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100화 (100/191)

〈 100화 〉 돌격

* * *

초원의 아침은 해가 빨리 뜬다.

저 멀리 지평선으로 서서히 해가 떠오르면, 제국군은 하나 둘 모포를 치우고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다.

밤 사이 탈영병은 없었는지 간단한 점호를 하고 나서, 자신들의 몸값보다 열 배는 더 비싼 전투마에게 건초를 먹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일반 병사들에게 배식이 돌아갔다. 배식은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에 나누어 줬는데, 보급이 바로 뒤에 있는 뵈른 성에서 나왔기에 꽤 먹을만한 수준으로 나오곤 했다.

거기까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침이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주둔지가 고요했다.

평소라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아침을 먹으며 여기 저기에서 말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다들 조용히 아침을 먹고 있었다.

괜히 오늘 따라 깊게 낀 안개가 더 으슥해 보인다.

"...오늘 전투가 벌어지면 내일 집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눈빛이 서글서글한 청년이 자신의 상관을 바라보며 해맑게 물은 그때, 어디선가 손바닥이 날라와 젊은 병사의 뒤통수를 후렸다.

"아악!"

"야. 이 일자무식아. 하루 만에 전쟁이 어떻게 끝나!"

전혀 대비를 하지 못하고 있었는지 그리 강하지 않은 일격이었음에도 젊은 병사는 뒤통수를 부여잡고 땅을 굴렀다.

그 와중에도 배식받은 마른 빵을 꼭 쥔 손이 흙이 묻지 않도록 품 안으로 들어갔다.

"그만해라."

"...어휴!"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십인장이 조용히 나무라자 젊은 병사를 때린 병사가 답답한 듯 한숨을 푹 쉬었다.

"어쩌다 저런 놈까지 끌려와서는..."

아무리 강대한 제국이라지만, 4개의 왕국과 동시에 전쟁을 치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에어로크 왕국이 테레스 산맥을 넘어 진격해온다는 소식을 들은 다나크 제국은 부랴부랴 청년들을 징집해 서쪽으로 보냈다.

"...엄마 보고 싶습니다."

"...내일 말고 세 밤만 자면 갈 수 있을 거다."

뒤통수를 문지르면서도 울상을 짓는 젊은 병사를 향해 결국 십인장이 입을 열었다.

저런 청년까지 징집할 정도로 상관이 급박한 건가.

차라리 완전히 모자랐으면 끌려오지도 않았을 텐데, 사정이 딱했다.

아마 삼일 정도면 왕국군과 어느 정도 결딴이 났을 터.

그 후에 위에 보고해 그를 돌려 보낼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저희는 할 게 있습니까?"

젊은 병사를 후린 병사 역시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십인장을 향해 시선을 돌려 입을 열었다.

수도에서 온 기병 오천과 이 근방에 있던 기병 오천을 전부 긁어모아 일만 기병이 만들어졌다.

자신들이 속한 보병은 겨우 이만이었으니 정말 기형적인 편제였지만, 자신들이 알 게 뭔가. 가라니까 온 것 뿐 목적을 가지고 돌아다닐 수는 없는 것이다.

"백인장님의 말로는 넓게 펼쳐져 포위망을 구축한다고 들었다. 산맥 밑으로 빠져나오는 왕국군을 다시 산맥으로 밀어 넣는 게 우리 임무다."

"그럼 결국 우리도 출전을 해야 하는 겁니까?"

"그렇지."

"......수성이나 하면 편할 걸."

22만이나 되는 부대를 어떻게 이기겠다고.

다른 십인장들보다 특히 엄한 자신의 상관이 들으면 분명 경을 칠 소리였기에 끝 말은 목을 맴돌다 사라졌다.

작은 빵이 마침내 모두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해가 제 모습을 온전히 보이며 으슥한 안개를 서서히 걷어내고 있었다.

아침도 먹었겠다 이제 슬슬 출발할 시간이니 천천히 몸을 풀던 그때, 산맥과 가까운 부대에서 작은 소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벌써 왕국군이 산맥 초입으로 내려왔나?

