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05화 (105/191)

〈 105화 〉 신뢰

* * *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죽어서도 두통을 겪나 싶었지만, 죽어본 적이 있어야 알지.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몸이 흔들거렸다.

어디 저승 가는 수레라도 탄 걸까.

눈꺼풀을 쑤시는 햇빛에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뭔 놈의 저승에 해도 있나 싶어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죽은 게 맞긴 한가보다.

기절하기 전까지 덜덜 떨리던 팔이 부드럽게 들렸다.

그때 비하면 힘이 넘치는 게 한숨 푹 자고 일어난 기분이다.

부우­­­­

벌떡!

"뭐, 뭐야!"

세상에 어떻게 저승에서도 뿔피리 소리가 나는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으켜 소리를 질렀다.

"..."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늘 보던 익숙한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서둘러 배를 쓰다듬었다.

칼침 맞은 흔적이 있나 싶어 갑주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맨들거리는 게 아무 이상이 없다.

"이제 정신 차렸수?"

"..."

"아직 정신 못 차렸구먼. 클클."

"...어떻게?"

어떻게 제국군 복장을 한 병사들이 눈앞에 있지?

죄다 죽어서 저승 가는 길인가?

"거기, 몸 좀 회복됐으면 일어나라."

"아, 예. 알겠습니다."

자신을 보며 웃던 병사가 누군가의 말에 수레에서 천천히 일어나 내려섰다.

"...!"

"너도 움직일 만 하면 수레에서 내려서 걸어라. 태울 사람이 한가득하다."

자신을 보며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는 왕국군의 병사를 한참이나 빤히 쳐다봤다.

죽은 게 아니라고?

저승사자가 고약한 취미가 있어 변장한 게 아니라면 그게 맞았다.

그제야 초점이 맞으며 주변 광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자신처럼 수레에 몸을 눕힌 병사들.

그리고 그 수레 뒤를 쫓아오는 제국군들.

사이사이 섞여 있는 왕국군의 병사들.

한 대가 아니었다.

수십 대가 넘는 수레가 앞에도, 뒤에도, 옆에도 있었다.

"제가... 죽은 게 아닙니까?"

"죽이면 우리도 편하긴 했을 거다."

"..."

당당할 정도로 솔직한 말이었다.

포로인지 아닌지 모호한 놈들을 통솔해야 하는 입장으로썬 영 불편한 명령일 것이다.

"저희는 어디로 갑니까?"

"우리가 지금 어디 갈 거 같은데?"

"..."

뷔른 성밖에 더 있나.

자신도 모르게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쓰다듬었다.

"이제 슬슬 일어나. 너 말고 탈 놈들이 한가득이라니까."

그 말과 동시에 수레가 이동을 멈추더니 쫓아오던 제국군들이 달려들어 땅바닥에 널브러진 또 다른 제국군을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익숙하게 입 안으로 물을 흘려 넣었다.기절을 한 건지 안 한 건지, 그 와중에도 수레에 실린 병사가 목을 껄떡인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그제야 모든 일을 깨달았다.

나도 저놈들처럼 수레에 실려 왔구나.

부우­­­

기상나팔 같은 그 우렁찬 소리에 저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직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힘차게 일어나놓고 다시 주저앉기는 뭐해서 수레에서 내려왔다.

그러고 보니 허리춤에 찬 검이 안 보인다.

반년 넘게 모아둔 비상금으로 맞춘 놈인데 누가 털어갔나 주변을 둘러보다 말았다.

목숨값 대신 치렀다고 생각하면 그것보다 싼 게 없다.

"클클. 이제 정신 좀 차렸소?"

"영락없이 저승길 동무인 줄 알았소."

방금까지 수레에 같이 타고 있던 병사가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생각해보니 이 자도 일어난 지 얼마 안된 주제에 자신에게 꺼드럭거린 셈이다.

한 마디 할까 하다가 다시 얻은 목숨 너그럽게 살자 싶어 입을 다물었다.

"그나저나... 우리를 어쩌려고 이렇게 데려가는지 모르겠소."

"..."

