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에르딘
* * *
지그하르트 영지의 여름은 무척이나 짧다. 온 세상을 초록색으로 물들인 침엽수만이 여름이라 눈속임을 하지만, 아침 저녁으로 쌀쌀해진 날씨는 여름이 떠나감을 상기시켰다.
"네팔에서 사는 기분이야."
"응? 네팔이 어디야?"
옆에 바짝 달라붙어 긴 옷을 입혀주던 시아라가 정체 모를 지명에 되물었다.
"나도 네팔이라는 곳은 못 들어 봤는데."
엘라 역시 궁금한 얼굴로 말을 받아왔다. 그러나 카인은 쓴 웃음을 지으며 여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 대륙엔 없어.
내가 살던 세상에 있어.
그녀들한테 꺼낼 말은 아니기에 묵묵히 웃기만 했는데, 때마침 엘라가 단추를 잠가주기 위해 품 안으로 들어왔다.
쪽
머리카락을 곱게 빗어 머리망에 넣은 덕에 밀가루 반죽처럼 하얀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엘라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엘라는 늘 그랬다.
자신이 느낌 감정보다 더 강한 리액션을 해주곤 했다.
워낙 감정 표현과 표정 변화가 적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반응이었다.
남자의 작은 애교에 아무런 반응이 없는 여자보단, 엘라같은 여자가 더 좋지 않은가.
한 번 더 해 달라는 듯 단추를 잠그던 손이 느려진다. 엘라만의 재촉 방식이었다.
쪽
"흐흥..."
결국 엘라의 눈꼬리가 휘며 기분 좋은 콧소리를 냈다. 이젠 만족한 듯 느려졌던 손이 다시 빨라지더니 이내 품에서 벗어났다.
"일로 와."
"...헤헤."
가만히 이 곳을 바라보던 시아라가 바보 같은 웃음을 지으며 품에 안긴다.
그녀 역시 근무 중이었기에 엘라처럼 머리를 단정히 빗어 머리망에 넣은 상태였다.
쪽
엘라보다 작은 키였기에 고개를 더 숙였다.
촉감은 똑같이 부드럽다. 이마가 부드러울 수 있을까. 잔티 하나 없는 매끈한 이마에 작은 흔적을 남겼다.
"...조금 부끄러워."
"품에 안겨 놓고는 인제 와서?"
"카인처럼 사랑을 표현하는 남자는 흔치 않단 말이야."
"그 말 조금 이상한 거 알지?"
가만히 시아라를 내려다보며 말하자 어? 하며 잠깐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당황한 얼굴로 품에서 버둥 거리기 시작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내 말은..."
"시아라. 남자 경험이 그렇게 많았어?"
"어, 언니...?"
그녀가 남자 경험이 없는 건 이 방에 있는 세 명 다 똑똑히 아는 사실이다. 아마 그녀의 부모님 모습을 보며 자라왔기에 했던 말이겠지.
그걸 알면서 나와 엘라가 놀리는 이유는 시아라의 반응이 좋았기 때문이다.
이것 봐라. 벌써 얼굴이 빨개지며 당황하고 있었다.
툭
"떨어져."
확인 사살을 하듯 품에서 밀어내자 정말 억울한 듯 순식간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기 시작한다.
"다... 알면서... 왜 놀려어..."
입을 삐죽이며 울상을 짓더니 다시 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렇게 반응이 좋은데 어떻게 안 놀려.
엘라와 외모만 정반대인게 아니라 성격도 정반대였다.
품에 아닌 그녀를 토닥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맨날 나만 놀려... 언니는 안 놀리면서."
"그러면 누나도 놀릴까?"
"읏..."
그 말에 엘라 역시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평소엔 그렇게 표현이 적은 그녀가 누나라는 말엔 늘 격한 반응을 터트렸다.
"누나라는 말이 그렇게 부끄러워요?"
"...존댓말도 하지 마."
"왜요?"
"..."
결국 말할 수록 불리해진다는 것을 깨달은 엘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누나라는 말을 할 때는 딱 한 가지 경우 밖에 없었다.
