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99화 (99/191)

〈 99화 〉 하산

* * *

테레스 산맥의 지형은 특이하다면 조금 특이하다. 에어로크 왕국에서 산맥을 넘을 때는 오르막길은 짧고 내리막길이 길었다. 반대로 다나크 제국에서 산맥을 넘을 때는 오르막길이 길고 내리막길이 짧았다.

다나크 제국과 에어로크 왕국의 고도 차이 때문이었다.

"에어로크 군이 산맥을 넘다 멈췄다고?"

그 말과 함께 투실투실한 볼살이 파르르 떨렸다.

심기가 불편하다는 뜻임을 지난 경험으로 겪은 백작이 더욱 고개를 숙였다.

"예. 저희를 발견한 듯 싶습니다."

"산맥 너머에서 한참을 가만히 있더니 이제 조금 움직이고 다시 멈췄다는 말인가?"

다시 한 번 볼살이 푸르르 떨렸다.

대륙 동쪽은 지금 헤르트와 제국의 전쟁이 한창이었다.

황좌를 노리는 형제들이 지금도 계속 전공을 쌓고 있다는 뜻이다.

자신도 빨리 저 에어로크 놈들을 무찌르고 전공을 세워야만 했다.

이대로 느긋하게 있다간, 수도에 자신의 자리가 언제 사라질지 몰랐다.

어쩌면, 평생 이 외지에서 썩어야 할지도 모른다.

결국 분통이 터진 제국의 4황자는 들고 있던 와인잔을 집어 던졌다.

거대한 천막 내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서있었지만, 4황자가 던진 와인잔이 깨지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겁쟁이 같은 놈들! 언제 내려오는 거야!"

내려오기만 하면 자신이 데려온 기병들로 모조리 밟아줄 생각이었다. 22만이나 되는 대군이지만 산맥을 내려오느라 지쳐있는 상태 아닌가?

원래의 명령은 이 곳에서 나흘 거리에 떨어진 성에서 그들을 막아내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러나 4황자는 기발한 작전을 짜낸 자신의 머리를 자화자찬하며 이 작전을 강행했다.

영지를 다스리던 백작이 절대 안된다며 무릎을 꿇고 길을 막았지만, 4황자가 보기에 그는 다가온 기회도 붙잡지 못하는 겁쟁이 일 뿐이었다.

"...그것보다 저희 척후병이 계속해서 소모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작전이 길어지니 피곤함을 호소하..."

"그럼, 그들이 놀러 왔는가? 성공적인 작전을 위해선 어느 정도의 피해를 감수해야 해! 차라리 그럴 거면 뷔른 성으로 돌아가게."

"..."

"척후병이 척후병의 임무를 수행하다 죽으면 제국을 위해 죽은 영광이지 않나? 아무것도 없는 평민들이 그런 영광을 누리며 죽는데 오히려 감사할 줄 알아야지. 안 그런가?"

"...맞습니다."

'...이미 백 명도 안 남았습니다.'

기병이 주력인 부대에서 전투 부대도 아닌 척후병들이 따라오면 얼마나 왔겠는가. 그나마 산맥을 감시하겠다고 뷔른 성에 있던 모든 척후병을 끌어왔는데, 이미 반 수가 넘게 죽은 상태였다.

사인은 다양했다.

왕국군에 들켜 죽임을 당한 시체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 외의 사인이 더 많았다.

야생 동물에 물려 죽거나, 심지어 간간히 나온다는 몬스터들에게 죽임을 당한 흔적들도 많았다.

날카로운 이빨에 반 토막이 난 채 온 몸이 걸레짝이 된 시체를 발견한 후 부터는, 척후병들은 더욱 소극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애지중지 하며 키워오던 척후병들을 이렇게 어이없이 소모하는 4황자를 보며 살기가 들끓었지만, 이미 자신마저 무능하다 낙인 찍혔으니 방법이 없었다.

결국,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킨 뷔른 백작은 뒤로 물러났다.

"에잉... 제국의 변방 이라고 훈련도 대충 하고 나라의 세금이나 빨아 먹은 놈들 같으니라고! 내가 안 왔으면 어쩔 뻔 했는가!"

자리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백작과 휘하 지휘관들을 향해 4황자가 화를 벌컥 냈다.

이래서 변방의 촌놈들은 안돼.

나라의 고혈이나 빨아 먹을 줄 알지 도통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다.

음식도 입맛에 안 맞았고, 시설도, 환경도 낙후됐다.

그러나 제국의 최전방을 지키던 병사들이 훈련을 허투루 했겠는가.

에어로크 왕국의 침공 소식에 몇 달 간 잠도 줄여가며 훈련했던 지휘관들은 4황자의 모욕에 얼굴이 벌게졌지만, 침묵을 유지했다.

"어떻게든 저 산맥 꼭대기에서 버티고 있는 에어로크 놈들을 끌어내릴 방법을 생각해오게! 내가 오천이 넘는 기병을 데려왔으니 숟가락 정도는 들 생각을 하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얼굴이 벌게질대로 벌게졌지만, 뷔른 백작은 끝까지 침착을 유지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부끄러움이라 생각했을까.

4황자는 오히려 붉은 얼굴을 한 백작을 보며 고소를 지었다.

정신이 빠진 백작을 그의 가신들 앞에서 혼쭐 냈으니 앞으로 정신 좀 차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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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님! 이건 아닙니다!"

"..."

"저대로 4황자를 두실..."

"그만."

회의가 끝난 뒤 피곤하다며 개인 막사로 돌아간 4황자를 뺀 나머지 지휘관들은 그 자리에 남아 뷔른 백작에게 성토를 벌였다.