오늘 점심에나 산맥을 내려온다고 했는데?

의아함이 들었지만 이 먼거리에서 보일 리가 있는가.

잠깐 까치발을 들었다가 수천 명이 넘는 병사들의 대가리만 확인한 그가 발에 힘을 풀었다.

말보다 빠른 게 소문이라고 하니 자신들이 있는 곳까지 금방 소식이 전해질 것이다.

그때, 두 필의 기마가 빠른 속도로 부대를 관통하며 뒤로 이동했다.

저 방향은 분명 지휘 막사가 있는 곳이다.

정말 밤을 꼴딱 새고 산맥을 내려왔나?

우리 척후병들은 뭐하고?

저 놈들은 밤을 새고 어떻게 싸우려고?

뜻밖의 상황에 잠깐 머리를 굴리던 병사는 이내 생각을 멈추고 장비를 점검했다.

일자 무식이라며 젊은 병사의 대가리를 후렸지만, 자신이라고 별 다를 게 있는가.

머리를 비우고 명령에만 따르면 될 일이다.

갈때는 두 필 이었던 말이 올 때는 열 필이 넘었다.

그 사이 새끼를 친 건 아닐 테니 평소엔 얼굴도 보기 힘든 지휘관들이 죄 앞으로 가는 거다.

괜히 불안하게 왜 저래.

결국 불안감이 터진 병사는 허리춤에 찬 싸구려 철검을 꽉 붙들었다. 그 와중에 젊은 병사는 달리는 말을 보며 연신 우와 거리며 탄성을 내지른다.

나도 쟤처럼 사흘 후에 집에 가면 좋을텐데.

오기 전 아내가 끼워준 결혼 반지를 쓰다듬었다. 딸아이가 품에 안겨 울던 모습도 생각난다.

이런데서 죽을 수는 없다.

겨우 이딴 곳에서 죽으려고 뷔른 성을 떠나온 것이 아니다.

아빠 살아서 갈게.

돈 많이 벌어서 갈게.

그러니까 좀만 기다려.

병사는 다시 한 번 검을 꽉 쥐며 전방을 바라봤다.

­­­­­­­­­­­­

"이게 무슨 일이야! 산맥에 들어가 있던 척후병들은 다 뭐한 거야!"

"..."

"뷔른 백작! 무슨 말이라도 해보게! 어떻게 저들이 산맥 초입에 다다를 때까지 보고 하나 없었는가!"

잔뜩 화가 난 4황자가 볼살을 푸들거리며 소리쳤지만, 뷔른 백작은 전방을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떻게?

아니, 왜?

산맥에 들어가 있던 척후병들은 어디서 무얼 했는가.

단체로 탈영이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아직 산맥을 벗어난 게 아니었다.

이 곳에서 저기까지는 고작 3km가 안되니 금방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출전이 우선 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이번 전투가 끝나고 합당한 처벌을 받겠습니다."

뵈른 백작이 참담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4황자는 여전히 화를 가라앉힐 수 없었다.

아직 늦지 않은 건 자기 자신도 알고 있었다. 어차피 3km야 기병이 움직이면 잠깐 숨만 몇 번 쉬면 도착할 거리였다.

20만이 넘는 대군이 산맥을 벗어난다 해서 급격히 전투력이 강해지는 것도 아니고, 마지막 대열까지 산맥을 벗어나 전열을 정비하려면 아마 오늘 하루로도 모자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화난 건 그 이유가 아니었다.

이렇게 급하게 출전하고 싶지 않았다.

황자의 품격에 맞는 당당하고 여유로운 출전이 망가진 것에 대한 분노였다.

결국 탈이 난 것이다.

기강이 해이해진 이 야만인들을 믿는 게 아니었다.

그토록 척후병, 척후병 노래를 부르길래 그나마 믿었건만, 끝까지 모든 게 마음에 안 들었다.

"...한 명이라도 놓친다면, 이 전장이 자네의 마지막 전장으로 알게."

"...예."

다녀와서 보자.

