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내기
* * *
"안됩니다."
차가울 정도로 단호한 대답에 다시 입을 열려던 록센 자작은 주변 시선이 모두 냉랭함을 느끼곤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참모는 절대 불가능 하다는 듯 단호한 얼굴을 지었다. 에어로크 북부 칼멘 백작의 가신인 필릭스라는 남자였다.
"...이유는?"
"록센 자작님과 전략 보고서를 쓴 인재라는 건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제 스물을 넘긴 젊은 청년입니다. 이 자리에서 가장 경험이 부족한 그에게 맡기기엔 너무 큰 일입니다."
"..."
"게다가 별다른 작전도 없이 단순히 산맥을 거슬러 올라가 습격을 준비 중인 적들을 찾는 건 이 자리에 있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말에 스승님도 나도 할 말이 없었다.
구슬의 존재를 모두에게 공개할 게 아닌 이상 말이다.
'차라리 후작이 총 사령관이라면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을 텐데...'
후작이라면 내 말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오케이를 했을 것이다.
내 마음대로 작전을 세웠던 헤르트 원정 당시처럼 말이다.
그러나 22만의 대군을 이끄는 총 사령관은 에어로크 왕국의 2왕자였다.
당연히 지난 원정같이 후작의 입김을 바라긴 무리였다.
'...무작정 비밀 작전이 있다고 말 할 수도 없고...'
정확한 작전도 설명하지 않고 큰 전공을 세우면 오히려 세작으로 의심 받기 딱 좋았다.
"록셀 자작님. 차라리 경험이 많은 지휘관을 보내는 게 어떻습니까. 아니면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자네가?"
처음 반대의 말을 꺼냈던 필릭스라는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저희 영지 역시 테레스 산맥과 붙어있습니다. 여기 계신 그 누구보다 산맥을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숨은 적들을 찾는 일 역시 젊은 저 청년보단 제가 낫지 않겠습니까?"
"..."
나도 스승님도 그의 논리적인 말에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구슬을 꺼내 보여줄 수도 없고...
눈 앞에서 공적을 빼앗기게 생겼다.
막사에 모인 참모진들 역시 그게 더 합리적이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경험도 없는 청년보단 이 지역에서 살던 사람이 산맥에 통달한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게다가 경험도 많으니 일석이조였다.
"...이번 일은 네가 양보해야겠구나."
"..."
스승님 역시 나를 믿었지만, 나를 믿는 것과 이들을 설득시키는 일은 별개였다.
별달리 설득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스승님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나를 바라봤다.
'...앞으로 계속 나이를 걸고 넘어지겠네.'
어쩔 수 없는 가불기였다.
서로가 공적을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상태에서 억지로 스승님의 입김으로 산을 탔다가는 더 강한 질투와 시기에 시달릴 것이다.
'이번 작전은 포기해야 하나?'
맥이 탁 풀렸다.
차라리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이...
마음 속으로 반쯤 포기하려는 그때, 필릭스라는 남자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네도 인정 하겠지? 좋은 작전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자네가 수행하기엔 아직 어려. 이번 전쟁은 록셀 자작님께 배운다는 마음가짐으로 참여만 하게나."
"..."
'나대지 말고 닥치고 있으라는 거지?'
혈기가 넘지는 청년을 설득하는 말투였지만 속 뜻은 딱 그랬다.
설사 아니었어도, 내가 느끼기론 그랬다.
순식간에 막사 내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젊은 편에 속하는 참모들은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고, 나이든 참모들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에게만 하는 말이 아닌 것이다.
'타초경사.'
나를 통해 모든 젊은 참모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었다. 니들이 작전을 내면 우리가 훔칠 거라는 것을.
역겨웠다.
나도 후작의 후계자가 아니라 일반 가신이었다면 저들과 다를 바가 없었을까.
출세에 눈이 멀어 다른 참모들의 작전을 빼앗았을까.
의아한 표정을 짓던 사람들도 하나 둘 속에 담긴 뜻을 이해했는지 막사 내의 분위기가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뻔뻔한 말이었지만, 오히려 나이든 참모들은 뻔뻔하게 주변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딴 사람들이 참모라고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건가?
"...그럼, 이렇게 하죠."
그때 침묵이 내려앉은 막사 내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자들만 가득한 막사 내에서 퍼진 여성의 목소리에 모두가 시선을 돌렸다.