"4황자님의 작전은 나쁘지 않다. 그 분의 말대로 에어로크 왕국군이 내려오기만 한다면, 큰 피해를 줄 수 있어."

"하지만... 척후병들이 겁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아까 올라온 보고에 따르면 왕국군이 산맥 아래로 짐승들을 몰고 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 말에 뷔른 백작의 눈이 부릅 떠졌다.

어쩐지 유난히 짐승들에게 당한 피해가 크다 했더니, 왕국군의 소행이었던 건가?

"...이대로면 며칠 못 가 척후병들이 전부 죽고 말 겁니다. 이미 지금 남은 척후병들로도 앞으로 정찰 활동이 거의 불가능한 숫자입니다."

"...그래도 아직 안된다. 왕국군이 어느 길을 따라 내려오느냐에 따라 우리도 대비해야 한다."

"..."

뷔른 백작에게 목소리를 높이던 부관 역시 그 사실은 알고 있었다.

산맥을 넘는 길이 한 개가 아니니 여러 갈림길마다 척후병들이 배치되어 이동 방향을 감시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유독 그 갈림길을 감시하던 척후병들의 희생이 컸다.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위치를 들키면 기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산맥의 곳곳마다 찾고 숨는 숨바꼭질이 반복되고 있었다. 만약 들키면, 그 대가는 목숨이었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척후병들을 산맥 곳곳에 배치 시킨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산맥 넘어 우리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왕국군의 척후병 차단이었다. 산맥을 넘는 가장 큰 대로를 쭉 걸어 내려오면, 바로 자신들이 있는 제국군의 주둔지가 있었다.

22만이나 되는 대병력이 건널 길은 많지 않았기에 산맥 전체에 척후병을 깔아 정보를 차단하면 기습을 경계해서라도 대로로 오리라 생각한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우리 군의 위치를 안 거지?'

뷔른 백작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방금 전 회의에서 4황자의 말에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척후병들이 왕국군의 정찰병을 막지 못했다는 소리니까.

지금이라도 척후병을 빼야 하는가.

아니면 계속해서 소모전을 펼치며 시간을 끌어야 하는가.

뷔른 백작의 생각이 깊어지는 그때, 누군가가 헐레벌떡 지휘관 막사를 열고 들어왔다.

"왕국군이! 왕국군이 다시 움직입니다! 산맥을 따라 내려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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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신의 사도가 맞으셨군요."

"아직도 신뢰가 부족했었나요?"

"그럴리가요. ...하하."

생긴 건 순한 곰처럼 생긴 양반이 눈치는 참 빨랐다. 며칠 전 야밤에 있었던 체조가 떠올랐는지 그가 웃음을 지으며 말을 돌렸다.

"...그런데 왜 지휘관들이나 참모들에겐 말 하지 않으셨습니까? 신의 사도라는 걸 널리 알리면 운신이 더 편하실텐데 말입니다."

"제가 신의 사도라는 사실을 이 왕국이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

갑작스레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로그멜 경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신의 사도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르테온을 믿는 우리 국교를 널리 퍼트리다 보면 분명히 타국과 마찰이 생길텐데, 우리 주변에 만만한 나라가 하나라도 있나요?"

"..."

그제야 무슨 말인지 깨달은 로그멜 경이 입을 다물었다.

북으론 다나크 제국.

남으론 파딘 제국.

동쪽은 두 제국의 괴뢰 국가인 알만 왕국.

그나마 국교가 없고 자유 종교를 인정하는 헤르트에서나 신의 사도로 명성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 외의 국가는 모두 국교가 존재했다.

"굳이 숨길 생각은 없지만, 반대로 신의 사도로서 할 일을 못하니 퍼트릴 생각도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단순한 정복 전쟁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물론 상황이 급해지면 신의 사도든 구슬이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끌어올 생각이다.

그럴 일이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만.

"...자, 다시 일 할 시간입니다. 이 자리에서 동쪽으로 150m, 다시 남동쪽으로 100m 둘 입니다."

"어제 그 자리군요."

며칠 동안 반복하던 일을 다시 반복할 차례다.

내 말에 나와 함께 산길을 걷던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변하더니, 그대로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잠깐 수풀이 흔들리는 인기척이 느껴지나 싶더니, 잠시 후 사위가 침묵으로 맴돈다.

일솜씨 하나는 탁월했다.

정찰 능력은 왕국의 척후병들보다 떨어졌지만, 내가 있는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내가 숨은 적들을 짚어주면 로그멜 경은 압도적인 무력으로 적을 해치우고 돌아왔다.

요 며칠 매일같이 구슬만 들여다 봤더니 이젠 적들이 숨어있을 만한 장소가 한 눈에 보였다.

우리 부대를 관찰하기 좋은 장소면서 숨기에도 좋은 장소.

빽빽한 숲 속에서 그런 장소는 생각보다 흔치 않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갈림 길을 지켜야 하는 경우에는 더욱.

잠시 생각에 빠져있다 고개를 돌려 테레스 산맥의 정상을 바라봤다.

'지금쯤 산맥을 내려가기 시작했을 텐데.'

본대가 산맥의 초입까지 내려오는데 걸릴 시간은 사흘.

그러니 남은 시간은 앞으로 이틀.

이틀 안으로 본대와 다른 길로 산을 먼저 내려가 제국군의 옆을 쳐야 한다.

'산은 군대에서 징글징글하게 타고 다녀서 다신 산을 안 타리라 다짐했는데...'

군장이 없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무거운 갑주를 입었으니 불행이라고 해야 할까.

빠르게 이동하다 보면 총처럼 허리춤에 찬 검을 던져버리고 싶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다시 품 속으로 손을 넣었다.

꼭꼭 숨어라.

사신 찾아간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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