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 마지막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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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문을 열게 만들 생각입니다."
"스스로?"
"예. 포로로 잡을 제국군을 이용할 생각입니다."
굳이 병사를 나눠 낙오한 제국군을 데려온 이유.
도움이 될 지도, 안 될 지도 모르는 적을 굳이 살려준 이유.
"자세하게 설명해 보시오."
2왕자가 놀란 눈빛으로 말을 재촉했다.
낙오된 제국군을 살리는 것에 반대하던 이들 역시 카인을 바라봤다.
성문 앞에 줄줄이 세워 놓고 잔인하게 처형 시키자는 말이 나오면 신랄하게 물어 뜯을 준비를 하고서 말이다.
운이 좋아 2 왕자의 신임을 한 번에 얻은 놈.
지휘관 막사에 있으면 안 되는 놈이 아비와 스승의 명예에 업혀 기세등등한 놈.
명백한 적의가 서린 눈을 담담히 받아내며 카인이 입을 열었다.
"포로로 잡힌 제국군을 풀어줄 겁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린가?"
막사 안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기껏 힘들게 구해 물과 식량까지 먹인 놈들을 다시 풀어준다니?
2왕자의 눈썹 역시 살며시 모였다.
눈 앞의 젊은 참모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시작은 아니었다.
"...계속 해보게."
그래도 지금까지 기발한 아이디어로 공적을 세운 참모였다.
결국 반대를 하는 일이 있더라도 일단 끝까지 듣고 싶었다.
"포로로 잡은 제국군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뷔른 성 내에 약 삼만 명의 병사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전시체제로 돌입해 외성 밖에 살던 주민들도 모조리 성으로 들어갔으니 인원은 더 많겠지요."
"..."
포로로 잡은 병사들을 모두 풀어주면 이만 오천이 조금 안 된다.
그들이 돌아가 무기를 다시 쥐고 성벽에 올라서면 비상군까지 육만이 넘는 제국군을 상대해야 한다.
점점 더 어두워지는 2 왕자의 표정을 보면서도 카인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병사들 사이에 우리 병사들을 섞어 놓을 겁니다."
"...간첩인가?"
"정확히 말하면 공작요원입니다."
"공작요원?"
"성 내의 식량창고에 불을 지를 생각입니다."
이번엔 다른 의미로 막사 안이 조용해졌다.
아직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의아한 눈빛으로 카인을 바라봤고, 2 왕자 역시 그중 하나였다.
그때, 막사 구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클클클. 식량이랑 원수졌느냐?"
"가장 간단하면서 빠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스승님은 다르다.
벌써 속뜻을 파악한 스승님을 향해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카인 참모. 좀 더 자세하게 말해 보게."
"한 번에 두 가지를 노리는 수입니다."
록셀 자작을 보며 미소짓던 카인이 여전히 의아한 얼굴을 하는 2 왕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두 가지?"
"성이 포위된 상태에서 이만 오천에 육박하는 포로가 한 번에 성으로 몰려옵니다. 왕자님께서 뷔른 성을 지키는 지휘관이라면 성문을 여시겠습니까? 안 여시겠습니까?"
"...!!!"
"그들을 구하기 위해 성문이 열리는 순간 공격이 시작되면 어떻게 막아야 하겠습니까?"
"성문을 안 열면 그만 아닌가?"
"지금 포로로 잡힌 제국군 역시 뷔룬 성의 영주민들입니다. 수만에 달하는 영주민들을 모조리 제 손으로 죽이면 수비병력의 사기가 땅바닥으로 떨어질 겁니다."
"...그것 만으로 우리에게 이득이군."
"또 무사히 포로들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수비 병력에 맞먹는 인원의 포로들을 다시 재무장시킬 방법도 생각해야 할 겁니다. 게다가그 많은 숫자 중에 간첩이 있을지 없을지 알 방법이 없으니 따로 격리시킬 겁니다. 죽을 힘을 다해 전투를 치르고 온 포로들은 불만이 쌓일 겁니다."
"..."
뷔른 성을 두 갈래로 분열시킨다.
포로를 믿지 못하는 수비 병력과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포로들.
2 왕자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음을 느꼈다.
눈앞의 이 젊은 참모는 어디서부터 지금의 상황을 본 걸까.
낙오된 제국군을 봤을 때부터?
주둔지를 기습해 적들의 식량을 모조리 불태웠을 때부터?
아니면... 테레스 산맥을 넘기 전 부대를 나눴을 때부터?
모든 상황이 딱딱 들어맞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모든 작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벌어진 입이 살짝 떨린다.
여전히 평온한 안색을 한 그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머지 한 가지는 무엇인가?"
"뷔른 성을 지키는 수비 병력, 내성에 살던 주민들과 외성에서 피난 온 주민, 거기에 새로 들어갈 포로까지... 식량은 급속도로 고갈될 겁니다."
그제야 2 왕자는 눈앞의 젊은 참모가 공작을 보내는 이유를 깨달았다.
"...거기에 불까지 지르면..."
"알아서 성문이 열릴 겁니다."
혹시 공작이 실패하면?
상관없었다.