그리 크지도 않은 목소리가 여유롭게 흘러나왔다. 자연스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끈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 넓은 산맥을 혼자 돌아다닐 수는 없지 않나요? 여러 명이 참여하면 더욱 효과적일 거에요. 그렇죠?"
"안된다."
"이유는요?"
"그러면 명령 체계에 혼선이 생..."
"따로 작전을 짜면 되죠."
"...뭐?"
필릭스라는 남자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루시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설마 젊은 여인이 자신의 말을 끊을 줄 몰랐는지 남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분노일까. 민망함일까.
어쨌든 막혔던 속이 조금 풀리는 기분에 절로 미소가 나왔다.
"그러면 누가 가장 뛰어난 참모인지 알 수 있지 않겠어요? 나잇값을 하는지 안 하는지도 알 수 있고요."
다시 한 번 막사 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번엔 반대였다. 젊은 참모들은 웃음을 숨기느라 고개를 돌렸고, 나이든 참모들은 순식간에 얼굴이 벌게졌다.
젊은 우리들한테 지면 나잇값도 못하는 거니 뒤로 빠져라.
펠릭스라는 남자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한 수였다.
"테레스 산맥과 붙은 영지에 사셨다는데, 유리한 조건 아니신가요?"
"..."
혹시나 빠질 생각 하지 말라는 루시의 마지막 말에 남자는 얼굴이 더욱 굳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그의 표정을 바라보는 루시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어디서 개가 짖느냐는 듯한 얼굴.
"...역시 젊은 게 좋군. 좋은 패기야. 자네 말대로 내가 대표로 나오지. 그럼 그 쪽은 누가 대표로 나설 건가?"
"당연히 카인이죠. 그가 가장 먼저 건의를 했으니까요. 좋은 작전이 있으니 그런 말을 한 게 아니겠어요?"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녀의 말에 다시 한 번 모든 막사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이거 이제는 대충할 수도 없게 됐다.
적당히 처리하고 돌아오려 했는데 아닌 밤 중에 미친 듯이 산을 타게 생겼다.
그나저나...
천천히 중앙으로 나가며 그녀를 바라보자 나와 눈이 마주친 루시가 생긋 웃는다.
"잘 하고 와야 해요?"
"..."
갑자기 다른 참모들과 척을 져가며 내 편을 들어준다고?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
아니, 너무 노골적인 호의였다.
'...일단 다녀와서 보자.'
지금 꺼낼 말은 아니다.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기회를 만들어 줬으니 먹기는 해야지.
"도련님... 벌써 삼십 분이 지났습니다."
"괜찮아요."
역사서에 담길 대 전쟁의 서막을 장식한다는 설렘도 잠시였는지 산맥 중턱에 올라와 벌써 삼십 분째 눈을 감고 있는 나를 로그멜 경이 초조한 어투로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 이번 내기에서 지시면 발언권이 아예 사라지시지 않으십니까. 정말 괜찮은 거 맞습니까?"
"정말 괜찮아요. 지금 적을 찾는 중이에요."
"..."
품 안에 손을 넣은 채 느긋한 얼굴로 눈을 감고 앉아있는 주제에 적을 찾고 있다고 하니 미친 게 아닐까 싶을 것이다.
그런데 어떡해. 진짜 찾고 있는데.
"자네가 나보다 더 많은 제국군을 찾으면 나는 앞으로 참모 회의에 나오지 않겠네. 대신 자네 역시 내게 진다면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데 일조한 책임을 지고 참모 회의에서 빠지게."
루시의 부름에 중앙으로 나온 내게 펠릭스라는 남자가 했던 말이었다.
분위기는 자기랑 루시가 만들어 놓고 나한테 뒤집어 씌우는 행동이 어이가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이 산맥은 자신의 홈그라운드 아닌가?
뻔뻔함이 극에 달하면 저런 모습인가.
적군 찾기 말고 강냉이 찾기로 종목을 바꾼 뒤 옥수수를 털어 버리고 싶었지만, 속으로만 생각했다.
내가 동의를 하자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그 자리에서 작전서를 쓴 스승님은 바로 옆 지휘관 막사로 들어가 작전서를 내밀었고, 후작과 2왕자를 비롯한 지휘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가 빠른 지휘관들은 주도권 잡기라는 것을 한 눈에 파악했겠지.'
