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 충돌
* * *
"참모님! 저 앞에 제국군이 보입니다!"
"정지!!!, 전군 정지하라!"
저 앞에서 제국군의 진군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돌격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낭패를 면치 못했을 뻔했다.
짙은 안개는 제국군의 눈을 가려줬지만, 구슬 또한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다.
이 곳의 지리를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결국 가장 빠른 길을 포기하고 산맥의 초입을 따라 돌아와야 했다.
원래의 계획은 왕국군이 내려오는 산길 입구에 먼저 도착해 돌격해 오는 기병을 막으며 시간을 버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차라리 로그멜 경을 보내지 말고 함께 움직일 걸.
내가 지휘하는 부대는 모두 중갑 보병이었지만, 2만을 조금 넘기는 병력 뿐이었다.
다른 임무를 위해 경보병을 모조리 모아 그와 함께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는데, 괜히 보냈나 후회가 든다.
"정지하라!!!"
"대열을 맞춰라!"
쉬지 않고 이동하느라 지친 병사들이 쉴 틈도 없이 이어지는 명령에 다급히 방진을 짜기 시작했다.
"창병! 어디 갔어!"
"방패병 뒤로 가서 서! 너만 힘든 거 아니야!"
여기저기에서 부관들의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병사들에겐 조금 미안했지만, 지금은 쉴 때가 아니었다.
십 분... 아니, 오 분만 늦게 왔어도 임무를 실패할 뻔했다.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도착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초조했다.
미처 방진을 다 구성하기도 전에 기병대가 우리를 향해 돌격한다면?
이미 온 힘을 다해 사각방진을 만들고 있는 병사들이었지만, 그들을 더 재촉하고 싶었다.
아직 명령이 떨어지지 않은 건지, 아니면 우리의 숫자를 파악하고 있는 건지 다행히 기병이 움직일 기세는 없어 보였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제국군을 주시하는데, 제국군의 움직임이 무언가 이상했다.
"...?"
"...참모님. 저들이..."
우리가 옆에서 나타났는데도, 제국군은 본대로 향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심장을 울리는 북 소리 또한 여전히 전장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우릴... 무시하는 겁니까?"
나와 함께 제국군을 바라보던 부관이 결국 얼빠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혼잣말인지 질문인지 모를 그 말에 나 역시 혼란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우릴 왜 무시하지?
아니야.
지금은 이유를 따질 때가 아니야.
점점 더 빨라지는 북소리를 들으며 크게 고함을 질렀다.
"방진을 유지한 채 전진한다! 우리가 기병의 시선을 분산 시켜야 한다! 만약 우리를 무시하고 본대로 돌격하면! 우리 역시 적들의 본대를 공격한다!"
이 드넓은 초원에서 기병을 쫓을 방법 따위는 없다. 게다가 둔하디 둔한 중갑 보병으로는 더더욱.
그럴 바엔 차라리 제국의 본대를 공격한다.
기병이 헤집고 지나가 진형이 무너진 우리 군을 정리할 보병이 없다면, 저들의 기병 역시 반쪽 짜리다.
내 명령에 방진을 유지한 병사들이 천천히 제국군으로 접근했다. 점점 옅어지는 안개 사이로 서서히 제국군의 진형이 자세히 보였다.
보병이 진형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양 날개에 기병을 배치한 가장 보편적인 진형이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기병들이 우리의 접근에 동요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본대로의 진군이 멈추지 않는다.
남은 거리는 고작 500m가 채 되지 않았다.
그리나 제국군과 본대의 거리 역시 1km가 되지 않았다.
'...'
함정인가?
혹시 다른 기병대가 크게 돌아 우리의 뒤를 노리고 있나?
저 부대의 대장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적들의 노골적인 무시에 오히려 불안감이 쌓인다.
"...정지!"
결국 나는 부대의 진군을 멈췄다.
진짜 함정인가?
무슨 생각으로 우리의 접근을 가만히 두는 거지?
부우우우
그때, 제국군이 있는 방향에서 우렁찬 뿔피리 소리가 전장에 퍼졌다.
서로 너무나 가까운 거리다.
