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루시
* * *
4월 1일까지 펠릭센 평야로 모인 병사는 총 22만 명이었다. 그 넓고 넓었던 평야가 수많은 수레와 막사로 꽉 들어찼다.
가장 인구가 적은 에어로크 왕국이 22만 명이라니. 정말 헤르트로 4국 동맹이 전부 모였으면 백만이 넘는 연합군이 탄생할 뻔했다.
'보기는 좋았겠는데... 하지만 그러면 오히려 손해야.'
백만 명이 하루에 먹는 식량만 계산해도 정신이 아찔했다.
헤르트에서 모든 군량을 동원할 수 없으니 자연히 다른 왕국에서도 지원을 보내야 하는데, 병참선이 어마어마하게 길었을 것이다.
이미 이 곳에 모인 22만 명이 먹을 군량이 담긴 수레만 해도 평야의 한 부분을 당당히 차지하는 중이었다.
"두 갈래로 나뉘는 게 가장 좋아 보입니다."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려도 한 길로 가는 것이 좋습니다. 습격을 당하면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제국으로의 진격 전 후작은 지휘 막사로 향했고, 참모로 배정된 나와 스승님은 지휘 막사 옆 참모진들이 모인 막사에 들어왔다.
처음 겪는 참모 회의에 설렘도 잠시, 회의는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진격로를 정하는 단순한 사항 하나하나까지 수많은 고성과 의견이 오고 갔다.
"원래 이런 분위기 입니까?"
구석에 가만히 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내가 스승님께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회의는 처음 해봤으니 알 리가 있나.
"...보통은 안 그렇지. 몇 가지 경우를 빼곤 말이다."
"몇 가지 경우요?"
"전황이 아주 유리하거나, 부대가 아직 통합이 되지 않았을 때 보통 이런 분위기다.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 하는 거다."
"...주도권이요?"
무엇을 위한 주도권을 말하는 거지?
참모들 사이에서도 파가 나뉜다는 건가?
"내가 알기로 에어로크 왕국에서 지난 몇십 년 동안 이렇게 많은 수의 병력이 동원된 적이 없다. 여기에서 자신의 제안한 작전이 성공하면 한번에 명성을 날릴 수 있는 좋은 기회 아니겠느냐."
"..."
"게다가 운이 좋으면 작위도 받을 수 있겠지. 나처럼 말이다."
그제야 눈 앞의 이 상황이 이해가 됐다.
귀족의 가신 신세에서 벗어나 새로운 귀족에 합류하고 싶어하는 평민들의 몸부림인 것이다.
"...상황이 더 복잡해졌습니다."
"각자 영지에서 한 명씩 만 데리고 와도 20명이 넘는다. 우리처럼 두 명이 온 경우를 생각하면 이 난리가 이해가 되지 않느냐."
중앙의 지도를 보며 언성이 높이는 사람만 열 명이 넘었다.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 흥미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사람, 완전히 방관한 채 막사 구석에 서있는 사람.
스승님의 말을 들으며 주변을 둘러보던 그때, 나를 바라보던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여자?'
여자가 있다고?
깜짝 놀란 내가 눈을 크게 뜨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그 여인이 천천히 다가왔다. 키는 160이 조금 넘을까. 에어로크 왕국의 사람인 걸 확인시키 듯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래도 내갑은 입었네.'
아무 생각 없이 놀러 온 것은 아닌지 얇은 외투 안으로 상반신을 가리는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혹시 록셀 자작님 이신가요?"
"...맞네만."
내가 가만히 바라보던 사이 앞까지 다가온 여인이 느릿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성이 오가는 막사의 한복판인데도 참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아니, 요염하다고 해야 할까.
가까이서 보니 왼쪽 눈 밑에 찍힌 점이 시선에 들어왔다.
"정말 존경하는 분을 여기서 뵐 줄은 몰랐어요. 혹시나 싶어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진짜 록센 자작님이셨군요."
"고맙네. 여인의 몸으로 오기 힘든 곳인데 용기가 대단하군. 어디 영지에서 왔는가?"
"동쪽에 있는 아슬란 백작 영지에서 왔어요. 아버님은 옆 막사에 계시겠네요."
"...아슬란?"
마지막 대답은 내 입에서 나왔다.
아슬란... 거기 아니야?
내가 처음 상행을 나와 알만 왕국의 국경에 도착했을 때 들렀던 영지였다.
상해을 나온 나를 보며 간을 봤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 우리 영지를 아시나요?"
"아슬란 백작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가요?"
거진 2m는 되어 보이는 신장에 온 몸이 근육질로 뒤덮인 곰 같은 인상을 줬던 백작이었다.
