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03화 (103/191)

〈 103화 〉 뿔피리(2)

* * *

남으로는 에어로크 왕국, 북으로는 다나크 제국을 연결하는 테레스 산맥은 간헐적으로 출몰하는 몬스터 때문에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끊어진 곳이었다.

가축 방목을 위해 목초지를 찾아다니는 다나크 제국 변방에 사는 유목 민족들에겐 더없이 좋은 땅이었으나, 몬스터의 출몰로 가축에 피해를 본 이후 그마저도 발걸음 뜸한 지역이 됐다.

땅은 넓었고, 갈 곳 역시 많았다.

버려진 땅.

몬스터 산맥.

테레스 산맥을 칭하던 말이었다.

그런 조용한 곳에서, 온통 녹색으로 칠해진 테레스 산맥의 초입이 붉은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전진해라! 앞으로 나가야 산다!"

"막아라! 밀리면 끝이다!"

산맥의 초입에서 밀고 밀리는 격렬한 전투가 한참이었다.

여전히 산맥을 빠져나오지 못 한 왕국 군은 어떻게든 전선을 앞으로 밀어 압도적인 수로 제국군을 밀어내려 했다.

반대로 제국군은 기병과 보병으로 산맥의 입구를 틀어막고 왕국군의 전진을 막아내는 중이었다.

"지그하르트 후작! 원군은? 아직 소식이 없소?"

왜 이렇게 안개가 짙은 것인가.

왕국군을 지휘하는 에어로크 왕국의 2왕자는 답답함에 후작을 바라봤지만, 그 역시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2왕자보다 더 조급한 마음이었다.

제국군과 충돌하기 전 5천의 기병이 오른쪽으로 달려갔다. 2만의 중갑 보병과 1만의 경보병으로 막기 버거운 수였다.

불과 1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터인 데, 기이할 정도로 짙은 안개에 전장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2왕자보다 더 몸이 달아오른 후작이 급하게 입을 열었다.

"산을 돌아 따로 전령을 보내겠습니다."

"아니오. 해가 떴으니 곧 안개가 사라질 것이오. 지금도 점점 옅어지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는 게 어떻소?"

"...알겠습니다."

침착하자.

아들이라면 분명 무슨 수를 썼을 것이다.

헤르트에서 이미 13만에 달하는 제국군을 모조리 괴멸시킨 천재였다.

"괜찮을 겁니다. 카인이라면 분명 다른 수를 썼을 겁니다. 늘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옆에서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록셀 자작의 말에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2왕자의 말대로 안개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한 시간 이내로 모두 걷히리라.

"..."

그럼에도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식이 위기에 빠졌는데 걱정이 안 될 부모가 있는가.

후작은 시선을 돌려 전방을 바라봤다.

조금이라도 빨리 안개가 걷혀 자식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다 되어 가도 안개는 도통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산 위에서 내려오는 운무가 계속해서 산맥 끝자락에 안개를 형성하고 있었다.

가만히 전방을 바라보던 후작은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제국군도 많이 지쳤을 겁니다. 제가 후방의 병사를 이끌고 직접 돌파해 보겠습니다. 한 번 돌파하면 그 이후론 수월할 겁니다."

"후작께서 직접? 괜찮으시겠습니까."

"적들의 기마도 점점 지치고 있을 겁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그래도 위험하다.

산맥을 넘어오느라 지친 병사들로 무리하게 방어선을 돌파하다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후작의 강렬한 눈빛을 받은 2왕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몰라도 정치는 알았다.

귀족들은 그 행동과 말솜씨에 비해 옹졸한 면이 있어 원한을 사면 피곤한 일이 많았다.

귀족들이 저 눈빛을 보낼 때에는 그것이 옳은 길이든, 아니든 고개를 끄덕이는 게 상책이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왕국 남부를 꽉 잡은 자다.

차라리 같은 편이 됐으면 됐지, 굳이 척을 질 필요는 없었다.

"...알겠소. 후작의 뜻이 그러하니 허락하오. 대신 후작의 안위를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오."

"감사합니다."

그러나, 거절의 말은 뜻밖의 입에서 나왔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몸을 돌려 곧바로 전방으로 향하려던 후작을 붙잡은 건 계속해서 전장을 바라보던 록셀 자작이었다.

순식간에 주변이 싸해졌다.

"어, 어르신..."

주변에 있던 지휘관들과 부관들이 아연실색했다.

