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업보
* * *
봄 꽃이 필 무렵 붉은 깃발을 맨 전령이 영지를 찾아왔다.
나라에 중대한 사안이 생겼을 때를 의미하는 붉은 깃발이었지만, 영지 내 그 누구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올 것이 왔을 뿐.
붉은 깃발을 보며 당황하기엔 이미 온 영지가 전쟁 준비에 한창이었다.
카인은 후작의 호출에 스승님과 함께 집무실로 찾아갔다.
붉은 바탕에 금색 실링왁스로 밀봉된 편지가 탁상 위에 놓여져 있다.
스승님과 몇 달에 걸쳐 만든 보고서와 전략 계획서 수십 장을 보냈는데, 돌아온 건 작은 편지 한 통이다.
고작 이 한 통을 받기 위해 지난 일 년 동안 머리가 빠질 정도로 고생을 했다.
이미 후작은 내용을 확인한 듯 탁상 위에 편지를 들어 내게 건넸다.
뭐라고 써있을까.
몇 달에 걸쳐 만든 보고서에 대한 칭찬이 써있을까.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를 받아 들고 스승님과 함께 편지 봉투를 열었다.
「다나크 제국의 군대 헤르트로 움직임 확인. 병력을 이끌고 4월 1일까지 테레브 산맥 남쪽 펠릭센 평야로 합류 요청」
'...어디 군부에서 보냈나?'
영지의 안녕부터 시작해 구구절절 사연이 써있을 줄 알았는데, 고작 한 줄 딸랑 써져 있다.
"원래 이런 식으로 편지가 날라옵니까?"
"비슷하지."
"..."
이러니까 야만인 소리를 듣지.
옆 영지도 아니고 수도에서 날라온 편지가 이런 식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어차피 군량 문제부터 전쟁 대금이나 병력 동원비 등은 각 영지의 관리들이 협의하지 않느냐. 나에게 까지 그런 내용을 써 보낼 필요는 없지."
정론이었다.
그렇기에 할 말이 없었다.
머리 아픈 숫자는 관리들이나 보면 될 일이긴 했다.
"출발은 언제 할 예정입니까?"
"생각보다 기한이 짧구나. 허나 이 정보가 헤르트를 거쳐 수도에서 우리 영지까지 오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을 걸 생각하면 이미 헤르트는 전투 중일지도 모르겠다."
"...그럼?"
"이틀 후에 출발하자꾸나. 준비는 끝났지만 마지막으로 최종 점검은 해봐야 하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이틀...'
소식을 기다리곤 있었지만, 생각보다 남은 기간이 짧았다.
이번 전쟁은 얼마나 걸릴까.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머나 먼 헤르트까지 안 가도 된다는 점 아닐까.
"공주님도 모시고 갈 것이냐."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그때 침묵을 유지하던 스승님이 질문을 던졌다.
내 전담 시녀가 된 지 일 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스승님은 엘라를 공주님이라 불렀다.
"놓고 갈 생각입니다."
"...잘 생각했다."
이번 전쟁을 엘라와 함께 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정체를 다른 참모진들에게 소개 시킬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한 번 그녀를 잃을 뻔한 경험이 나를 못내 불안하게 했다.
후작 역시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도 돌아가서 준비를 하거라. 인사도 미리 해놓고."
"알겠습니다."
스승님과 함께 방을 나서니 이제야 조금 실감이 난다.
벌써 부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장장 일 년을 넘게 준비했다. 그러나. 적들 역시 마찬가지다.
'다나크 제국의 능력이 변수다.'
부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었으면 했다.
대리자에 관한 이야기는 스승님에게도 할 수 없었기에 여러 능력과 관련된 변수는 혼자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왕국의 능력은?
'이번 전쟁에 드러나겠지.'
파딘 제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가 전쟁에 참여한다. 분명 하나 둘 밝혀지리라.
제국과의 전쟁이 끝나면 그 다음은 어디와 전쟁이 일어날까. 너무 먼 미래의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언젠가 해야 할 고민이다.
알만 왕국 아니면 파딘 제국 아닐까.
이번 전쟁으로 양 제국의 균형이 깨지게 된다.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파딘 제국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다나크 제국이 무너지면 무언가 움직임이 있으리라.
그러고 보니 미하일은 잘 지내나?