"우리를 줄 세워놓고 뷔른 성을 불태우는 걸 보여주려고 그러나?"

"뭐?"

딸은?

그리고 내 아내는?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

땅바닥에 돌멩이를 집어서라도 그건 막아야 한다.

갑자기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눈 앞에서 가족들을 잃는 걸 보느니 다시 한번 죽고 말 것이다.

"쓸데없이 상상력이 풍부하군. 우리가 굳이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있나?"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옆에서 듣고 있었는지 에어로크 왕국군의 복장을 한 병사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옆의 병사를 바라봤다.

"물도 먹이고 수레에도 태워줬더니 한다는 소리가."

"..."

"몸 성히 집에 가고 싶으면 헛소문 퍼트리지 마라."

"...!!! 집에...! 집으로 보내주시는 겁니까?"

눈이 번쩍 뜨인다.

집에 보내준다고?

아직도 전쟁 중인데 어떻게?

아니 왜?

그러나 왕국군의 복장을 한 병사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을 이었다.

"나도 몰라. 그냥 위에서 시키니까 하는 거지. 너희들 뒤치다꺼리 하는 게 피곤할 뿐이야."

"..."

부우­­­­

그때, 모든 수레가 천천히 움직임을 멈췄다.

저 멀리 작은 숲이 하나 보인다.

저기서 하루만 더 가면 가족들이 있는 뷔른 성이 보인다.

부우­­­­

뿔피리 소리의 간격이 짧아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궁금했지만, 수많은 인파 때문에 도통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앞에서 무슨 일이 있습니까?"

결국 궁금증이 치밀어 아까부터 여유롭게 앞을 바라보던 왕국군에게 물었다.

"목마른 사슴들이 독을 푼 우물에 다가간거지."

"..."

그건 또 무슨 소리인지. 뜬구름 잡는 소리에 어안이 벙벙하다.

"계곡 입구에 우리 부대가 잠복하고 있었거든. 버티고 버텨 물을 마시러 왔는데, 물 대신 칼이 기다리고 있는 거지."

여유롭기까지 한 그의 말에 주변에 있던 모든 제국군의 시선이 쏠렸다.

경악이 가득한 눈빛을 즐기던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더 재미있는 거 알려줄까? 저기 숲 속에 대기 중인 부대는 무려 삼 일 전에 미리 출발한 부대였다. 너네들 주둔지가 불탈 때부터 준비된 작전이라고."

"..."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수레에 앉아있는 병사도, 가만히 서있는 병사도 등줄기를 훑는 소름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만약 기절하지 않았다면?

탈진해서 낙오하지 않았다면?

"이게 다 스무살이 갓 넘은 참모님의 머리에서 나온 거다. 너네를 살리자고 의견을 낸 것도 그분 의견이고. 다음에 만나면 고개숙여 인사해라."

침묵만이 내려앉은 초원에서 왕국군 병사 홀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 모습은 제국군이 모여있는 수레 곳곳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다.

­­­­­­­­­­­

"기가 완전히 죽었습니다. 원래 저항할 기미도 안 보였는데, 이젠 완전히 굴복한 모습입니다."

"다행입니다."

혹시나 포로로 잡힌 제국군이 시위를 하거나 반항하면 어쩌나 싶어 병사들을 시켜 소문을 퍼트리고 비명이 터져 나오는 숲을 보여줬다.

이래도 안 통하면 방법이 없었기에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잘 해결된 듯 싶다.

제국군이 도망간 숲은 여전히 비명소리와 아우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금방 끝날 것이다.

삼일 동안 푹 쉰 로그멜 경과 중갑 보병이 이를 갈며 기다리고 있었고, 뒤에선 20만이 넘는 왕국군이 숲을 파고들었다.

고작 일만이 겨우 넘는 제국군이 상대하기엔 불가능한 수였다.

내가 한 일은 여기까지 오며 탈진해 쓰러진 제국군을 줏은 것 밖에 없었다.

그 수가 이만이 넘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결국, 점심 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성 밖을 뛰쳐나왔던 제국군은 모조리 소탕됐다.

기병 일만, 보병 삼만 중 기병 삼천, 보병 이만을 포로로 붙잡았다.

