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 결혼반지
* * *
"..."
부대를 운용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첫째도 사기, 둘째도 사기, 마지막으로 셋째도 사기 아닐까.
그렇다면 사기를 유지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처음으로 부대를 지휘하는 4황자는 그 방법을 알 것 같았다.
"병사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사흘을 더 가야 하는데... 방법이 필요합니다."
막사도 없었다.
쏟아질 듯한 밤하늘을 지붕 삼은 제국의 지휘관들은 묵묵히 진땀을 뻘뻘 흘리는 부관의 말을 들었다.
"해결할 방법이 있으니 그 말을 꺼냈겠지."
"..."
해결할 방법이 뭐가 있겠는가.
한두 명도 아니고 삼만이 넘는 대부대를 먹일 식량을 구하는 건 인간의 능력 밖이었다.
그때, 황자의 눈치를 보던 뷔른 백작이 살며시 입을 열었다.
"...뷔른 성으로 전령을 보내 식량을 준비 시키겠습니다. 수성을 위해 준비한 식량이 있으니..."
"전령이니 빠르게 간다 치고... 가는데 이틀, 준비하는데 하루... 성문이 열리고 식량이 나오기 시작할 때 우린 도착하겠군."
"..."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뭔지 아는가?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이 오늘 밤부터 탈영을 할텐데... 방법은 있는가?"
먹을 건 죄 불에 타버렸는데 다들 어디서 꿀을 구해다 처먹었는지 벙어리가 된 모습에 4황자는 다시 분노가 치밀기 시작했다.
"열 명도 넘게 모인 자리에서 변변한 전략 하나 안 나오는군."
"...빠른 후퇴가 답인 듯 합니다."
참 쓰잘때기 없는 소리였다.
누가 그걸 모르는가?
타국과의 국경을 다스리는 변경백이 백작일 때부터 알아봤다.
알만 왕국과 붙은 영지도, 헤르트 왕국과 밀접한 영지도 그 일대를 다스리는 변경백은 후작위였다.
4황자는 눈 앞의 뷔른 백작을 찢어 죽이고 싶었다.
오천의 기병을 모두 잃은 것도, 주둔군이 불에 탄 것도 모두 그의 잘못이었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저, 능력이 부족해 백작에 불과한 변경백 때문에 모든 일을 그르쳤다는 생각만 머리 속에 맴돌았다.
부우
"..."
"..."
나무 한 포기 없는 넓은 초원 어디선가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상념에서 깨어난 4황자가 이를 꽉 깨물자 볼살이 푸드득 떨린다.
아무렇게나 앉은 병사들 사이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특히 가장자리에 앉아있는 병사들은 금방이라도 달아날 듯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 개자식들...!"
결국 4황자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종일 저 상태였다.
종일.
차라리 시원하게 전투라도 했으면 좋겠다만, 저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라오기만 할 뿐 덤빌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밥도 안 먹고 쫓아오는 건가?
우리야 먹을 밥이 없어 점심 시간이 없다지만, 저들은 멀쩡히 식량이 있지 않은가.
후퇴가 시작된 점심 시간에도, 해가 떨어진 저녁에도 도통 떼어낼 수가 없었다.
"이만 슬슬 움직여야 할 듯 합니다."
"..."
막사가 없으니 말만 타면 이동이었다.
식량 수레도 없고 말들을 먹일 건초 더미도 없으니 준비도 빨랐다.
부우
속이 쓰렸다.
저 소리에 속이 쓰린 건지 종일 굶어 속이 쓰린 건지.
"...그래도 뷔른 성과 하루 거리에 작은 숲이 있으니 그 곳에서 물과 간단한 과일을 챙길 수 있을 듯 합니다."
"병사들이 마실 물은 지금 있소?"
"각자 구비한 수통이 있으나... 보병들은 모두 이곳에서 자란 제 영주민들이기에 이틀 동안 물을 구할 방법이 없음을 잘 알 겁니다. 알아서 조절해 마실 겁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만 명이 물을 마시고 과일을 따려고 움직일게 뻔했다.
그렇다고 모두 통제하자니 병사들이 반발할 것도 불 보듯 뻔했다.
"불가하오."
"예?"
"그 숲은 곧바로 지나칠 것이오.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니 비밀로 하시오."
"병사들이 통제에 따를 지가 걱정입..."
"저 빌어먹을 왕국군이 무엇을 노리는지 나는 알겠는데... 백작은 아직 모르겠소?"
또 시작이었다.
다시 시작된 4황자의 교묘한 비꼼에 뷔른 백작의 안색이 살짝 벌게졌다.
"아무튼, 숲은 그대로 통과할 생각이니 부대 통제 똑바로 하시오. 그 후로 하루 거리에 성이 있으니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것이오."
"...알겠습니다."
3만의 병사들이 물을 마시고, 과일을 찾아 헤매는 그때 왕국군이 쳐들어오리라.
뻔한 속셈이었다.
그 숲에서 하루만 더 가면 뷔른 성에 도착한다.
한번 걸어 잠그고 나면, 총 5만의 군대가 수비하는 거대성을 쉽사리 뚫지 못하리라.
3일쯤 굶는 거야 어쩔 수 없었다.
설마 죽기야 하겠는가.
말 안장에 걸린 수통을 들어 벌컥벌컥 마신 황자는 주변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진군을 명령했다.
그러나, 낙관적이던 황자를 비웃기라도 하듯 채 하루가 되지 않아 문제가 발생했다.
