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사도의 재림
* * *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으며 내 뒤를 따라오는 로그멜 경을 뒤로 한 채 내가 빠르게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산맥에 제국군은 없다.
간간히 숨어있는 제국의 척후병은 보였지만, 습격을 할 제국군은 없다.
빠르게 내리막길을 내달려서 인지, 아니면 다급한 마음 때문인지 숨이 점점 차올랐다.
"도련님. 도대체 무슨 일 입니까? 내기는 포기하신 겁니까?"
"..."
급하게 산을 뛰어내려가는 나를 쫓으며 로그멜 경이 질문을 던졌다.
한참을 바위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더니, 갑작스레 내기가 끝났다며 막사로 돌아가니 어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습격은 없다.
제국군은 산맥에서 습격을 할 생각이 없었다.
제국이 노리는 건 산맥을 넘은 후였다.
아무리 병력이 많아도 전열을 갖추고 싸워야 한다.
22만이나 되는 병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좁은 산길을 넘어오느라 늘어진 군대가 기병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기병.'
어마어마했던 숫자의 말들.
아무런 전투 대비도 하지 않은 모습.
그 흔한 목책도 없었다.
그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험한 산맥을 모두 넘어올 때까지 체력을 보충하며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왕국군의 선두가 산맥을 벗어난 순간 제국군은 움직일 것이다.
산을 넘느라 지치고, 좁은 길을 따라 내려오느라 전열도 갖추지 못한 병사들을 유린할 것이다.
이 사실을 빨리 알려야 했다.
여러 길을 따라 동시에 산맥을 넘든, 산맥을 벗어나기 전에 체력을 보충하든, 해결할 방법은 나중에 생각하고 우선 보고가 급선무였다.
서른이 넘는 참모진들이 있는데 좋은 생각 하나 나오지 않겠는가.
그때, 무언가 떠오른 카인은 빠르게 내달리던 발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근거는?'
'제국군이 산맥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근거는?'
'오히려 세작으로 의심 받을 확률은?'
"허억... 허억... 갑자기 왜 또 멈추십니까?"
"...로그멜 경. 병사를 모두 모아주세요."
구슬로 정보를 얻으면 늘 이게 문제였다.
증거를 만들어야 했다.
천리안이 있어 멀리 내다봤다는 헛소리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로그멜 경이 다시 한 번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작위가 전부이니 별 수 있는가.
도련님이 기어코 정신이 나갔나 보다 라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한 시가 급했다.
조용한 목소리로 주변에 퍼진 병사들을 호출시키는 그를 보며 눈을 감았다.
품 안에 손을 집어 넣고 구슬을 쥐었다.
뜨거운 땀을 흘리며 가만히 서있는 내가 보인다.
어벙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로그멜 경이 보인다.
주변으로 퍼져있던 수색병들이 하나 둘 모이고 있었다.
조금 더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 주변 숲만 볼 수 있게끔 조금만 시선을 높였다.
주변을 천천히 살펴봤다.
큰 나무의 나뭇가지를 천천히 살펴봤다. 작은 풀숲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마침내 시선이 바위 무더기 사이를 향했을 때, 회색 옷을 입은 채 바위 틈에 숨어있는 제국군 하나가 보였다.
'여기서 300m 거리.'
그 주변으로 일정한 간격 사이에 제국의 척후병들이 숨어있을 것이다. 다시 시선을 올려 그 주변을 아까보다 더 자세하게 훑었다.
과연, 바위 무더기에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큰 나무 위에서 몸을 숨긴 제국군이 하나 더 보였다.
둘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천천히 구슬에서 손을 놓고 눈을 뜨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보인다.
"지금부터 작전을 하달하겠습니다."
"...예."
그래도 군인은 군인이었다.
여전히 의아한 표정을 짓던 로그멜 경이 명령이라는 말에 표정을 고치고 인상을 굳혔다.
"서쪽으로 300m 가량 떨어진 곳에 바위 무더기가 있을 겁니다. 뾰족한 바위와 길게 늘어진 바위 틈 사이에 제국군이 하나 숨어있습니다. 반드시 생포해서 데려오세요."
"...예?"
"하나 더 있습니다. 그 바위 무더기에서 다시 북쪽으로 200m 올라가면 유난히 큰 나무가 하나 있습니다. 그 위에도 제국군이 숨어있으니 마찬가지로 생포해서 데려오세요."
"..."
드디어 우리 도련님이 미쳤구나.
이제는 대놓고 불신의 표정을 짓는 로그멜 경을 보며 나는 다시 한 번 재촉을 해 그를 떠나보냈다.
'데려와서 보자.'
의구심을 온 몸으로 뿜어내며 어정쩡한 걸음을 옮기는 그의 등을 보며 나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증인을 만들었으니 증거를 만들 차례였다.
