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02화 (102/191)

〈 102화 〉 뿔피리

* * *

"크아악!"

"밀러!"

제5 중갑 보병대를 지휘하던 부관, 케일은 쓰러진 병사에게 재빠르게 다가갔다.

그의 오른팔이 짧다.

창을 쥔 오른팔이 흙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다.

몸이 반 토막 나는 것보단 백 배 낫다.

피가 줄줄 새는 팔을 휘저으며 비명을 지르는 밀러의 목덜미를 붙잡고 방진 안으로 잡아당겼다.

"밀러! 정신 차려라! 괜찮아!"

끔찍한 고통에 의식을 잃어가는 밀러의 필사적으로 뺨을 때렸다.

지금 정신을 잃으면 챙겨줄 사람도 없다.

"좀만 참아! 조금만 있으면 원군이 올...!"

"끄아악!"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등 뒤에서 또 다른 비명이 들려왔다.

케일은 주저 없이 밀러를 부축하던 손을 놓고 몸을 돌렸다.

"한스!"

수염이 덥수룩하던 그의 입가가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서둘러 다가가 그 역시 뒤로 잡아끌었다.

목을 베인 듯 덜렁거리는 머리가 뒤로 뒤집히며 피가 솟구친다.

얼굴에 피를 잔뜩 맞은 케일이 침착하게 얼굴을 닦아냈다.

"방진을 좁혀라! 간격을 메꿔!"

이탈자가 생기며 사각형으로 만들어진 방진이 점점 작아졌다.

후방이 있다면 어떻게든 뒤로 돌려 부상자라도 살리고 싶었지만, 이미 사방이 막혔다.

중갑으로 갖춘 자신의 보병대가 이런 상황이다.

이 오천의 기병이 본대로 갔다면 얼마나 큰 피해를 줬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전방에 있던 다른 보병대의 방진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방진의 간격을 좁혀 기병의 발을 묶은 것까진 좋았으나, 이들을 처리할 병사가 부족했다.

방진과 방진 사이를 파고든 기병들을 하늘에서 바라보면 바위틈 사이에 낀 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뱀이 열 마리가 넘었다.

이만의 중갑 보병으로는 겨우 돌진을 막는 것이 전부였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곳에서 방패병 뒤에 숨은 창병들이 어떻게든 창을 찔렀지만, 밑에서 올리는 힘이 말 위에서 내려치는 검의 힘보다 약한 것은 당연했다.

"원군이 온다! 조금만 버텨!"

열 번도 넘게 외친 말을 다시 던졌다.

올지도 안 올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어떻게든 부하들의 사기를 유지해야 했다.

목에서 올라오는 비릿한 피 맛을 꾹 삼키며 지휘관들이 있을 후방을 바라봤다.

우리를 다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간격을 좁히라는 명령을 내린 이유가 있을 것이다.

대륙에 위명이 자자한 제국 기병을 붙잡으라고 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이제 슬슬 무리였다.

"끄흑...!"

"안돼! 조금만 버텨!"

그 잠깐의 사색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또다시 터져 나오는 비명에 전방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하필이면 방패병이다.

뒤에 있던 창병이 겁을 먹어 눈앞의 기병을 견제하지 못한 듯싶었다. 갑주 사이 목을 찔린 페튼이 구르륵 거리는 피가래를 뱉으며 쓰러져있었다.

이미 늦었다.

"이 새끼야! 정신 안 차려!"

그럼에도 반응이 없다.

창을 든 손이 벌벌 떨리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기만 한다.

지금도 부하들이 죽을힘을 다해 검을 막아내고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때가 아니었다.

결국, 케일은 손을 들어 신참의 뺨을 갈겼다.

"...케, 케일 부관님. 저, 저 집에..."

신참의 목이 홱 돌아갔다.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초점이 돌아온 그가 멍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눈빛이 공포로 떨리고 있었다.