폭풍의 전야 속에서 수십만 명이 모인 이 전장의 고요가 깨졌다.
그와 동시에 고삐를 잡아 챈 제국의 좌익 기병대가 본대를 향해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참모님! 정말 저희를 무시하고 돌진할 생각인가 봅니다!"
사방으로 군마의 말발굽 소리가 퍼지며 부관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수천의 기병대가 동시에 속도를 높이며 땅을 박차는 그 압도적인 광경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땅이 거세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전차가 아닌 이런 기병 만으로 땅이 울리는구나.
손에 식은땀이 흘렀다.
생각해보니, 막사에서 대기하지 않고 전장에 직접 나와 전투를 치르는 건 처음 아닌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2만에 달하는 중갑 보병이 모두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
이제야 진짜 전쟁이 났구나 실감이 든다.
등줄기를 가르는 전율과 함께 심장이 두근거렸다.
흥분일까? 두려움일까? 아니면 설렘?
격해진 감정이 손을 떨게 만들었다.
고삐를 쥔 손이 달달 떨렸다.
뒤를 바라보던 고개를 돌려 다시 앞을 바라봤다.
이들이 우리를 무시한 이유.
눈앞에서 보란 듯이 본대로 돌격하는 이유.
마치 들어오라는 듯이 중앙 보병을 들이미는 이유.
"참모님! 제국 보병도 곧 기병을 쫓아 돌격을 시작할 겁니다! 그 전에 보병의 진로를 막아야 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예?"
단둘이 대화할 때가 아니다.
손 끝이 여전히 떨렸다.
알 수 없는 격한 감정에 목소리도 떨렸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두려움 따위가 아니었다.
짜릿한 감각이 다시 한 번 등줄기를 훑었다.
고개를 돌려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방진을 유지하라!!! 기병이 온다!!!"
반전의 반전이다.
차라리 이렇게 늦을 줄 알았다면 로그멜 경을 따로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과연, 제국의 좌익을 담당하던 오천의 기병이 완전히 빠지고 나자 보이는 것은 중앙에 있던 보병.
그리고 그 보병을 지나쳐 달려오는 우익의 기병.
5천의 기병 전부가 달려오고 있었다.
"거창!!!"
다시 한 번 명령을 내리자 촤르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중갑 보병 뒤에 서 있던 창병들이 창을 들어 올렸다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기병대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에 맞춰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오천 마리의 개미가 일제히 달려와도 공포에 휩싸일 것 같은데 오천의 기병이 달려온다.
고삐를 쥔 손은 이미 축축해져 있었다.
무서운 걸까.
무서워서 식은 땀을 흘린 건가.
아니다.
정말 장담하건데, 두려움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등줄기를 가르는 전율, 무언가 눈을 뜬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쾌감이 계속해서 심장을 때렸다.
그 잠깐의 사색 사이에 제국의 기병대가 바로 코앞까지 왔다.
차르릉
허리춤에 달린 검을 뽑아 들었다.
검집을 떠난 그레이트 소드가 태양빛을 반사하며 하늘을 갈랐다.
부수지 못하면 부서지는, 어느 한쪽은 부서져야 하는 두 무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땅을 흔드는 진동이 점점 더 커졌다.
콧김을 내뿜는 말들의 날숨이 보였다.
선두에 선 저 기병들은 겁도 없을까.
충돌과 동시에 곤죽이 된 채 자신을 따라오던 말들에게 짓밟힐 운명이 두렵지 않을까.
의아한 내 눈빛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속도를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전속력을 다한 전차와 움직이지 않는 벽이 부딪히며 전투가 시작됐다.
콰앙!
히이이힝!
사람과 사람이 부딪혔으나 들려오는 소리는 그렇지 않았다.
충돌과 동시에 쇠붙이가 우그러지는 파열음.
전투마의 마지막 울음소리.
사지가 사방으로 비산한 중갑 보병의 단말마.
"으아아악!!!"
"방진 안으로 들어온 기병을 찔러라!"
수십, 수백 명의 목숨이 몇 초 사이에 사라졌지만, 애도하는 이는 없다.