최고 지휘관인 2왕자도 허락한 마당에 일개 관직도 없는 그가 나설 상황이 아니었다.

2왕자 역시 불쾌한 얼굴이었다.

후작의 요청을 받아준 것도 그에겐 이미 충분한 인내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후작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카인이 걱정되지도 않는단 말인가.

거진 두 시간째 연락이 없다는 것은 분명 일이 생긴 것이 틀림 없었다.

그래도 대륙의 책사이자 아들의 스승이다. 치솟은 화를 억누른 후작이 록셀 자작을 바라봤다.

주변의 풍경에도 여전히 그는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아니, 옅은 미소까지 지은 모습이 혼자만 꽃밭에 들어앉은 표정이다.

여유롭게 주변을 바라보던 록셀 자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쪽을 보십시오. 뭔가 보이지 않습니까?"

"...?"

느긋하지만 강렬한, 힘이 넘치는 목소리에 좌중의 시선이 모두 전장의 오른편으로 향했다.

"!!!"

"카인이 왔습니다. 어떻게 오천의 기병을 전부 물리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시간도 안 돼 전부 해치운 듯합니다."

후작은 전율이 도는 것을 느꼈다.

흐릿한 안개 사이로 휘날리는 깃발이 보인다.

아들이 왔다.

도대체 어떻게?

겨우 삼만도 안 되는, 게다가 일반 보병은 작전을 위해 따로 뺀다고 했다.

이만에 불과한 중갑 보병으로 어떻게 오천의 기병을 전부 해결했는가.

"지금이오! 병사들에게 원군이 왔다는 사실을 알리고 총력전을 펼치시오!"

맞다.

이럴 때가 아니다.

후작은 아까보다 몸이 더 달아오른 느낌이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오른편을 돌파해 방어선을 벗기겠습니다."

방금 전보다 몇 배는 더 강렬한 눈빛이다.

2왕자는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아들 사랑이 강한 후작의 모습에 2왕자의 눈이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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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이제 슬슬 전선을 뒤로 물리시는 게 어떻습니까."

"벌써 말이오?"

"왕국의 병력이 20만이 넘습니다. 충분히 이득을 봤으니 이제 슬슬 성으로 돌아가셔서..."

"그건 틀렸소."

"예?"

"옆을 돌던 왕국군을 모조리 무찌르고 곧 나머지 오천의 기병이 돌아올 텐데 굳이 지금 돌아갈 필요가 있소? 아직 피해를 더 줄 수 있다는 말이오."

"..."

그 기마병이 돌아올 시간이 지났다는 말을 꺼내려던 뷔른 백작은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삼켰다. 이미 몇 번 그의 눈 밖에 났기에 조심스러웠다.

혹시나 그 말을 꺼냈다 오천의 기병이 돌아오면, 4황자에게 찍혀 평생 중앙 정계 진출은 물거품이었다.

"그나저나 기병대가 도통 돌아올 생각이 없군."

뷔른 백작은 황자의 혼잣말이 정말 반가웠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때마침 좋은 타이밍이었다.

"이미 정찰병을 보내놨습니다. 금방 소식을 가지고 돌아올 것입니다."

"자네가 그렇게 자랑하던 그 척후병들?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군."

"..."

노골적인 비꼼이었지만 백작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전력을 다해 키워낸 척후병들이었는데 왕국군의 샛길 하나 파악하지 못했었다.

오늘 새벽 옆에서 나타난 왕국군에 얼마나 놀랐었는가.

아침부터 한 차례 질책을 받았던 뷔른 백작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나마 시야에 가린 기병으로 왕국군을 급습한다는 작전은 꽤 괜찮았소. 그대도 쓸데가 있군."

"...감사합니다."

"여튼 기병이 돌아오면 지금보다 강하게 적들을 몰아칠 것이니 그렇게 아시오. 이 참에 저들에게 제국의 무서움을 보여줘야겠소."

뷔른 백작은 숙였던 고개를 더욱 숙이며 대답했다.

중앙에 진출할 수만 있다면 이런 모욕쯤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숙였던 고개가 미처 올라오기도 전에 들려온 소식에 뷔른 백작은 눈앞이 캄캄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기병은 안 오고... 왕국군이 오고 있다고?"

소식을 가져온 전령은 설마 황자에게 직접 보고를 할 줄은 몰랐기에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갈 것 같았다.