눈 앞의 이 여우같이 요염한 여자가 그 백작의 딸이라고?
'...이거 딱 스파이 느낌인데?'
전형적인 스파이 느낌이 물씬 풍겼다.
여유로운 몸짓, 막사 중앙에서 일어나는 고성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태도, 아슬란을 안다는 말에 당황하는 말투. 마지막으로 뜬금 없지만 눈 밑의 점까지.
예전 현대에서 봤던 주말 연속극에서 떠올린 자연스러운 선입견이었지만, 어쩌겠는가. 너무 인상 깊게 봐서 선입견이 생길 정도로 기억에 남은 것을.
진짜든 아니든, 확실하지 않으니 넘어갈 생각이었다. 알아볼 시간은 충분하고 나에겐 충분히 알아낼 능력이 있으니 말이다.
"백작님은 잘 계십니까?"
"늘 똑같으세요. 이번 전쟁도 꼭 참여하시겠다고 어머니에게 영지를 맡겨 놓고 나오셨어요."
전쟁광인 아버지를 못 말린다는 말투로 그녀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아닌가?'
너무 자연스러운 대답에 다시 헷갈린다.
...설마 둘이 대면시키면 바로 들통나는데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여전하신가 보군요.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지그하르트 후작 영지에서 온 카인입니다."
"어머, 알아요. 록셀 자작님과 이번 전략 계획서를 만드신 분이시죠? 실제로는 처음 뵀는데 정말 잘생기셨네요."
"..."
"저는 루시에요. 아슬란 루시."
"......반갑습니다."
****
그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고함이 오가던 참모 막사는 결국 록센 자작이 중앙으로 나서는 순간 장내가 정리됐다.
아무리 출세에 눈이 먼 사람들이라도 참모의 자리로 정상에 선 사람이 눈 앞에 있는데 큰 소리를 내기는 힘들겠지.
별 다른 말도 없이 장내를 정리한 록센 자작은 미리 준비해뒀던 전략 보고서를 참모진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어차피 산맥을 넘는 동안 할 일도 없을 테니 모두 숙지하게. 설마 한 번도 안 읽고 이 자리에 서있는 사람은 없기를 바라네."
"...그런데 제 스승님을 뵈러 온 것 아니었습니까?"
대화가 끝났음에도 루시는 여전히 카인 옆에 서서 록센 자작의 말을 듣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의아했는지 카인이 고개를 돌려 질문을 던져왔다.
'솔직하게 말해야 해.'
"으음... 사실 전 카인님에게 더 관심이 많은 걸요."
"네?"
"록셀 자작님의 명성만큼이나 유명한 게 깐깐한 성격이란 말이에요. 그런 분이 은퇴를 하고 나서야 제자를 들이셨다는데 당연히 관심이 생기지 않겠어요?"
"..."
생긋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카인을 빤히 쳐다봤다.
갑작스러운 고백이라 그럴까. 아니면 열심히 준비한 화장이 잘 통했을까.
얼굴이 살짝 붉어진 카인이 시선을 회피했다.
생각보다 더 소심한 그의 반응에 루시가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과연 스무 살이 넘도록 약혼도 하지 않았다더니 머리는 총명하나 숫기 없는 총각으로 보였다.
'하긴, 록셀 자작과 전략 보고서를 쓸 정도로 일에 몰두했을 텐데 여자를 만날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
"혹시 카인님은 약혼녀가 있으신가요?"
수줍은 얼굴로 물어보자 그의 얼굴이 더 붉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혼란스러워 하는 표정이다.
"...없습니다."
"그럼 사랑하는 사람은요?"
"......없습니다."
그래 보였다.
이미 더 이상 빨개질 수도 없을 정도로 붉은 얼굴을 한 그는 이미 얼굴로 대답을 하는 중이었다.
생각보다 쉬울 듯 했다.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웃음을 터트리며 다시 카인에게 말을 걸었다.
"어머... 이렇게 잘생긴 얼굴을 가졌으면서 아직도 연인이 없어요?"
"..."
"우리 앞으로 잘 지내봐요. 이번 전쟁 카인님만 믿을게요."
"...네."
아무렇지 않은 척 카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수련도 열심히 하는지 손바닥에 굳은 살이 잔뜩 배겨있었다.
손 끝으로 손바닥을 살짝 긁자 마주 손을 잡던 그가 황급히 손을 뺐다.
'이 정도로 여자한테 내성이 없다고?'
너무 쉬운 거 아니야?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젠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겠다는 얼굴로 중앙에 록센 자작을 바라봤다.