이 세계로 넘어와 처음 상행을 갔을 때 만났던 그가 떠올랐다. 밝은 금발에 준수한 외모로 딱 서양 영화 주인공 같은 외모로 여자 깨나 울릴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언젠간 만나지 않을까.
알만 왕국 서부에 영지가 있다고 했으니 다음 번엔 한 번 얼굴이나 봐야 할 듯싶었다.
'일단 이번 전쟁은 끝내고.'
코 앞에 들이닥친 전쟁 먼저 끝내고 그 다음 계획을 짜자. 너무 먼 미래를 보기엔 발등에 떨어진 불이 급하다.
자연히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방에서 기다릴 엘라와 시아라에게 할 말이 많았다.
"카인 따라가고 싶다."
"..."
침대에 누워 속삭이는 시아라의 투정에 나는 침묵을 유지했다.
위험해서 안돼. 너를 지켜줄 수 없어.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알면서 하는 투정임을 그녀도 나도 알기에 그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제 방으로 돌아와 그녀들에게 소식을 전한 이후, 시아라와 엘라는 단 오 분도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없을 때야 소중함을 알 수 있다고 했는가.
지난 일 년 동안 함께했던 나날보다 어제와 오늘 더 애틋한 감정이 오고 갔다.
"나도 그냥 공주라고 밝히고 따라가고 싶어."
그 말에 역시 나는 침묵을 유지하며 반대 손으로 엘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상황에 엘라의 존재를 밝히면 헤르트와 에어로크 간의 트러블만 생길 뿐이다.
'엘라의 투정은 흔치 않은데.'
전쟁 갈 때가 되니 신기한 경험도 한다.
"나 없는 동안 밥 잘 먹고 기다려야 해."
"..."
"..."
"금방 돌아올게."
일부러 조금 밝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에 힘을 줘 일부러 머리를 조금 헝클어트렸다.
마음 같아선 나도 가고 싶지 않았다.
평범하게 회사 생활 하던 직장인이 전쟁터를 전전하는 게 좋을 리가 있나. 그러나 엘라와 시아라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
영지에 남아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지 알기에.
이번엔 편지도 자주 써야지.
저번 원정에서 돌아와 한동안 시아라에게 얼마나 원망의 눈초리를 받았는가.
"...흑."
내 노력이 부족했을까.
밝은 목소리와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이 무색하게 결국 시아라가 눈물을 보였다.
"이번엔 편지도 자주 쓸게."
울음을 달래려 꺼낸 말에 오히려 울음소리가 커졌다. 왼 편에 누워있던 시아라가 품 안에 파고들며 나를 꽉 붙잡았다.
"흐윽... 조심...해야 해..."
"나 신의 사도야. 목숨 네 개는 더 남았으니까 걱정 마. 한 개만 쓰고 올게."
"...흐아아아앙!"
울음을 멈춰보겠다고 헛소리를 던졌는데 오히려 울음이 더 커졌다.
식은땀이 삐질 흐르는 것을 느끼며 급하게 등을 다독였다.
"자, 장난이야. 미안해. 울지 마. 뚝."
그때 반대편에 있던 엘라 역시 내 몸을 껴안았다.
부드러운 살결이 전신을 통해 느껴진다.
"그런 장난은 치는 거 아니야. 나도 울었으면 좋겠어?"
"...미안해."
"편지 자주 써줘."
"응..."
손을 통해 그녀의 나신이 느껴진다. 부드러운 살결을 쓰다듬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
"..."
조금 시간이 지나자 들썩이던 시아라의 등이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 진정했을까.
내가 한 실수에 할 말이 없었기에 가만히 등을 토닥이고 있는데, 돌연 시아라가 물기 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 카인 닮은 아이 낳고 싶어."
"아이?"
"...응."
"..."
그렇게 해서라도 불안감을 없애고 싶은 걸까.
전쟁과 함께 할 내 운명을 안다는 듯한 그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 대륙을 통일하고 나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생각이다.
아이까지 가진 그녀들을 놓고 현대로 돌아가면 더 큰 상처를 주는 게 아닐까.
조금의 피임도 하지 않고 매번 질내사정을 하는 주제에 아이는 낳고 싶지 않는 모순이었다.
맞다. 위선이며 모순이다.
지금까지 임신을 안 한 게 기적일 정도로 모순된 행동이었다.
한계를 알 수 없는 이기적인 모순에 알겠다고도, 안된다고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정도의 양심은 가지고 있었으니까.
"...미안해. 부담 줘서... 못 들은 척 해줘."