침대에서 그녀를 매도하며 엉덩이를 때릴 때.
활기차다면 활기 찬 아침을 보내고 카인은 방을 나섰다. 복도 사이사이로 새벽을 비추는 가느다란 햇살이 들어온다.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자 저 멀리 고개를 반쯤 든 태양이 아침 인사를 건네오고 있었다.
'오늘은 좀 살살 했으면 좋겠는데.'
밤새 그녀들을 괴롭히느라 오늘도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조금 피곤한 눈을 비비며 천천히 연무장으로 걸어갔는데, 늘 먼저 운동 중이던 후작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연무장을 관리하는 젊은 시종이 비질을 멈추고 다가왔다.
"아버님은?"
"아, 카인님. 바로 집무실로 오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 새벽에?
훈련도 거르고 호출할 사안이 생겼다는 뜻인가?
평범한 일은 아니다. 자연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다급히 몸을 돌려 후작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제국이 움직였나? 여름이 다 지났는데? 아니다. 이제 한창 수확 철이 다가오는 시기에 전쟁을 일으킬 리가 없다.
게다가 거의 대부분의 식량을 알만 왕국에서 차출하는 다나크 제국이 굳이 이 시기에 동맹의 코털을 건들 필요는 없다.
똑똑
"아버님. 저 왔습니다."
"들어오거라."
돌아온 후작의 대답에 카인이 문을 열었다.
집무실은 늘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한쪽 벽을 모조리 장식한 벽은 한눈에 보기에도 오래된 고서들이 즐비했다.
퀴퀴하면서도 쿰쿰한, 그러나 불쾌하지는 않은 냄새가 열린 문 사이로 흘러나왔다.
"스승님?"
"왔느냐."
겨울이 다가오며 조금 두꺼운 옷을 입은 스승님이 소파에 앉아있었다.
인사를 한 카인이 그 옆에 앉은 사내를 바라봤다.
녹색 경장에 한쪽 팔은 붉은 띠를 두르고 있다. 색이 조금 바랜 띠가 먼 길을 왔음을 알렸다.
"수도에서 전령이 왔습니까?"
"내 의견을 묻기 위해 왔다는 구나."
그 말과 함께 차를 마시며 잠깐 뜸을 들인 후작이 고갯짓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아직 앉지도 않았다.
마음이 너무 다급했다
'침착하자.'
스승님과 후작의 얼굴을 보면 급한 일은 아니었다. 손에 난 식은땀을 바지에 살짝 닦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후작을 다시 바라보니, 그제야 찻잔에서 손을 뗀 후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르딘의 내전이 끝났다는구나."
"...예?"
너무 먼 나라 이야기에 너무 뜬금없는 소식이었다. 갑자기?
그래도 전령이 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상황 파악이 우선이었다.
"북 입니까? 남 입니까?"
"북에르딘이 내전을 종식 시켰다는 구나. 십여 년을 끌어온 내전이 단번에 끝났어. 이렇게 쉽게 끝날 지는 몰랐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 보구나."
'능력!'
능력 말고는 없다.
북에르딘에 무슨 능력이 생긴 것이리라.
잠깐 멈췄던 식은땀이 다시 샘솟았다.
자신만 가지고 있던 구슬이라는 장점이 사라진 지금,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야 했다.
"혹시 어떻게 끝났는지는 모릅니까?"
"거리가 너무 멀어 자세한 내용까지는 파악하지 못한 듯하다. 다만 에르딘에서 먼저 연락을 보냈는데, 자신들도 동맹에 참여 시켜 달라는 구나."
"...예?"
"농기구를 녹여 검을 만들어 쓸 정도로 철이 부족하다고 한다. 그리고 오랜 내전이 끝났으니 다시 대륙에 영향력을 끼치고 싶은 마음도 있겠지."
...아닙니다.
그건 대외적인 목표입니다.
저들은 지금 다나크 제국을 없애는데 한 몫 하기 위해서 손을 내민 겁니다.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만들기 위해서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이 다시 가라앉았다.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기 때문에.
