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즐거운 명령
* * *
"아버님. 에어로크 왕국이 테레스 산맥을 넘어온다는 소식이 왔어요. 산맥을 단단히 틀어 막아야 하지 않을까요?"
"...알겠다."
다나크 제국의 수도 한켠에 있는 유라페스 공작 저택은 그 크기가 황성 못지 않게 거대한 크기를 자랑했다. 외벽을 은으로 장식한 저택은 달이 떠오르는 밤엔 스스로 발광하는 듯 아름다운 광채를 반사했다.
그 거대한 저택의 중앙, 공작와 주요 가신이 모여 회의하던 회의실엔 화려한 복장을 한 중년 남성과, 젊은 처녀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산맥을 쉽게 넘기 위해 기병은 거의 없을 거에요. 산맥을 모두 넘어 평지로 들어온 순간이 기회에요. 기병을 최대한 많이 보내주세요."
"...기병을 위주로 보내마."
"감사해요. 아버지."
순순히 딸의 말을 따르는 공작을 향해 아버지를 닮은 붉은 머리칼을 한 처녀가 미소를 지었다.
그때,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공작이 눈을 찡그리기 시작했다. 편안히 앉아있는데도 무언가 고통스러운 듯 이빨 갈리는 소리가 넓은 회의실에 울려퍼진다.
그럼에도 여인은 당황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오히려 알고 있었다는 듯 편안한 표정으로 눈 앞의 중년을 바라봤다.
"잠시 제 눈을 보시겠어요?"
"..."
"어서요."
나긋나긋한 그 목소리에 무슨 힘이라도 있을까. 잠시 반항하는 듯 몸을 덜덜 떨던 공작이 이내 자신의 딸을 바라봤다.
섬뜩할 정도로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린다.
공작은 멍한 눈으로 그녀의 붉은 눈을 바라봤다.
갈색으로 빛나는 공작의 눈과는 전혀 다른 색이다.
"지금 아버님이 두통에 시달리시는 이유는 모두 헤르트 때문이에요. 아들을 죽인 헤르트에게 복수를 해야 해요."
"..."
"그러니 아버님. 헤르트로 직접 출정을 해주셔요.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갈 거에요."
"...알겠다."
"역시 제 말을 잘 들으시네요. 감사해요."
"...네가 이 제국의 희망이니 당연... 하다."
머리카락처럼 붉은 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공작이 멍한 눈으로 천천히 대답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잘 지내시나요?"
"...건강히 잘 지내신다."
"다행이네요. 한 번 뵀으면 하는데... 아버님이 도와줄 거죠?"
"..."
붉은 광채를 쏟던 여인의 눈이 이젠 눈에 불꽃을 심은 듯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더욱 더 강렬해진 그녀의 붉은 안광에 공작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지위도, 이유도 없이 황제를 만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야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제국의 미래이자 희망인 딸의 부탁이라면 충분히 들어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딸의 붉은 눈을 보며 더욱 깊이 새겨지고 있었으나, 공작 스스로는 알 길이 없었다.
한참을 붉은 광채를 뿌리며 공작을 바라보던 헤일리의 눈이 서서히 안광이 사라졌다.
이내 붉은 안광이 사라진 눈동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공작과 똑같은 갈색의 홍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젠 황제만 남았어요. 제 말 뜻을 아시나요?"
"..."
유라페스 공작가의 공식 후계자. 헤르트로 출정갔던 유라페스 에슬러의 여동생 유라페스 헤일리는 옅은 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모두 신의 뜻이에요. 저는 아레스님의 대리자로서 이 대륙을 정복해야 한답니다."
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까.
그 말에도 여전히 공작은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사실... 그거 아세요? 에어로크 왕국을 막기 위해 보낼 군대는 미끼라는 걸요."
"달콤한 과실에 취해 있을 때... 그때가 에어로크 왕국의 대리자를 처단할 때에요."
"황제와 오랜 시간을 함께 있어야겠어요. 그 누구보다 확실하게... 제 말을 듣도록 말이에요."
딸의 입을 통해 쏟아지는 충격적인 사실에도 여전히 공작은 반응이 없었다.
그럼에도 헤일리는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이미 제국은 대부분 자신의 손에 넘어왔다.
눈 앞의 공작은 쓸모가 다했다.
이제 자신이 직접 공작이 되리라.
공작을 바라보던 헤일리의 눈에 다시 붉은 안광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오늘이 마지막으로 뵙는 날이네요. 그 동안 수고하셨어요. 그래도 마지막엔 모든 사실을 깨닫게 되실 거에요."
"...알겠다."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하던 공작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이 유쾌한 듯 헤일리가 또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의 말마따나 아버지는 죽기 직전 모든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명령'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후작님."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자네도 왔는가."
"이 자리를 빠질 수는 없지요. 저도 역사서에 한 줄은 쓰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지그하르트 후작이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눈 앞의 백작 뿐만이 아니라 눈에 익은 얼굴들이 여럿 보였다.
모두 다나크 제국으로 진격하기 위해 모인 영주들이었다.
테레스 산맥 밑 펠릭센 평야는 사실 평야보단 고원에 가까웠다. 해발 3,000m에 가까운 높이에 있는 평지대였는데 그나마도 다른 영지들에 비하면 낮은 고도였다.
그러니 자연히 평야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다른 왕국의 사람들이 듣기에는 어이가 없는 말일 것이다.
에어로크 왕국 내 말 방목이 가능한 거의 유일하다 싶은 장소인지라 이 평야는 왕국이 직접 관리를 하는 국유지였다.
