 없는 이 기이한 상황은 본능적인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2만이 넘는 포로 중 한 명은 이 조심스러운 속도가 답답하기만 했다.
빨리 좀 가지.
집에서 자기를 기다리는 아내와 딸을 당장이라도 보고 싶었다.
약지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못 돌려줄 줄 알았는데, 반지에 정말 신통한 능력이라도 있는 건가 싶다.
성으로 돌아가자마자 집 문을 걸어 잠그고 며칠 동안 안 나올 생각이었다.
20만이 넘는 대부대가 성을 포위한 상태에서 다시 검을 들라고?
미친놈이 아닌 이상 절대 그럴 일 없다.
나라가 뭐가 중요하고 소속이 뭐가 중요한가.
우리 가족이랑 평범하고 행복하게만 살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
맘 같아선 행렬을 헤치고 나가 가장 먼저 성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 정도 눈치는 있어 가만히 줄을 따라갔다.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형님?"
"...어?"
"형님도 집 가는 거예요?"
자연스레 시선이 뒤통수로 갔다.
며칠 전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뒤통수를 쳤던 그 순박한 병사였다.
마음속에 내내 걸렸는데 신이 도왔는지 살아있었나 보다.
뒤통수를 때린 건 기억도 못 하는지 웃으며 다가오는 그를 보자 괜스레 마음에 찔린다.
"정말 다행이다. 살아 있었구나."
"헤헤. 네. 우리 집에 가는 거 맞죠? 다 같이 가서 좋네요."
무슨 전쟁놀이가 끝나고 집에 돌아간다는 듯 평온한 말투에 잠시 할 말을 잃었지만, 그게 뭐 어떤가 싶다.
"집으로 돌아가면 문 꼭 걸어 잠그고 아무한테도 열어주지 마. 혹여나 전쟁에 참여하라고 해도 절대 싫다 그러고."
"네. 그럴게요. 할머니가 해주시는 밥도 못 먹고 재미도 없었어요. 헤헤."
"...너 어느 쪽 사냐?"
"저 동쪽 광장 뒷골목에 살아요. 할머니, 할아버지랑 같이."
"..."
부모는 없나.
아무래도 중간중간 찾아가야 할 듯싶다.
자신이 사는 집이랑 그리 멀지도 않다.
장 보러 시장에 들르는 겸 안부를 확인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면 문 꼭 걸어 잠그고 나오면 안돼. 내가 부를 때만 나와."
"네. 형님."
그놈의 형님 소리 때문에 매일같이 십인장한테 혼이 났으면서도 끝까지 그 말투는 변함이 없었다.
한 조에 배속됐을 땐 그토록 불안했는데, 미운 정이라도 든 건지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의미인가 싶다.
그나저나 십인장은 어떻게 됐으려나.
과묵하긴 해도 잔정이 많아 의지할 수 있던 사람이었는데...
바로 눈앞까지 다가온 성문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문은 언제 열려고 아직 안 열었나.
빨리 집에 가서 딸내미 보고 싶은데.
"너 십인장님은 본 적 있냐?"
"아, 네! 며칠 전에..."
쐐애액!
푸욱!
"..."
"...야."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다.
상상도 하지 못한 뜻밖의 상황에 고개가 성벽을 향해 돌아갔다.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라!"
"..."
왜...?
왜 우릴 조준하고 있는 거야.
활 내려. 미친놈들아.
두 손이 덜덜 떨린다.
포승줄에 묶인 손으로 다급하게 젊은 병사를 부축했다.
"야 임마! 정신 차려!"
왼쪽 어깨를 뚫은 화살이 등 뒤로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다행이다.
그래도 심장은 비켜 맞았으니까 죽지는 않을 거야.
의사.
의사가 필요하다.
낡아 헤진 내의가 서서히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자리에 앉혔다. 이 미친놈들이 눈깔을 죄 파먹었을까.
왜 아군한테 화살을 날리고 지랄인가.
그리고 하필 경고의 의미로 날린 화살이 이놈한테 날아온 건가.