"저는 로그멜 경을 믿고 이번 작전에 차출을 부탁 드렸는데 반대로 로그멜 경이 저를 못 믿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다음부턴 로그멜 경 말고 다른 기사한테 부탁을..."
"아, 아닙니다! 제가! 제가 언제 도련님을 못 믿었다고 그러시는 겁니까?"
테레스 산맥의 초입, 왕국군의 주둔지에서 불과 한 시간 거리에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공터에는 조금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로그멜 경의 표정을 제가 못 봤을 것 같습니까?"
"...그때는 도련님이 신의 사도라는 걸 몰랐..."
"조금 더 그러고 계실래요?"
"..."
이 작은 공터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하나같이 갑주를 착용하고 검은 옷을 입은 것이 딱 봐도 특수한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 부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 많은 사람들 중 서있는 사람이 단 한 명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로그멜 경. 대가리 박은 게 얼마 만입니까?"
"...거의 삼 년은 된 듯 싶습니다."
흙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대답한 로그멜 경은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세상에 눈을 감고 있다가 적을 생포해 오라는데 어떻게 그 말을 믿겠는가.
신분이 깡패라고 어쩔 수 없이 궁시렁 거리며 간 곳은 정말 제국의 척후병들이 숨어 있었다. 바위 틈에 숨어있는 척후병과 눈이 마주쳤을 때 서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결국 두 명의 척후병을 손쉽게 잡아온 로그멜 경은 돌아오자마자 오랜만에 땅과 이마를 맞대야 했다.
"헤르트에선 제가 신의 사도라는 것이 유명합니다. 에어로크 왕국에서는 아직 잘 모르지만요."
"...죄송합니다."
"명령 불복종으로 보고하면 일이 커지는 거 알고 계시죠?"
"..."
명령에 불복한 적은 없었다.
의심 한 적은 있어도.
그러나 신의 사도라는 도련님의 말에 토를 달았다가 무슨 천벌을 받을까 두려워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이미 두 번이나 증명을 했으니 안 믿을 수도 없고 말이다.
"로그멜 경 역시 잘 몰랐기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번 일은 이렇게 넘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일어나세요."
그 말에 로그멜 경과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몸을 일으켰다.
이마가 벌게진 채 흙이 묻어 웃음이 나올 뻔 했지만, 고개를 돌려 간신히 참았다.
자, 이제 교육도 끝났으니 할 일을 할 차례였다.
미소를 지으며 온 몸이 꽁꽁 묶인 채 누워있는 척후병들에게 다가가자 그들이 벌벌 떨며 몸을 비틀었다.
"번개 맞고 싶은 게 아니라면 가만히 있어."
"..."
"너네 위치도 찾았는데, 번개 하나 못 내릴 거 같아?"
못 내린다.
그러나 이 놈들이 알 리가 없지.
눈이 방울 만해진 채 잔뜩 겁을 먹은 그들을 잠시 바라보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꺼내 들었다.
스릉
금속과 금속이 마찰하는 싸늘한 소리가 작은 공터에 울려 퍼졌다. 내 모습을 본 척후병들이 이젠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안 죽여 이 놈들아.
니들 죽일 거면 그 자리에서 죽이라고 시켰지.
그러나 굳이 이야기를 해줄 필요는 없다.
저들이 겁을 먹을 수록 일이 편해지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검을 들어 제국군을 바라보다가, 휘익 내렸다.
"으읍!!! 우으으읍!!!"
툭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몸을 속박하던 밧줄이 잘렸다.
눈물 콧물을 쏟던 둘이 비명을 지르다 의아한 듯 천천히 눈을 떠 나를 바라봤다.
"집에 가족이 있는 사람? 한 명만 살려줄게."
"우으읍! 우웁!!"
"있으면 고개를 끄덕이고, 없으면 고개를 저어. 알겠어?"
그 말에 두 명이 동시에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였다. 이 곳에서 죽기 싫으면 옆의 놈보다 고개를 더 강하고 빠르게 흔들어야 할 것이다.
"이제 조용. 둘 다 있다는 거지?"
"..."
"..."
"그럼 둘 다 살려줄게. ...대신 조건이 있겠지?"
그 말과 함께 나는 씨익 웃었다.
신의 사도인 것도 함께 들었고, 겁도 줬고, 가족도 상기 시켜줬으니 충분히 내 말을 따르리라.
"로그멜 경. 밧줄 좀 풀어 주실래요?"
이젠 이들의 육성을 직접 들어야 했다.
내 뒤에 가만히 시립해있던 로그멜 경이 빠릿한 자세로 걸어 나와 척후병들의 입을 막던 밧줄을 끌렀다.
'이렇게 말 잘 들을 거면서 왜 그랬대?'
입을 막던 재갈이 풀렸으나 두 척후병은 여전히 겁 먹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제국군 본대 산맥 입구에 있지?"
"...!"
"그, 그걸 어떻..."