"전쟁터에 놀러 온 줄 알았어!!! 정신 안 차려! 너 한 명이 정신 못 차려서 어떻게 됐는지 안 보여? 어!!!"

대답까지 들을 시간은 없었다.

케일은 신참의 목덜미을 붙잡고 다시 방진으로 밀었다.

비단 신참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전쟁 밥 좀 먹은 조장들도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여기서 무너지면 다 죽는다! 정신 차려!!!"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이며 부하들을 다독였지만, 이미 한 번 떨어진 사기는 올라올 기미가 안 보였다.

잠깐 눈을 돌릴 때마다 칼에 맞은 부상병들이 방진 안으로 들어왔다.

방진을 구성하는 사각형이 점점 더 작아졌다.

"..."

방진 안에서 부하들의 등을 바라보는 케일은 암담함을 느꼈다.

정말 한계였다.

이대로라면 얼마 안 가 방진이 무너질 것이다.

"크흑..."

또다시 들려온 비명에 고개를 돌렸다.

쓰러진 병사는 방진에 방해가 된다.

죽었든 살았든 뒤로 물려야 남은 병사들이 진형을 유지할 수 있...

"..."

비명과 함께 쓰러진 병사에게 재빨리 다가간 케일은 말없이 어깨를 붙잡고 뒤로 당겼다.

시체를 끌고 오는 이 손에 묻은 피는 몇 명의 피가 섞였을까. 확실하진 않지만, 지금 또 한 명의 피가 더해졌다.

뺨을 맞아 발갛게 부어오른 시체의 얼굴이 유난히 눈에 담긴다.

이렇게 금방 죽을 줄 알았으면 뺨은 때리지 말걸.

목에서 솟구치는 피 분수에 빨갛던 신참의 뺨이 더 붉은색으로 덧칠됐다.

'...'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방진의 간격을 좁혔는가.

차라리 기병들의 발을 풀어두고 방진으로 단단히 틀어막으면 지금보다 피해는 적었을 것이다.

원군이 오는 게 아닌 이상 지금 이 작전은 자신들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것과 별다를 게 없었다.

"이런 씨발!"

결국 화가 난 케일이 땅을 걷어찼다.

자신보다 어린 젊은 참모가 지휘를 맡았을 때부터 불안한 감이 있었다.

도대체 뭐를 믿고 저 새파란 청년에게 지휘를 맡겼...

부우­­­

둥­ 둥­ 둥­

갑작스레 들려오는 뿔피리 소리와 북소리에 케일은 생각을 멈췄다. 아직 붙잡고 있던 신참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후방을 바라봤다.

격렬했던 전장에 잠시 소요가 일어났다.

말을 타고 있는 자들도, 방패를 든 자들도 동시에 뿔피리 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진원지에서부터 격한 고함이 전장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후방의 움직임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원군이다!!!"

"원군이 왔다!"

날카로운 쇠붙이 소리에 가려졌던 소리가 마침내 케일의 귀에도 들어왔다.

원군이 왔다.

드디어 왔다.

지금까지 외쳤던 그 어떤 고함보다 더 큰 소리가 케일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원군이 왔다!!! 조금만 버텨라!!!"

목이 찢어지는 고통이 찾아왔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자신의 부대보다 더 상황이 좋지 않은 앞 부대에 전파해야 했다.

비릿하게 올라오는 피를 다시 삼키고 다시 고함을 질렀다.

"저 멀리 원군이 보인다!!!"

해가 떴지만, 여전히 짙은 안개에 가시거리가 얼마 되지도 않았다.

당연히 원군은 코빼기도 안 보였다.

그러나. 당장 기병과 칼을 맞대고 있는 부하들이 자신의 거짓말을 알아챌 리가 없다.

힘을 얻은 부하들이 창을 더 강하게 쥐고 젖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기병을 노렸다. 당황한 기병들의 손이 어지러워지는 게 보인다.