무언가 아쉬운 듯 옆에서 자신의 얼굴을 조금씩 훔쳐보는 그의 시선을 느꼈지만, 루시는 끝까지 모르는 척 앞을 바라봤다.
4월 2일.
드디어 22만의 대군이 천천히 산맥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대열을 맞춰 걸음을 옮기는 부대의 발걸음 소리가 평원을 진동시켰다.
영화 속에서나 듣던 진군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CG도 합성도 아니다.
무려 22만의 병사가 내 앞에서, 뒤에서 그리고 옆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 맛에 전략 게임에 빠졌었지.'
뽕이 차는 이 생생한 현장에 절로 텐션이 올라갔다.
그때, 바로 옆에서 내 모습을 지켜보던 스승님이 입을 열었다.
"전쟁 놀이 하러 왔느냐?"
"...이래서 열병식을 하고 출병식을 하나 봅니다. 보고만 있어도 사기가 오르는 기분입니다."
즉석에서 생각해낸 것 치곤 나름 괜찮은 답변이었다.
다행히 잘 통했는지 스승님 역시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도 이렇게 많은 병사들로 전략을 짜는 게 처음이다. 그래도 미소는 조금 지우거라. 남들이 보기 흉하다."
"예."
"그나저나... 정찰병이 앞서 가고 있기는 하지만 분명히 습격이 있을 것이다. 테레스 산맥이라는 천혜의 요새를 그냥 넘길 정도로 다나크 제국이 생각이 없지 않아."
"맞습니다."
자신 같아도 산 곳곳마다 병사를 배치시켜 게릴라전을 유도할 터였다.
이 높고 험준한 산맥에 제국군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건 너무 낙관 적인 생각이었다.
"혹시 좋은 방법이 있느냐."
"예?"
"적의 기습을 막을 좋은 방법이 있느냐는 말이다."
"있긴 합니다만..."
"있다고?"
왜 물어봐놓고 놀라?
"함께 온 로그멜 경을 포함해 약간의 병력을 빼주시면 제가 기습을 막아 보겠습니다."
우리 영지에서 출발한 병사만 2만 명이었다. 몇 없는 기사단도 대부분 나왔고 그 중 로그멜 경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그의 힘이 필요했다.
"로그멜 경은 말을 탄 기사다. 알고 있지 않느냐?"
산맥을 넘는데 기병이 왜 필요하냐는 뜻이었다. 외국에 살아 그의 자세한 과거는 모르기에 나온 당연한 질문이다.
"예. 그리고 산도 잘 타지요."
기사가 되기 전까지 외성 밖에서 살던 로그멜 경은 개천에서 용난 케이스였다. 자연히 말보다 산을 더 잘 타 레인저가 됐으면 한 이름 떨쳤을 것이란 말도 종종 들려오곤 했다.
"...우선 알겠다. 너도 생각이 있겠지. 오늘 저녁 산맥 입구에 도착하니 그 곳에서 한번 건의해 보겠다."
"감사합니다."
모든 영주민들이 내성에서 사는 것은 아니다. 8할이 넘는 영주민들은 성 밖이나 영지 내 다른 마을에서 살아갔다.
그것이 광부가 됐든, 사냥꾼이 됐든, 약초꾼이 됐든 외성에 사는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선 산을 잘 타야 했다.
지그하르트 영지만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에어로크 왕국 내 모든 영지의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기병은 적고 기사단은 약했지만, 산을 타고 활을 쏘는 레인저는 발달할 수 밖에 없었다.
'산을 잘 타는 기사를 필두로 한 병사들과 내 구슬.'
평원에 살던 다나크 제국군을 찾는 일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것이다.
제국의 능력이 구슬 무효화 같은 말도 안되는 능력을 가진 게 아닌 이상, 설마 정말로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가진 능력은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대신 이 작전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큰 문제.
'...좆 빠지게 산 타고 다녀야겠네.'
로그멜 경도 나도 테레스 산맥은 처음이기에 위치를 알려줄 방법이 전무하다는 아주 큰 단점...
그래도 역사적인 전쟁의 첫 장에 내 이름이 들어간다는 그 하나 만으로 충분히 할 가치가 있었다.
일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운동 했는데 설마 일반 병사들 보다 산을 못 탈까.
'전쟁도 내가 일으켰으니 시작도 내가 끊어야지.'
오늘 저녁 회의가 끝나면 곧바로 산을 탈 생각이었다. 이 기세를 몰아 단번에 적들을 밀어내리라.
"안됩니다."
그러나, 내 작전은 시작도 못해보고 반대에 부딪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