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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책사 시점-93화 (93/191)

〈 93화 〉 전쟁 준비

* * *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출발지가 있으면 종착지가 있으며 길이 있다는 것은 그 끝에 막다른 길이 있다는 뜻이다.

"고생했다."

"감사합니다."

만약 그 길이 힘들고 험한 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얼마나 빨리 그 길을 달려 도착을 하느냐는 개인의 재능 아닐까.

재능.

개인의 노력으로 고난의 길에서 한 발자국 더 움직일 수는 있겠지.

남들 보다 한 발자국 더 앞서 나갈 수 있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차를 타고 가면?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자동차를 쫓을 수 있을까?

'나는 이 길이 아니야.'

포기할 것이다.

재능의 차이를 실감하며 발걸음을 멈출 것이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길이 한 개가 아니라는 점이다.

어느 길은 가시밭길 일수도 있겠지만, 어느 길엔 나를 위한 자동차가 준비되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깨달은 한 가지는 나는 검에 큰 재능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건장한 신체에 의존해 길을 걸어왔다. 자동차는 아니더라도 자전거는 타고 있었다.

그러나 내게 부족한 건, 자동차가 아닌 페달을 밟은 의지 그 자체였다.

'차라리 이 세계가 조금 더 판타지 같은 세계였다면.'

검에서 오러를 뿜어내고, 손에서 화염 마법을 쏘아 보내고, 단신의 몸으로 한 부대를 막아내는 초인이 있는 세계라면 조금 더 노력하지 않았을까.

화살 하나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건 기사나 노인이나 똑같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나는 관성 적인 수련을 했다.

솔직한 마음으론, 조금 맥이 풀렸다.

새벽 바람을 맞으며 상쾌한 조깅을 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후작과 아침 수련을 했다.

조금씩 실력이 나아지는 것은 눈에 보였으나, 그래도 화살 하나에 목숨을 잃는 건 똑같았다.

"네 나이에 비하면 뛰어난 실력이다."

"감사합니다."

똑같은 말의 반복.

어느 순간부터 내게 의지가 보이지 않음을 깨달은 후작은 안타까운 눈빛을 보내곤 했지만, 나무라진 않았다.

내 장점은 검보다 머리였으니 자기 자신을 지킬 정도의 무예만 갖추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함박눈이 펑펑 내려 드넓은 연무장이 온통 하얀 세상이다.

상의를 탈의한 채 뜨거운 김을 뿜어내는 나와 후작은 천천히 검을 집어넣었다.

검은 생각보다 무겁고, 생각보다 말을 듣지 않는다.

특히나 기사들의 주력 병기인 그레이트 소드는 더더욱.

납검을 한 채 잠시 서로를 바라보는데, 후작이 입을 열었다.

"이번 겨울이 끝나면 다시 전쟁이 시작된다는 네 생각은 아직 변함이 없느냐."

"이제 세 달 남았습니다."

"..."

맞다. 아니다도 아니다. 그걸 넘어 당연하다는 듯 남은 기간까지 내뱉자 후작의 표정이 굳었다.

"수도에 편지를 보내겠다. 또 헤르트까지 가려면 미리 준비를 해야겠지."

"...아닙니다. 저흰 헤르트로 가지 않습니다."

"뭐?"

"전쟁은 헤르트에서 시작되나 저희는 헤르트로 가면 안됩니다. 헤르트는 에르딘 왕국이 도와야 합니다."

일 년 동안 마냥 놀고 먹은 것은 아니다.

몇 달 전 에르딘의 동맹 합류 의사를 묻는 전령이 온 이후 모든 업무에서 손을 뗐다.

그리곤 대부분의 시간을 스승님과 대륙 지도를 보며 지냈다.

수없이 많은 가상 전쟁을 돌리고 또 돌렸다. 상정 가능한 모든 상황을 크렉스필로 모의 전투를 치뤘다.

몇 달에 걸친 노력 끝에 스승님과 내가 낸 결론은 전선의 확대였다.

"...그럼 우리 왕국은 알만 왕국과 함께 하느냐."

"알만은 참전하지 않을 겁니다."

"뭐?"

이 것 역시 나와 스승님이 낸 결론이다.

두 파로 나뉘어 분열 중인 알만 왕국?

'수비만 하고 있어도 다행이지.'

도리어 제국을 공격하겠다고 병력을 뺐다가 다나크 제국을 지지하는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알만 왕국의 국왕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저희는 테레브 산맥을 넘어 다나크 제국의 서쪽을 공격합니다. 알만 왕국은 전선 유지, 헤르트는 에르딘과 합류하여 제국의 본대를 상대합니다.

"전선이 그렇게 넓어지면 우리는 헤르트의 소식을 한 달 뒤에나 들을 수 있다. 동맹의 의미가 있겠느냐."

"연락이 늦어지는 건 제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희가 제국의 등을 강하게 찌를수록, 헤르트를 향하는 창날이 무뎌질 것입니다."

"...알겠다. 수도에 편지를 보내마."

잠깐 대화한 사이에 몸이 다 식어버렸다. 뿌연 수증기를 피워내던 맨몸에 천천히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이다.

그 누구보다 전쟁에 대비했다.

인구도 적고 식량도 없기에 더 철저히 준비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했다.

"동짓날부터 사흘 동안 거센 남동풍을 빌려 오겠습니다."

그 옛날 제갈량이 적벽대전을 앞두고 유비와 손권 앞에서 했던 말이다.