이들이 하루 종일 숨어 뭘 했겠는가.
우리 왕국군의 동태를 살피며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 저녁에 도착한 게 확실한데, 며칠 거리에 있는 본대의 위치를 정확하게 집어내니 놀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정보 그대로 내려가서 말 하면 돼."
"..."
"..."
"대신 둘 목숨은 확실하게 살려줄게."
너무나 뻔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나?
내 말을 들은 두 병사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쓸모가 다 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 분명한데, 쉽게 믿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입을 열 확실한 방법이 내겐 있었다.
"...신의 사도가 거짓말 하는 거 봤어?"
당연히 없겠지.
신의 사도를 만난 적이 없을 테니.
그 말과 함께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봤다.
그들의 눈엔 내가 어떻게 보일까.
목숨 줄을 쥔 악마?
새 생명을 살게 해줄 천사?
알게 뭐야.
"그러니까... 제국군이 지금 산맥 너머에서 진을 치고 있다는 건가? 대부분이 기병이고?"
"예. 근처에 숨어 동태를 확인하던 두 척후병을 따로 심문한 결과이니 근거가 있습니다."
"...그 말이 미리 약속된 말이면 어떡하겠는가?"
"밤새 산맥을 돌아다녔으나 제국군의 흔적이 없었습니다. 저 말고 필릭스 경 역시 산맥을 돌아다녔으니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카인 참모의 말이 맞나?"
"...예. 제국군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직 해가 중턱에 걸려 있지만, 테레스 산맥의 초입은 산맥을 오르기 위한 준비로 부산스러웠다. 그러나 단 한 곳, 지휘관들이 모여있던 막사는 조용한 침묵이 맴돌고 있었다.
주둔지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두 포로를 데리고 지휘관 막사로 들어와 모든 전말을 밝혔고, 그 증거로 온 몸이 묶인 제국군을 내밀었다.
특급 정보였기에 2왕자가 직접 나섰고, 나와 뒤늦게 돌아온 필릭스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보고를 하는 중이었다.
당연히 필릭스의 손은 빈털터리였다.
"...에어로크 왕국이 자랑하는 레인저들을 쉽게 막기 힘듦을 깨닫고 산맥을 내어준 것 같습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스승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나크 제국의 자랑인 기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스승님이기에 표정이 어두웠다.
그 말에 2왕자의 표정도 자연스레 어두워졌다.
습격이 없다는 사실에 기뻐할 때가 아니었다. 전열도 갖추지 못한 채 들이닥칠 제국군이 아가리를 벌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카인 참모의 말대로 산맥 초입에서 기병이 대기하고 있다면... 이거 보통 일이 아니군."
지휘관 막사의 분위기가 점점 가라앉았다.
적들의 작전은 파악했으나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 내 옆에서 부복하고 있던 필릭스가 입을 열었다.
"적들이 모르게 야밤을 틈타 이동하는 건 어떻습니까?"
"...이십이만 명이 전부 말인가."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2왕자가 대답했다.
말 같지도 않는 소리를 꺼내니 짜증이 치미는 듯 고개가 살짝 삐딱해졌다.
그러나 필릭스의 표정은 여전히 당당했다.
"아닙니다. 기병을 막을 중갑 보병만 먼저 산맥 밑으로 내려가 전열을 갖추면 제국군의 기병 공격을 버티며 시간을 끌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 본대가 내려와 전열을 정비하면 됩니다."
그 말에 2왕자의 얼굴이 밝아졌다.
헛소리를 하나 했더니 생각보다 괜찮은 묘수였다.
"그거 괜찮군!"
다른 사람도 아닌 2왕자의 칭찬을 받아서 인지 필릭스의 얼굴이 의기양양 해지더니 나를 스윽 쳐다봤다. 그러더니 이게 너와 나의 차이라는 듯 씨익 웃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받았으니 돌려줘야 한국인의 정 아니겠는가.
에어로크 왕국에 정을 알려주리라 다짐하며 나 역시 그를 향해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그 중갑 보병은 어떻게 몰래 내려가서 전열을 정비할 생각입니까?"
한 명이면 몰래 내려갈 수 있겠지.
그러나 중갑병의 숫자만 삼만 명이 넘었다.
그 중에 절반만 몰래 내려간다 하더라도 만 오천 명이다.
그 많은 숫자가 척후병의 눈을 피해 산을 내려 간다고?
"...그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던 필릭스의 얼굴이 다시 구겨졌다.
제국군이 아가리를 벌린 채 기다리고 있으면, 언제 입 속으로 들어왔는지 모르게 하면 되지 않을까.
입을 다물게 할 수는 없으니, 눈을 찔러 버리면 된다.
아가리에 음식이 들어왔는지 안 왔는지 모르게 말이다.
밥상을 차려준 필릭스에게 감사를 표하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잘 먹을게 이 새끼야.
"그건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자네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