아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삼일 동안 밥도, 물도 먹지 못한 채 숲까지 뛰어온 그들이 계곡 앞에서 튀어나온 로그멜 경의 부대를 보고 전의를 상실한 것은 당연했으니 말이다.

"놔라! 내가 누군지 아느냐!"

한 가지 문제는, 저 놈이 문제였다.

제국의 4황자라는 대어가 얼결에 잡히는 바람에 에어로크 왕국의 지휘부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차라리 풀어주는 건 어떻습니까?"

"그냥 풀어줄 수는 없소. 그를 포로로 잡고 있는 것만 해도 충분히 무기가 되지 않겠소?"

"혹여나 제국이 복수를 하겠다며 주력군의 방향을 바꾸면 저희는 큰 피해를 입어야 합니다."

"그럼 헤르트는 편해지지 않겠소?"

"저희는 불편해지겠지요."

"으음..."

2왕자와 어느 백작의 대화가 끝나자 지휘 막사가 다시 침묵으로 휩쌓였다.

놓아주자니 아쉬웠고, 죽이자니 훗날이 신경 쓰였다.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오! 카인 참모! 무엇이든 말해 보게."

"..."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2왕자의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저 4황자라는 놈 말고 개인적으로 한 가지 문제가 더 생겼는데, 그건 2왕자의 지나친 신뢰였다.

후작과 스승님의 눈엔 벌써부터 기대로 가득 차오른 상태였다.

내가 무슨 말을 꺼내든 박수를 치며 환호할 것이다.

둘 뿐만이 아니다.

지휘관 막사 내에 있는 수많은 귀족들이 신뢰의 눈을 보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작전이 지나치게 성공한 것도 문제다.

"죽이는 게 옳다 생각합니다."

"호오! 이유는?"

"우리 왕국의 무서움을 겪은 사람입니다. 풀어주면 분명 더 단단히 준비를 하고 돌아올 것 입니다. 훗날 큰 방해가 될 지도 모릅니다."

"옳습니다."

대답은 후작의 입에서 나왔다.

막사 내의 시선이 일시에 쏠렸지만 후작은 상관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테레스 산맥의 척후병을 처리해 하산을 안전하게 성공시키고, 기병 오천을 전멸시킨데다가, 방어선을 뚫어낸 것도, 주둔지를 불태운 것도, 숲속에 부대를 미리 준비시킨 것도 모두 카인의 머리에서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렇지요!"

스승님의 맞장구에 더 신이 난 후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카인이 아니었다면 적들은 안전하게 성까지 후퇴해 성을 단단히 틀어막았을 겁니다. 그러니 분명 이번 의견도 훗날을 보고 있는 큰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

후작의 열변이 끝나자 다른 의미로 막사 안이 침묵으로 맴돌았다.

나를 바라보는 지휘관들의 시선이 점점 더 뜨끈해진다. 낯 뜨거운 올려치기에 얼굴에 피가 쏠렸다.

"...게다가 낙오한 제국군을 챙겨 뷔른 성을 점령한 이후의 일까지 생각하고 있지."

말을 이어받은 2왕자까지 뜨거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건 좀 효과가 강한데.

이러다 구슬을 못 써먹는 날이 오면 어떡하나 싶어 시선을 돌렸다.

물론 주둔지를 불태운 일이나, 낙오한 병사들을 챙긴 건 머리 속에서 나온 일이긴 했다.

"카인의 의견에 따라 4황자를 처형하겠소. 혹시 다른 의견 있소?"

2왕자가 혹여나 하는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봤지만, 입을 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왕자의 뜨거운 눈빛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한 귀족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럼 이제 성을 공략해야 하는데... 카인 참모. 좋은 의견 있나?"

그렇게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면 어떻게 말하라는 건가 싶다.

누르면 나오는 만능 주머니가 아닌데.

이거 이제 평범한 작전은 꺼낼 수도 없게 됐다.

이번엔 한 번 실패해야 하나...?

아니다.

어떻게 얻은 발언권인데.

잠깐 생각을 정리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스로 문을 열게 만들 생각입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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