10만의 연합군으로 80만의 조조군을 물리쳐야 하는 그 상황에 제갈량은 바람을 빌려오겠다며 화공을 제안한다.

과연, 제갈량의 예언은 현실이 됐다.

고작 10만의 병사로 80만의 대군을 물리쳤다.

정말 제갈량이 천기를 읽어 미래를 예언했을까.

'말도 안 되지.'

제갈량은 알았던 것이다.

늘 그 시기에 며칠 동안 남동풍이 불어온다는 사실을.

날씨를 조절하는 건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그러나, 미리 올 날씨를 알고 화공을 제안한 건 제갈량의 능력이었다.

전쟁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얻자.

튀어나올 모든 변수를 차단하자.

천기를 읽는 소설 속의 제갈량이 아닌, 동원 가능한 모든 수단을 이용하던 제갈량이 되고자 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차게 식은 몸 위로 눈이 떨어지고 있지만,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무조건 승리하리라.

제국을 무너트리리라.

연무장 너머로 보이는 성벽을 바라봤다.

봄 꽃과 함께 날아올 소식이 저 성벽을 넘어 도착할 것이다.

수많은 생명을 앗아갈, 어쩌면 내 목숨까지 거둬갈 소식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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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이제 열다섯 살이에요!"

머리 한쪽에 빨간 리본을 단 디아나가 밝은 얼굴로 다가왔다.

"저택에 온 지 벌써 일 년이 지났어?"

"헤헤. 저도 좀 컸답니다!"

싱글거리며 귀여움을 떠는 그 모습에 절로 미소가 나와 디아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더기를 입은 채 루크와 함께 식당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던 아이는 이제 완전히 소녀가 됐다.

15살이면 한국 나이로 16, 17살에 해당 되는데 왜 아직도 소녀라고 부르냐면...

"아, 앗! 머리 누르면 안 되요오...! 키 안 커요!"

장난기가 돌아 머리를 꾹 누르자 디아나가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곤 순식간에 입을 삐죽거리며 야속한 눈으로 바라보는데, 그 모습이 귀여워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성장기에 워낙 굶어서 그럴까.

갈비뼈가 다 보이던 마른 몸에 살이 붙어 보기 좋은 정도가 됐지만, 155가 안 되는 작은 키는 여전했다.

몸매도.

"이제 더 이상 안 커."

"아, 아니거든요!"

"그게 끝이야."

"..."

나는 키를 얘기했는데, 디아나가 가슴을 내려다 본다.

아니, 바닥을 쳐다본 건가?

믿고 싶지 않다는 듯 잠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디아나가 볼을 잔뜩 부풀리더니 몸을 돌렸다.

"저 갈 거에요! 흥!"

"이마 보여주고 가야지."

"아 참! ......흥!"

내 말엔 따르면서도 여전히 토라졌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볼을 잔뜩 부풀린 채 다시 몸을 돌린다.

키도 작고 몸도 가벼우니 회전이 빠르네.

나한테 이렇게 서스럼 없이 대하는 걸 메이드장이 알면 어떻게 될까.

메이드장을 불러오라고 하면 어떻게 반응할까 고민하다가 진짜 삐질 것 같아 치고 올라온 장난기를 간신히 참았다.

'...80'

일 년 동안 3이 올랐다.

이 정도 추세라면 엘라를 뛰어넘지 않을까.

개인마다 한계 능력치가 있을 테니 어디까지 올라갈 지는 모르겠지만, 디아나의 나이를 생각하면 아직 성장 가능성이 많아 보였다.

전쟁을 다녀올 때 까진 혼자 공부해야 하니 별다른 능력치 상승은 없겠지만 어쩔 수 없다. 전쟁터에 디아나를 데려갈 수는 없으니.

"나 없는 동안 언니들이랑 잘 지내고 있어."

"...진짜 가셔야 해요?"

"..."

내 말에 잔뜩 부풀어졌던 볼이 순식간에 바람이 빠지더니 이내 시무룩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겨울의 끝이 가고 봄이 오고 있었지만, 아직 전령은 오지 않았다.

제국 내에 침투한 첩자가 보낸 편지가 이 곳까지 도착하려면 아무리 빨라도 한 달은 걸릴 것이다.

그러나 이미 영지는 전쟁 준비에 한창이었다.

전쟁에 동원될 청년들을 징병하고, 군수 물자를 끌어 모으는 중이었다.

이곳 뿐만이 아니다.

알만 왕국도, 헤르트도, 에르딘 역시 전쟁을 준비 중이었다.

각 나라를 상징하는 수호신들이 가만히 일 년을 보낼 리 없다.

어떻게든 대리자들을 달달 볶으며 전쟁을 시키겠지.

그러고 보니 신을 본 지도 일 년이 넘었다.

나한테 관심이 없는걸까.

아님 알아서 잘 하고 있으니 가만히 지켜보는 걸까.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디아나를 품에 안았다.

작은 체구가 품에 쏙 들어왔다.

키도 작고 나이도 나이이다 보니 여전히 여동생 같은 느낌이다.

"나 없는 동안 밥 잘 먹어서 키 커져 있으면 돌아와서 소원 하나 들어줄게."

머리를 쓰다듬어 준 적은 많지만 껴안은 적은 처음이라 그런지 사과처럼 붉어진 디아나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짜로요?"

"응."

그러니까 엘라, 시아라와 잘 지내고 있어.

...키 클 일은 없겠지만 말이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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