부우­­­

둥­ 둥­ 둥­

뿔피리 소리가 계속해서 전장에 퍼졌다.

왕국 군에겐 희망의 찬가요. 제국 기병들에겐 절망의 진혼곡이었다.

­­­­­­­­­­

"너무 늦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입니다."

"너무 늦었어요."

"..."

"그래도 잘하셨습니다. 로그멜 경. 이 전투의 승리는 경 덕분입니다."

그 말에 부복하고 있던 로그멜 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입을 열었다.

"하달하셨던 명령은 순조롭게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모조리 불을 질렀으니 저들도 피해가 클 것입니다."

"경계병은 없었나요?"

"대부분 비전투 인원이었습니다. 도망치던 제국군은 모조리 추살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로그멜 경에 말에 나는 안심을 하곤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진 사이에 단단히 박힌 기병들이 갑작스레 나타난 원군에 의해 차근차근 무너지고 있었다.

속도를 받은 기병들이나 무섭지, 방패병에게 운신을 제한당한 기병들이 무서운 것은 아니다.

실력과 무장의 우위로 격렬하게 반항을 하는 중이었지만,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순 없는지라 제국군들이 하나둘 땅에 몸을 눕히고 있었다.

"보고는 끝났으니 저들을 마무리하고 오겠습니다."

그 장면 만으로 몸이 달았는지 로그멜 경이 다급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한 번 공을 세우니 그 맛을 본 걸까.

전쟁터 한가운데서 초롱초롱한 눈빛을 볼 줄은 몰랐다.

"안됩니다."

"알겠... ...예?"

설마 반대를 할 줄은 몰랐는지 그가 얼빵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어울리지.

로그멜 경은 이런 표정이 딱 어울렸다.

덩치도 얼굴도 곰처럼 순하게 생긴 그에게 잘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순간 웃음이 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밑에선 아직 전투가 한창인데 웃음을 터트리면 미친놈 취급받기 딱 좋았다.

속으로 웃음을 참아내곤 다시 입을 열었다.

"로그멜 경은 따로 할 일이 있습니다."

"...예?"

"싫어요?"

"아니요! 싫을 리가 있겠습니까?"

따로 할 일이란 무엇인가.

밥이나 지으라고 시키진 않을 테니 또 다른 특수 임무가 있다는 소리다.

그 말은 곧 새로운 공을 세울 기회라는 뜻이니, 냄새를 맡은 로그멜 경이 사양할 리가 만무했다.

"이 전투가 끝나면 우리는 곧바로 본대로 향할 겁니다. 거긴 아직 전투가 한창이니까요."

그 말에 로그멜 경이 저 멀리 산맥의 초입을 바라봤다.

점점 옅어지는 안개에 가시거리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지만, 여전히 1km가 안 됐다.

그 거리를 뛰어넘는 함성과 날붙이 소리는 이곳 못지않게 격한 전투가 치러지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제가 할 임무가 무엇입니까?"

"이번엔 부대를 반대로 운용할 생각입니다. 제가 경보병을 지휘할 테니 로그멜 경은 중갑 보병을 데리고 할 일이 있습니다."

맨몸으로 뜀 걸음을 해도 두 시간이면 녹초가 된다.

격투 선수들의 라운드당 경기 시간 역시 고작 몇 분이지만, 몇 라운드가 채 지나기 전에 땀으로 흠뻑 젖는다.

그럼 무거운 갑주를 입은 보병들은?

더 이상 전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치겠지.

지금은 높아진 사기에 느끼지 못하겠지만, 제국 기병이 모두 처리되고 나면 탈진으로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

"...그럼 임무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가서 밥도 먹고 좀 쉬면 체력 좀 회복하겠지.

중갑 보병은 함부로 소모할 수 없는 고급 병종이니 중요하게 굴려야 한다.

바로 지금처럼.

나는 천천히 로그멜 경에게 다가가 귓가에 대고 입을 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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