시기의 문제일 뿐, 문이 열리는 건 똑같으니까.
지휘관 막사가 침묵으로 잠겼다.
록셀 자작도, 후작도, 그 외의 다른 귀족들 역시 입을 꾹 다물었다.
이 방법보다 아군의 피해가 적으면서 확실한 작전?
있을 리가 없었다.
오직 록셀 자작만이 흐뭇한 얼굴로 자신의 제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를 어떻게 할 생각일까.
괜한 불안감에 반지를 쓰다듬었다.
바로 눈 앞에 자신이 살던 뷔른 성이 보인다.
아내와 딸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분명 성 밖을 나선 부대가 몰살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이곳에서 도망쳐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아직 살아있다고, 울지 말라고 위로하고 싶었다.
"빨리 빨리 움직여라."
후방에서 대기하던 제국군의 포로들이 성 앞으로 불려 나왔다.
불안한 시선들이 사방으로 퍼지다 다시 뷔른 성으로 향한다. 이만이 넘는 포로들이 한 곳에 모인 건 처음이었다.
어느 곳을 둘러봐도 자신처럼 무장이 해제된 채 손이 묶인 포로 뿐이다.
20만이 넘는 왕국군에게 포위된 뷔른 성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인다.
물경 이만이 넘는 포로들이 천천히 성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 포로들 앞으로 마련된 단상 위로 누군가가 올라왔다.
뷔른 성을 등지고 선 그가 포로들을 천천히 쳐다봤다.
자연스레 불안함이 깃든 시선들이 한곳으로 몰린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
젊은 청년이 자신을 포함해 우리들을 둘러봤다.
무슨 말을 하리라.
불안감에 떠는 포로들이 일시에 조용히 침묵했다.
저 사람이 그 사람일까.
주둔지를 습격하고 우리를 살려줬다는 그 젊은 참모일까.
한참을 그렇게 우리를 바라보던 청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고향인 뷔른 성이 보이는가."
포로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의 등 뒤에 있는 뷔른 성으로 향했다.
뛰어가면 불과 십 분도 안 걸릴 거리에 거대한 성문이 보였다.
"삼년 전 우리 왕국 동맹을 먼저 공격한 것은 너희들의 제국, 다나크였다."
"수많은 백성들이 제국의 무자비한 칼날 아래 목숨을 잃었다."
"국토는 황폐화됐고, 살아남은 왕국의 주민들은 굶주림에 허덕이며 죽어갔다."
젊은 참모의 목소리가 넓게 퍼졌다.
단상과 꽤 멀리 떨어진 자신에게도 똑똑히 들려왔다.
성벽 위에서 이곳을 바라보는 제국군들도 그의 목소리가 또렷히 들리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그 일이 그대들의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제국의 욕심으로 가족들과 떨어져 농기구 대신 검을 든 그대들 역시 피해자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
거기까지 이야기한 젊은 참모가 잠시 말을 멈췄다.
수십만이 넘는 시선이 한 점에 쏠렸다. 아무도 말을 꺼내는 이가 없다.
수많은 눈동자가 그의 입을 쳐다봤다.
"...뷔른 성으로 돌아가고 싶은 자가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보내주겠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그러더니 이내 곧, 여기저기서 고함 소리가 퍼졌다.
그 말을 어떻게 믿냐는 사람들.
살려주는 척하면서 등 뒤에서 화살을 쏠 것이라는 사람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는 사람들.
의심과 희망 사이에 선 포로들이 격한 감정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조용."
"..."
연신 반지를 쓰다듬으며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등 뒤로 소름이 끼쳤다.
열 명도 아니고, 백 명도 아니다.
이만이 넘는 포로들, 게다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혼란에 빠진 왕국군 역시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20만이 넘는 인원이 모인 이 평원이 젊은 청년의 말 한마디에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는 걸까.
침묵에 휩싸인 전장을 바라보던 젊은 참모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그대들이 스스로 검을 쥐고 일어나 왕국을 침략했는가."
아니다.
"그대들이 스스로 성 밖을 뛰쳐나와 테레스 산맥으로 걸어왔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대들의 손에 검을 쥐여준 이가 누구인가."
나에게 검을 들게 한 사람.
소중한 가족을 두고 집을 나서게 한 사람.
이만 명이 넘는 포로들이 일제히 한 명을 떠올렸다.
저 멀리 동쪽 수도에서 온 사람.
무려 만기가 넘는 기병과 함께 뷔른 성으로 찾아온 사람.
그와 동시에 단상 위로 누군가가 질질 끌려 나왔다.
붉은색과 황금색으로 칠해진 화려한 갑주.
두꺼운 갑주로도 가릴 수 없는 투실한 살집.
"...!"
이만이 넘는 포로들은 모두 눈을 부릅 뜰 수 밖에 없었다. 그 누구 하나 말을 꺼내는 이가 없었다.
감히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었던 그 고귀한 혈족이 산발이 된 머리를 붙잡혀 자빠져있다.
두 눈을 비비고 확인해도 자신들을 이끌던 제국의 황자가 맞다.
설마...
"다나크 제국의 황자. 그대에게 모든 죄를 물어 이 자리에서 참하겠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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