차라리 이렇게 관리가 안될 거라면, 아예 폐허로 만들어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부우­­­­­­

둥! 둥! 둥!

자신의 손짓에 맞춰 뿔나팔 소리와 대북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제국군들이 천천히 전진을 시작했다.

수만이 넘는 부대가 발걸음을 맞춰 초원을 건너기 시작했다. 발을 구르는 소리가 저 앞 테레스 산맥까지 울리고 있었다.

이 느낌이다.

아직 은은하게 남은 안개와 더불어 부대의 진군 소리가 뒤틀렸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직은 고작 삼만의 부대를 지휘하지만, 훗날 황제가 되면 수십만이 넘는 대군대가 자신의 손에 들어오리라.

사실, 전부 제국의 병사가 아닌 귀족들의 사병이지만, 어차피 그들은 자신의 밑에 있을 테니 내 부대와 다름없지 않겠는가.

흐릿한 안개 너머로 진군 소리를 들은 왕국군이 서둘러 전열을 짜는 모습이 보였다.

그 꼴이 딱 우왕좌왕하는 생쥐 꼴이라 기분이 퍽 좋아졌다.

밤새 잠도 안자고 산을 넘어온 주제에 무슨 힘으로 기병을 막으려고?

오늘 저녁은 저들의 시체 위에서 먹으리라.

별로 당기는 일은 아니었지만, 귀족들에게 공포를 심어줄 만한 일화가 하나 즈음 있으면 훗날 황제가 되고 나서 귀족들을 부리기 편하지 않겠는가.

즐거운 상상에 결국 4황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에어로크 왕국군과의 거리는 2km가 조금 안됐다.

이제 슬슬 기병을 보내볼까.

제국 서부 대부분의 영지를 탈탈 털어 만든 일만의 기병이다.

대륙 역사 상 이렇게 많은 기병이 한 자리에 모인 적이 있기는 했는가.

역사적인 전투의 주인공이 자신이라 생각하니 4황자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뵈른 백작. 전 기병을 한번에 보내시오. 웅장한 말발굽 소리가 듣고 싶군."

"예? 황자님. 적들을 관통하면 충분히 가능하오나 저들의 뒤엔 산맥이 있어 그렇게 많은..."

"누가 앞으로 달리랬소? 옆에서 횡단하면 되는 것 아니오?"

"......알겠습니다."

언제 웃었냐는 듯 인상을 찌푸린 4황자는 미간을 좁히며 백작의 말을 끊었다.

이 백작과 대화만 하면 짜증이 났다.

이 작자는 일만의 기병이 한번에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궁금하지도 않단 말인가? 자신은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말이다.

변방에 사는 미개인 답게 로망도 품위도 없는 자였다.

'가로로 횡단하면 돌파가 너무 어렵다...'

산길을 벗어난 왕국군은 가로로 길게 정렬하며 전열을 수습 중이었다.

차라리 길게 늘어진 상태에서 옆을 뚫으라고 하면 충분히 가능했겠으나 이 상태에선 분명 돌파를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뵈른 백작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이미 여럿 찍힌 상태에서 또 다시 황자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정말 이 전장이 마지막이 될 수가 있었다.

적당히 기병을 보내다 중간에 복귀 시킬 생각을 한 백작은 한 손을 들어 주변에 신호를 보냈다.

"기병!!!"

둥­ 둥­ 둥­ 둥­

뵈른 백작의 고함과 함께 대북의 박자가 빨라졌다.

신호를 받아 든 기병들이 고삐를 강하게 쥐며 앞으로 내달릴 준비를 했다.

둥­ 둥­ 둥­ 둥­

천천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작은 다시 한 번 크게 고함을 지르려던 그때였다.

"돌격하!!!......"

"백작님!!!"

다급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부관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안색이 새파래진 부관이 말을 이었다.

"동쪽에서 왕국군이 다수 접근 중입니다!"

"...뭐?"

둥­ 둥­ 둥­ 둥­

"최소 일만! 안개가 짙어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최대 이만이 넘는 왕국군이 접근 중입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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