일 년 내내 사람보다 말이 더 많은 이 황량한 고원에 수십 년 만에 말보다 사람이 더 많아지고 있었다.
그것도 압도적인 숫자 차이로 말이다.
"각 왕국이 따로 진격을 해 제국의 힘을 분산키신다는 전략 보고서는 정말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후작님의 지혜에 탄복했습니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에서 젊은 귀족 중 한 명이 말을 꺼냈다. 그 말에 모두들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후작을 바라봤다.
그러나 후작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곤 고래를 돌려 뒤에 서있던 나를 불렀다.
"그건 내 아들이 쓴 거라네. 헤르트의 방패라 불리는 록센 자작과 함께 말이지."
"...헤르트의 방패?"
수많은 시선이 후작을 넘어 나와 스승님께 달음박질치며 달려왔다.
'조금 부담스러운데.'
같은 왕국 내 귀족들의 시선이 한번에 몰리니 자연스레 긴장감이 올라왔다.
그래도 첫 만남이다.
첫 인상을 잘 남겨야 이번 전쟁에서 참모 생활이 편하겠지.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려는 그때,
"저, 정말이군요! 헤르트의 방패가 어떻게?"
"은퇴를 하셨다는 소문 이후로 소식을 못 들었는데 후작님 영지에 계셨습니까?"
"...저를 알아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지금은 은퇴를 하고 후작님의 자제 분을 가르치며 지내고 있습니다."
경악하는 귀족들에게 스승님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인사했다.
나이와 명성은 하늘을 찌르지만 지금은 은퇴를 한 신분이고 작위도 자작이니 존댓말로 대답하신 건가.
"어르신 말을 놓으시지요! 존대를 하시면 오히려 불편합니다! 이 대륙에서 헤르트의 방패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어디 다른 세계에서 살던 사람도 아니고 말입니다!"
처음 후작과 인사하던 그 백작이 스승님의 존대에 과분하다는 듯 고개까지 저어가며 스승님을 만류했다.
그 말을 들은 스승님의 고개가 살짝 꺾이며 자연스럽게 나를 바라봤다.
...후작 역시.
'...'
유구무언이다.
정말 다른 세계에서 살다 왔다고 말을 할 수도 없고.
어디서 한 번 겪은 듯한 이 장면에 괜히 울컥했다.
"...그렇다면 편하게 말을 하겠네. 어차피 오늘 내일 하는 늙은이니 기분 나빠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물론입니다.그럼 그 전략 보고서가 헤르트의 방패라 불리신 록센 자작님께서 생각하신 전략이라니... 벌써부터 승리한 기분입니다."
그 말에 모두들 밝은 미소를 지었다. 전설이 함께하니 얼마나 든든하겠는가. 화기애애하던 막사가 더욱 들뜨고 있었다.
봤느냐? 네가 그렇게 구박 하던 스승님이 이 정도로 유명하다.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스승님의 시선을 피했다.
...아까부터 저 백작이 마음에 안 든다.
무엇보다, 모든 관심이 스승님에게 몰려 이제 인사를 하기에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결국 나는 이 애매한 분위기에서 다시 한 번 내 존재를 환기 시켜준 후작 덕분에 제대로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시작부터 꼬이네.'
젊고 작위가 없어 무시를 당할 거라는 예상은 했는데, 스승님의 후광에 밀려 무시를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다고 스승님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앞으로 일어날 전쟁 중 내 발언권이 엄청나게 약할 게 눈에 뻔했다.
그래도 뭐 어떤가.
저들이 내 말을 안 들어주면 스승님에게 말하면 되지.
'그것도 안되면 후작에게 말하고.'
혈연, 지연이 괜히 좋은 건가.
어차피 신분제가 버젓이 있는 세상인데 뒷배 좀 쓴다고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게 대충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화기애애했던 모임은 금방 끝이 났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설치된 지휘 막사를 오를 때는 몰랐는데, 모임을 끝내고 나오니 일대 장관이 한 눈에 보였다.
물경 20만이 가까운 대군대가 드넓은 펠릭센 평야에 주둔지를 차린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 산을 타고 내려오는 부대들이 천천히 평야에 진입하며 합류 중이었다.
먼저 도착한 부대들은 오와 열을 맞춰 막사를 펼쳤다. 부대 하나하나 마다 작은 마을을 이룬 것처럼 보인다.
고작 700만이 조금 넘는 인구를 가진 에어로크 왕국에서 이 정도의 부대가 모였다.
'...에어로크 왕국의 거의 모든 힘이 모였다.'
일 년 동안 머리가 쪼개지도록 노력한 보람이 있었다.
이 정도의 부대라면 쿠데타도 식은 죽 먹기 아닐까.장엄한 광경을 보자 심장이 조금씩 빨라졌다.
사흘.
사흘 남았다. 4월 1일 진격의 날까지 단 사흘 남았다.
다나크 제국도 설마 에어로크 왕국에서 20만이 넘는 대군대를 보낼 줄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최대 멸망, 최소한 반 토막.'
이번 전쟁 한 번으로 다나크 제국을 무너트릴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 정도의 군대라면 제국을 등을 찌르고 치명상을 입힐 수 있으리라.
전장에 나오니 사라졌던 습관이 다시 도진다.
오랜만에 품 안에 구슬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계속해서 펠릭스 평야를 바라봤다.
내가 만든 결과물이 뿌듯해 한참을 언덕 위에 서서 평야를 바라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