"야!"
두 손이 묶인 탓에 손 등으로 뺨을 찰싹 때렸다.
저도 모르게 강하게 들어간 힘 때문인지 흐려졌던 초점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한다.
"정신 차려 임마! 엄살 피우지 마!"
웅성거리는 소음도, 걸음을 멈춘 행렬도 중요하지 않았다.
이곳저곳에서 터지는 고함이 윙윙거린다.
"혀, 형님..."
"죽을 일 아니야! 몸에 작은 구멍 뚫린 거로 죽을 거면 진작 죽었어!"
"아파요..."
"그럼 아프지 안 아파! 심호흡해! 할머니 보러 가야지! 밥 먹고 싶..."
쐐애액!
"끄아악!"
"아악!"
"도, 도망가!"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뭔 놈의 빗방울 이렇게 큰지 맞은 놈들마다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몸을 눕힌다.
저 미친놈들이 결국 화살을 쐈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있던 포로들이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빨리 도망가야 한다.
바로 앞에 가족들이 있는데 여기서 이렇게 개죽음을 당할 순 없다.
그건 그렇고...
"...끝까지 방해야! 끝까지!"
두 손이 묶인 탓에 이놈을 끌고 갈 방법이 없었다.
결국 팔을 넓게 벌려 이놈을 뒤에서 끌어 안았다.
겨드랑이에 두 팔을 끼우니 얼추 안정됐다 싶어 빠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끄흑..."
"참아 임마! 안 죽어!"
두 팔이 들리니 화살에 관통당한 어깨가 고통스러운지 비명을 질렀지만, 그거 봐줄 여유 없다.
공포에 질린 포로들이 자신을 빠르게 지나쳐 갔다.
의리 없는 놈들.
한 명만 도와주면 빠르게 갈 수 있는데.
그나저나 십 분 동안 걸어온 길을 일 분 만에 되돌아갈 줄은 몰랐다.
이 미친놈들.
미친 새끼들.
아군한테 화살을 쏘는 미친놈들.
그때, 무언가 발에 걸려 중심을 잃고 넘어져 버렸다.
"끄윽..."
"아이고... 시발."
이놈을 붙잡고 뒷걸음질을 치느라 땅에 눕힌 시체를 못 봤다.
한 바퀴 시원하게 뒹군 덕에 화살이 부러졌는지 등 뒤로 나온 화살촉이 보이질 않는다.
"그래도 임마. 살려주려다 그런 거니까 고마워해!"
재빠르게 다시 일어나 허벅지에 힘을 바짝 주고 뒷걸음질을 쳤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던 성문이 점점 멀어졌다.
그 잠깐 땅을 구른 사이에 모두 지나쳤는지 눈앞엔 땅에 널브러진 시체뿐이다.
"이 썩을 놈! 운도 지지리 없는 놈아!"
왜 하필 화살을 처맞아서는.
너 때문에 집에 못 가면 죽을 줄 알아.
내가 운이 없는 건지, 이놈이 운이 없는 건지.
이 놈을 딱 오 분만 늦게 만났어도 누구보다 빨리 도망쳤을 텐데.
어쩌다 보니 자신보다 덩치 큰 놈을 끌고 가는 중이다.
쐐애액!
푹!
"크흑..."
이 빌어먹을 자식아.
"형님...?"
"...거 존나게 아프네..."
나도 화살 맞았잖아. 개새끼야.
칼로 왼손을 쑤시는 듯한 고통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정면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막으려고 손을 내밀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정확히 손바닥에 맞았다.
...막은 건지, 맞은 건지.
만약 손으로 못 막았으면 이 모지리 놈의 심장이 그대로 뚫렸을 것이다.
"형님. 괜찮아요?"
"정신 차렸으면 일어나서 니가 걸어 이 미친놈아...!"
"너무 아파요..."
...이 미친 새끼.
운 없는 새끼.
스스로에게 하는지, 이놈에게 하는지 모를 욕을 내뱉고 다시 허벅지에 힘을 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