남은 이들은 더 많은 목숨을 갈구하며 서로를 향해 창과 검을 찔러 넣는다.
"방진의 간격을 당겨라! 기병대가 지나갈 길목을 좁혀!"
내 말에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던 사각방진이 천천히 밀집하기 시작했다.
기병들이 지나갈 활로를 좁게 만들어 기병대의 두께를 얇게 만들면, 돌파력을 현저히 약하게 할 수 있다.
"방진 안으로 들어온 기병은 빠르게 처리해라! 지나가는 말들의 다리를 노려!"
입이 쉬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전장의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기병대를 받아냈던 방진들은 이미 그 형체가 보이지 않았다.
"진형을 유지해라! 간격을 더욱 좁혀라!"
내가 외친다고 저 멀리 떨어진 방진이 곧바로 움직일까.
게임이 아닌 현실이니 그럴 리가 없다.
한참을 똑같은 말을 반복해야 어느 정도 명령이 전달됐다.
최전방에서 기병을 막아내는 부대들은 아예 전달조차 안될 것이다.
눈앞에 말을 탄 사신을 두고 귀를 열어둘 정신이 있을 리가 없다.
도대체 로그멜 경은 언제 오는 건가.
오늘 새벽에 부대를 나눴다.
아침 해가 떠오르고 점심이 다가오는 지금, 충분히 임무를 완수하고 접근해야 할 시간이었다.
겨우 이만의 중갑 보병으로 오천의 기병을 막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을까.
실시간으로 내리는 명령에 어느 정도 시간을 끌고는 있었지만, 방진이 서서히 돌파 당하고 있었다.
한 번 돌파를 당하고 기병들을 보내고 나면, 그들을 다시 방향을 꺾어 들이닥칠 것이다.
그것도 수천 기의 기병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방진을 뚫고 돌파하려는 부대와, 그걸 저지하려는 부대의 힘 싸움에서 점점 승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기병을 얼마나 많이 끌고 온 거야.
헤르트랑 전쟁 중 아니야?
미친놈들 같으니라고.
결국 참고 참았던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제국에 있는 모든 말이란 말은 다 끌고 온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만 명의 기병이 있는 건가.
오천. 아니, 칠천의 기병이었다면 어떻게 막을 만 했을 거 같은데.
곳곳에서 돌파 당하는 방진이 생기기 시작했다.
완전히 진형이 무너지면 그때부턴 일방적인 학살이기에 슬슬 방진을 풀고 저들에게 길을 터줘야 할 때였다.
숨통이 트인 기병대는 다시 속도를 높이기 위해 순순히 방진을 빠져 나가리라.
그리곤, 다시 방향을 바꿔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내 부대를 유린할 것이다.
2왕자에게 헤르트의 활약상을 읊으며 나를 지원하던 후작과 스승님이 떠올랐다.
너무 욕심이었을까.
발언권을 얻기 위해 무리한 작전을 펼쳤을까.
아니다.
아니야.
아직 희망은 있어.
로그멜 경이 돌아오기만 하면 방진에 붙잡힌 기병들을 몰살 시킬 수 있다.
그가 있을 북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해가 떴는데도 여전히 산을 타고 내려온 안개가 시야를 가렸다.
여전히, 로그멜 경과 부대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내 시선에 무언가가 보였다.
안개를 붉게 물들이며 넘실거리는 색.
그리고 그 위를 덮은 검은 연기.
"부관."
"...예. 방진을 풀라고 명령 할까요?"
그도 가망이 없다 여겼는지 참담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뿔나팔을 크게 부세요. 아군이 오고 있다고 소식을 전하세요."
"...예?"
"방진을 더욱 밀집시키라고 명령을 전달하세요."
"그게 무슨..."
제국의 주둔지에서 이 곳까지 겨우 2km 남짓한 거리다.
안개에 가려 보이진 않지만, 저기 어딘가 있을 것이다.
눈이 안보이면, 소리를 쳐야지.
그가 들을 수 있게.
"아주 멀리까지 들리도록 뿔 피리를 강하게 불으라 하세요. 원군이 오고 있다 전하세요. 지금 당장."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