이 대륙에 불어닥치고 있는 전쟁의 폭풍이 신들의 경쟁이라는 말을 어떻게 꺼내는가.
미친놈 취급을 받을게 뻔했다.
'...차라리 잘 됐어.'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알만 왕국의 일을 해결할 방법이 없어 삼국 동맹을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에르딘 왕국이 합세한다면 알만 왕국 내의 파벌 싸움에도 큰 변동이 있을 것이다.
'한동안 파딘 제국파가 득세할 거야.'
다나크 제국과의 전쟁을 반대하는 귀족들의 힘이 약화되면, 동맹이 깨질 위험도 적어진다.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저희로서는 두 팔 들고 환영할 안건입니다. 에르딘 왕국이 군사 동맹도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알았느냐? 동맹의 조건이 군사 동맹이었다. 그것에 대해 의견을 묻고자 수도에서 전령이 왔다는 구나."
보나 마나 뻔하지.
헤르트를 통해 대륙으로의 교두보를 만드는 게 진정한 목적임이 확실해졌다.
"저희야 철광석의 판매처가 늘어나니 좋은 일입니다. 게다가 알만 왕국의 파벌 싸움도 약화될 테니 동맹 역시 단단해질 겁니다."
"으음..."
후작이 모든 의견을 내게 묻는 모습을 보며 전령의 눈이 조금 동그래졌지만 그의 반응은 당연했다.
헤르트 원정의 지휘관도 후작이었고, 삼국 동맹을 이뤄낸 것 역시 대외적으론 후작의 공로였다.
에어로크 왕국 내의 자신의 이미지는 총명한 후기지수 중 한 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모두 자신이 의도한 것이다. 원정을 직접 겪지 못한 사람들은 이제 막 성년이 지난 젊은 청년이 뛰어난 전략을 세웠다는 사실을 못 믿을 것이다.
게다가 그 사람이 지휘관의 아들이라면 더더욱.
오히려 전공 몰아주기로 오해 받기 딱 좋았다.
"적극적으로 동의 의사를 전하셔도 좋을 듯 합니다."
"스승님도 같은 말을 하더구나."
그 말에 카인이 고개를 돌리자 록센 자작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 좀 멀리 보기 시작하는구나."
"감사합니다."
후작 역시 든든한 눈으로 카인을 바라봤다. 헤르트의 방패라 불리는 록센 자작과 거의 똑같은 의견이었다.
'벌써 은퇴하긴 이른데.'
이제 마흔이 조금 넘었다. 자신이 뒤로 물러나도 충분히 영지를 운영할 거라 믿었지만, 지금은 조금 일렀다.
자신이 든든하게 영지를 지키는 동안 전 대륙을 돌아다니며 더 경험을 쌓았으면 했다.
그때, 카인이 방 안의 훈훈한 기운을 한 번에 벗겨버리는 말을 던졌다.
"단,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아버님 두 장의 편지를 써주셔야 합니다."
"두 장?"
"대외적으론 동맹이 성사됨을 모르게 해야 합니다. 물론 다나크 제국과 연결된 알만 왕국에서 정보가 새어 나가겠지만, 최대한 늦출 수 있는 만큼 비밀로 해야 합니다."
늘 말썽이다.
어떤 작전을 수립해도 알만 왕국이 문제였다.
에르딘 왕국과의 4국 동맹을 비밀로 체결하고 훗날 에르딘이 다나크를 기습하면, 더욱더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다나크 제국을 지지하는 귀족파에서 말이 새어 나갈 것이다.
알만 왕국에도 숨기자니 동맹이 유지가 될 수 없고, 안 숨기자니 에르딘 왕국의 참여를 효과적으로 써먹을 수가 없었다.
설명을 들은 후작과 스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 말대로 큰 효과가 없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제국이 늦게 알아차릴 수록 효과적인 전략임은 깨달았다.
그날 아침이 되기 전, 새벽에 도착했던 전령이 다시 영지를 빠져나갔다. 빨간 깃발을 등에 맨 전령은 두 장의 편지를 품에 안고 수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