게다가 평소에 보고를 받던 뷔른 백작의 안색은 창백했고, 보고를 받는 황자의 얼굴은 흉신악귀처럼 붉은 상태였다.

"야, 약 일만여 명의 부대가 접근 중입니다."

"기병은? 기병대는 어떻게 됐나?"

"...기, 기, 기병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왕국군의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돌아오는 길입니다."

"..."

잘못이 없음에도 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실시간으로 수명이 깎이는 듯한 이 기분에 전령은 차라리 기절하고 싶었다.

그만큼 4황자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

4황자는 분노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어떻게 모은 기병인가.

오천의 기마로 적들을 모조리 주살하겠다며 호언장담을 하고 차출한 병사들이었다.

기병을 모두 잃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병사를 빌려준 귀족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그 보상금을 마련하려면 눈앞의 이 버러지같은 백작놈의 재산을 모두 환수해도 턱없이 모자랄게 뻔했다.

"...이익! 어떻게 할 거냐고 묻고 있지 않소!!!"

결국 분노로 이성을 잃은 4황자가 뷔른 백작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고, 고정 하시지요. 우선 다가오는 왕국군을 상대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생각할 게 뭐가 있소! 방어선을 물러야지! 앞뒤로 들이닥치는 왕국군을 무슨 수로 상대 하겠소! 이젠 그것까지 내가 설명해야 하는가!"

괜히 말을 돌리려다 괜히 화만 돋군 뷔른 백작은 허겁지겁 부관을 불러 철수를 하달했다.

기병은 기병이고 피같은 자신의 3만 병사를 살리려면 지금이 유일한 기회였다.

후퇴를 알리는 전투 북이 전장에 울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방어선을 구축하던 제국군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쫒지마라! 전열을 갖춰라!"

후퇴하는 제국군을 쫓기엔 병사들의 체력도,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밤을 꼴딱 새며 무리하게 산맥을 넘어온 탓에 더 이상 전투를 이어갈 상황도 아니었다.

일사분란하게 빠지는 제국군을 바라보며 에어로크 왕국의 지휘관들이 부대를 정비했다.

어차피 뷔른 성으로 곧장 빠질 테니, 휴식을 푹 취하고 진군을 할 생각이었다.

"카인!"

"아버님!"

"무사해서 다행이다! 어디 다친데는 없느냐? 그것보다 기병은 어떻게 해치웠느냐?"

지그하르트 후작이 다가온 아들을 강하게 껴안았다.

죽은 아들을 다시 보는 기분이다.

혹시나 어디 다친 곳은 없나 이곳저곳을 바라봤지만, 조금 피곤해 보일 뿐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지금 바로 제국군을 쫓아야 합니다."

"뭐?"

"지금 2왕자님을 봬야 합니다."

전쟁터에서 만났는데 자신의 안부도 묻지 않고 본론부터 꺼내는 아들에게 서운한 감정이 들었지만 표정이 너무 급해 보였다.

"따라오거라."

지금은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야 할 때다.

몸을 돌려 아들을 안내했다.

하지만 절로 두근거리는 심장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길래 2왕자님을 봬야 한다는 걸까.

항상 사람을 놀래키는 재주를 지닌 아들이 어떤 일로 자신을 놀라게 할지 궁금했다.

"무슨 일인지 알려줄 수 있느냐?"

"이야기가 꽤 깁니다. 가서 한 번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알겠다."

망할놈 같으니.

2왕자 앞에서 자식 자랑좀 하려 했더니 자신도 왕자와 같이 놀라게 생겼다.

이래서 아들 키워봤자 쓸데없다는 소리를 하나.

­­­­­­­

"...이게 무슨 일인가."

"..."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나! "

4황자의 성난 음성에도 뷔른 백작은 할 말이 없었다.

뭐 아는 게 있어야 말을 하지 않겠는가.

"왜 우리 주둔지가 모조리 불타버린 건가! ...도대체 언제!!!"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주둔지가 완전히 잿더미가 됐고, 수백이 넘던 지원부대는 모조리 몰살당한 채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 이럴 때가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빨리 후퇴를..."

그러나 뷔른 백작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뿔피리 소리에 말을 끝맺을 수가 없었다.

저 멀리, 테레스 산맥이 있는 남쪽에서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옅은 안개를 뚫고 오는 그 은은한 뿔피리 소리에 황자도, 뷔른 백작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침까지 순조롭던 분위기가언제부터 꼬여가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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