한두 명도 아니고 서른이 넘는 참모들이 모였다.
지휘관 막사도 꽉꽉 들어찬 정도인데, 참모진들이라고 주도권 싸움이 없을 리가 없었다.
2왕자 같이 권력이 깡패인 자가 참모진들 사이에는 없었으니 필연히 일어날 일이었다.
스승님이야 전설이지만 직접적인 상관이 아니었으니 출세에 눈이 먼 자들이 순순히 말을 따를 리가 없었다. 스승님 역시 그런 분위기를 알고 있는지 늘 중재의 역할만 맡고 있었다.
"...그럼 도련님만 믿겠습니다."
목소리라도 떨지 말던가.
말과 다르게 목소리는 불안감으로 벌벌 떨고 있으면서 믿는다니.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옆에서 얼쩡거리는 로그멜 경 때문에 도통 집중이 되지 않았다.
"저쪽으로 가 계세요."
"...네."
결국 축객령을 당한 로그멜 경이 부하들과 함께 털레털레 멀어졌다.
"..."
저렇게 로그멜 경이 불안해 할 정도로 내가 가만히 있는 이유는...
'적이 안 보여.'
하나도 안 보였다.
어둑한 한 밤 중에 나무가 그득한 산맥이라 찾기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그걸 제하고서라도 제국군이 도통 보이질 않았다.
내가 찾는 건 나무 위나 바위 사이에 숨어있는 제국의 척후병들이 아니었다.드넓은 산맥에 제국이 척후병 하나 숨겨 놓지 않았을 리가 없다.
나는 우리 군을 습격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병력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22만에 달하는 대병력이 좁은 오솔길로 가지는 않는다. 테레스 산맥을 넘어갈 길은 한정되어 있기에 당연히 제국군 역시 우리의 진격로 근처 수풀에 숨어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산맥을 포기했나?'
그게 말이 되나.
자연적으로 행렬이 길게 늘어질 수 밖에 없는 왕국군을 습격할 좋은 기회인데?
한 백여 명만 왔다면 안 보이는 게 맞다.
이 넓은 산맥에서, 그것도 한밤 중에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그러나 우리 병력은 무려 22만이다.
아무리 좁은 산길에 행렬이 길게 늘어진다고 해도 겨우 그정도의 병력으로 습격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렇게 고민을 하는 사이 벌써 달이 기울기 시작했다.
해가 뜨기 전에 막사로 돌아가야 하는데...
해가 모두 뜨기 전에 돌아가지 못하면 그 역시 패배로 간주하기로 약속했었다.
제국군에게 들켜 죽었는지 알 길이 없기에.
이 주변은 모두 살펴봤지만 도통 보이는 것이 없었다.
초조함에 시선을 위로 올려 산맥 전체를 시야에 잡았다.
'불꽃도 안 보이고... 움직임도 없고... 대낮이라면 뭐가 좀 보였을 텐데... 신한테 검색 기능 같은 거라도 넣어 달라고 할까.'
역시 간절하면 신을 찾게 되는 걸까.
일 년째 모습을 보이지 않는 그 남자가 떠올랐다.
정말 아무도 없을까.
혹시 다나크 제국 쪽 산맥 입구엔 있을까 싶어 시선을 옮겼다.
'...없네.'
없다.
구슬 하나만 믿고 올라왔는데 하나도 없었다.
혹시나 내가 놓친 거고 그 남자가 습격을 발견한다면...?
열이 뻗쳐 화병으로 죽으리라.
구슬까지 사용해놓고 내기에 지면 구슬을 가질 자격이 없었다.
'에이씨 어디 있는 거......'
짜증이나 산맥 여기저기를 막 돌아 다니던 그때, 실수로 산맥을 넘어 다나크 제국의 영토로 시점이 옮겨졌는데 무언가가 보였다.
'...어?'
다나크 제국에서 올라가는 테레스 산맥의 입구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평원에 제국군이 주둔지를 차린 것이 보였다.
참호가 없었다. 목책도 보이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건 수많은 횃불, 어마어마한 숫자의 말들과 수레, 족히 이백 개는 넘어 보이는 막사.
......이런 시발.
"...로그멜 경."
"예? 드디어 찾으셨습니까."
"내기는 끝났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