"병사들이 탈진하고 있습니다. ...물이 시급합니다."
무거운 갑주를 입고, 하루 종일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게다가 밥도 못 먹고 물까지 없으니 병사들이 빠르게 탈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생각보다 탈영병의 숫자는 적었지만, 이 넓은 초원에 뷔른 성 말고는 갈 곳이 없는 게 한몫했을 뿐 병사들의 사기가 유지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근처 계곡도 없소?"
"넓은 초원이라 딱히 없습니..."
"그럼, 다 아는 사실을 굳이 꺼내는 건 무슨 이유인가?"
"..."
황자는 충분히 예민한 상태였다.
살면서 이틀 이상 굶어본 적이 없었기에 배에서 요동치는 굶주림과 쓰라림은 익숙한 그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자신이 마실 물도 떨어져 가고 있었다. 아직 뷔른 성까지 이틀은 더 가야 하는데... 황자는 모든 일이 눈 앞의 백작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굳이 꺼내는 이유가 뭐냐고 묻지 않았소!"
결국 황자는 언성을 높였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어 미칠 것 같았다.
"오천의 기병을 모조리 잃은 것도! 주둔지가 모두 불에 탄 것도! 테레스 산맥을 지키던 척후병들이 모두 죽은 것도 백작 탓 아니오!"
"황자님..."
"이래서 변방의 무능한 놈들이 안돼!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지 않소! 성공한 작전이 있기는 하오?"
"..."
"그래놓고는 중앙 정계 진출? 꿈이 너무 큰 거 아니오?"
황자의 마지막 말에 뷔른 백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사람들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천막 하나 없이 허허벌판에서 회의를 하는 턱에 많은 병사들이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안 그래도 바닥을 치던 사기가 더 떨어질 것은 자명했다.
자신들을 버리고 수도로 올라간다고 했을 때 이곳의 병사이자 영주민들인 이들이 받을 배신감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 말을 꺼냈는가.
적어도 전쟁이 끝나고 직위 변경 같은 허울로 빠져나가야 할 일이었다.
주변의 부관들 역시 아연실색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봤다.
다 끝났다.
이젠 병사 뿐만 아니라 부관과 참모들도 명령에 따르지 않을 것이 당연했다.
이 넓은 초원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든 시선이 자신과 황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고 말이나 좀 해보시..."
그제야 주변 상황을 파악한 걸까.
열을 내던 황자가 이상한 눈치에 입을 다물었지만, 나올 말은 다 나왔다.
싸늘한 침묵을 깨는 건 이번에도 역시나 뿔피리 소리였다.
부우
...저 망할 놈들.
부우
우리 딸이 보고 싶네.
부우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반지는 빼고 올걸.
세간살이 보탬이라도 될 텐데.
허리춤에 걸린 검이 영 불편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매듭을 풀어보려 했는데 잘 안된다.
한참을 끙끙대다 저승 가는 길에 내 몸 지킬 무기는 하나 있어야지 싶어 손에 힘을 탁 풀었다.
아까부터 시야가 침침하다.
하늘에서 쏟아질 듯 매달린 별들이 오늘 따라 유난히 밝다.
부우
저 놈의 뿔피리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진다.
죽기 전에 저 놈들 얼굴이나 보고 싶었다.
이틀 동안 죽어라 쫓아오며 나팔을 불어제끼는데, 영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바짝 마른 혓바닥을 억지로 움직였다.
남쪽 파딘 제국 어디엔가 있다는 사막을 입 안으로 옮겨 놓은 기분이다.
잠시 그러고 있으니 조금 정신이 드는 것도 같아 땅바닥에 대고 있던 고개를 간신히 들어 올렸다.
부우
소리 한번 지랄 맞게 크다.
한 맺힌 귀신 마냥 청승맞게 울던데 가까이서 들으니 그것만큼 힘찬 소리가 없었다.
잠깐 의식을 놓았는지 어쨌는지 깜짝 잠이 든 것도 같은 시간이 흘렀을 때, 엄청난 진군소리가 귀를 때렸다.
땅이 울리는 기분이다.
수만, 아니 수십만의 부대가 정확한 발걸음으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죽나 보다.
내 옆에도, 저 위에도, 그리고 한참 전부터 낙오했던 병사들이 보인다.
텅텅 빈 포대자루 뭐라도 들었나 푹 찔러보듯 배때지에 푹 찌르고 지나갈 거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소설 속의 영웅처럼은 아니더라도 그 옆에 조연처럼 멋지게 싸우다 죽을 줄 알았다.
스스로가 영웅감이 아니라는 건 잘 알지만, 남자라면 그 옆에 조연 정도는 꿈 꾸지 않겠는가?
이렇게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다가 칼침 맞고 죽을 놈이 무슨 빌어먹을 조연.
물 며칠 못 마셨다고 탈진했을 때부터 이런 운명이 기다리고 있던 거다.
부우
정말 드럽게도 크다.
땅을 울리는 진군소리보다 저 뿔나팔 소리가 더 거슬렸다.
눈이 점점 더 침침해졌다.
적어도 인생의 마지막은 직접 겪고 싶었는데.
약지에 끼인 결혼 반지를 쓰다듬었다.
덜덜 떨리는 손이 반대 손을 간지럽힌다.
미안해.
그래도 이런 모습으로 죽는 걸 안 보여줘서 다행이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완전히 암전됐다.
넓은 초원 여기저기 널브러진 제국 병사 중 하나가 그렇게 까무룩 기절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