결국 대답이 없는 나를 보며 시아라가 슬픈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결국 상처를 줬을까.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녀에게 상처를 입히는가.
피임 한 번 한 적도 없으면서 왜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말엔 책임을 회피하는가.
이 두 여인을 사랑하지 말던가.
아니면 내가 살던 세상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말던가.
지난 일 년 간 끊임없이 나를 괴롭혀온 그 모순이 결국 터졌다.
언젠가는 선택해야 한다.
현대와 그녀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아니야. 조금 놀라서. 그러고 보니까 왜 지금까진 안 생겼지? 항상 안에 사정 했는데."
"...우리가 항상 피임약을 먹었으니까. 카인에게 허락 받고 임신해야지."
결국, 내가 한 행동은 회피였다.
지금 당장은 하나를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이기적인 스스로에게 혐오감을 느끼며 화제를 돌렸다. 결국 더 큰 업보로 돌아올 것을 알면서 외면했다.
"피임을 했었다고...?"
"...당연한 거 아니야? 안 그러면 진작 임신했을걸."
알고도 모른 척 하는 걸까.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걸까.
시아라는 책임을 회피하며 화제를 돌리는 쓰레기에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전혀 몰랐어."
"아무튼 그래서... 카인이 허락해주면 이제 임신해도 될까 싶어서..."
"먹지 마."
"...정말?"
마지막 대답은 엘라에게서 나왔다. 정말 뜻밖의 말을 들은 듯 평소 답지 않은 하이톤이었다.
"응. 대신 오늘까진 먹고. 다음부턴 먹지 마."
"...알겠어."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일까.
언제 울었냐는 듯 시아라가 수줍은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가슴이 다시 진탕한다.
스스로의 대한 자괴감이 다시 치민다.
'어떻게 책임 지려고 그래.'
'그러면 어떡해. 그녀들이 이렇게 행복해 하는데.'
'언젠간 마주해야 할 거야.'
'...'
모르겠다.
결국 나는 생각을 포기했다.
당장 내일 출정인데 어차피 이번 전쟁에서 죽으면 다 도룩묵이다.
그냥 맘 편히 섹스나 하고 싶었다.
아까부터 나신의 몸으로 안겨있는 두 여인 때문에 이미 물건은 커진 지 오래였다.
팔베개를 하던 손으로 두 여인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두 여인 모두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다 깜짝 놀란 신음성을 터트렸다.
"또... 하게? 내일 출정이잖아."
"그러니까 해야지. 언제 또 할 줄 알고."
"..."
"다리 벌려."
몸을 오른쪽으로 틀어 엘라의 다리를 붙잡고 벌렸다.
급작스러운 상황에 그녀가 놀란 숨을 들이켰다.
"하윽...!"
일단 이번 전쟁에서 살아 남자.
죽으면 의미 없어.
져도 의미 없고.
더 이상 생각을 포기했다.
눈 앞에서 신음을 흘리는 엘라에게 집중했다.
영주민들에게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때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봄과 가을을 말할 것이다. 일 년 농사의 시작을 위해 파종을 할 시기엔 온 영지의 주민들이 일손을 도와 씨를 뿌렸다.
건장한 청년들은 당연하고, 노인부터 어린 소년들까지 농번기엔 모두 밭을 나갔다.
그러나 올해는 조금 달랐다. 봄이 오고 땅이 녹으며 파종할 시기가 다가왔는데도 밭 곳곳이 놀고 있었다. 비어버린 남자들의 몫을 해내기 위해 영지에 남은 여자들은 두 배, 세 배의 힘을 냈지만 역부족이었다.
"농사는 망쳐도 되니까 몸 건강히 돌아왔으면..."
씨를 뿌리던 노모가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그 모습을 보며 결혼한 아낙네가 몸을 돌린다.
영지를 다스리는 후작님과 함께 집을 나선 지 고작 일주일이 지났는데 벌써부터 그이가 그리웠다.
"제발... 제발 몸 조심히 돌아와요..."
밭두렁에 앉아 해맑게 웃는 어린 딸을 바라보며 젊은 아낙네가 간절히 빌었다.
제발 신께서 우리 남편을 지켜줬으면.
영지 곳곳에서 신을 향해 기도하는 작은 목소리가 허공을 떠돌다 사라졌다.
"카인..."
신을 향해 기도하는 작은 목소리는 저택 내 카인의 방에서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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