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책사 시점-91화 (91/191)

〈 91화 〉 저주

* * *

"알만 왕국 내에서 귀족 간의 파벌이 심화되었습니다. 거의 나라가 반으로 갈라진 수준입니다."

"...예?"

카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다나크 제국에 내부적으로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에 속으로 내쉬었던 안도의 한숨이 미처 흩어지기도 전이었다.

"양 제국의 뒤에서 귀족들을 매수한 모양입니다. 각자 자신들이 지지하는 제국에게 철광석을 팔기 위해 스스로 웃돈을 들고 찾아왔었습니다. 저희야 더 비싼 값에 팔 수 있어 좋기는 했습니다만..."

"망했군요."

"예?"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인이 마틴 경의 말을 끊으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평소와 달리 갑작스레 말을 끊은 자신을 보며 마틴 경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태생부터 어쩔 수 없었나...'

자신이 너무 낙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봤을까. 양 제국이 아무 일도 안 할 것이라 생각한 자신이 안일했음을 깨달았다.

알만 왕국으로 넘어간 철광석은 전쟁 대비에 한창인 헤르트로 가지 않을 것이다.

'보나 마나 다나크로 넘어가겠지. 아니면 파딘 제국이나.'

삼 할이나 헤르트로 가면 다행 아닐까.

제국에 줄을 대기 위해 철광석을 산 귀족들이 헤르트로 갈 철광석을 제국에 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잠깐 눈을 감은 채 생각을 이어가던 카인이 다시 눈을 뜨고 마틴 경을 바라봤다. 한 가지 궁금증이 떠올랐는데, 지금 이 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그 다음 추리가 불가능했다.

"왜 알만 왕국은 국가가 주도적으로 철광석을 수입하지 않은 겁니까? 국왕이 제정신이라면 당연히 귀족들이 빼돌릴 것을 알았을텐데요."

"...아시다시피 왕권이 강력한 우리 왕국과 달리 알만 왕국은 왕의 힘이 너무나 약합니다. 에어로크 전역에서 생산되는 철광석을 모두 소화할 정도로 왕이 가진 능력이 크지 않았을 겁니다."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다.

원래부터 알만 왕국의 귀족들이 힘이 세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국왕이 힘이 없을 줄은 몰랐다.

"몇 안되는 국왕파 귀족들과 양 파벌로 나뉜 귀족들. 이렇게 삼파전으로 나뉘어 철광석을 매입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겠군요."

"맞습니다. 실제로 세 파벌에 속한 상단이 모두 저에게 접근해왔었습니다."

국왕파는 동맹에 의거 헤르트로 철광석을 판매하고 말을 수입하기 위해.귀족들은 국왕을 돕는 척 제국으로 철광석을 빼돌리기 위해.

'나라가 개판이구만.'

카인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지리적 한계로 어쩔 수 없이 삼국 동맹을 생각했었다. 알만 왕국을 지나지 않고는 헤르트에 철광석을 팔 방법이 없었으니 말이다.

제국에 대항해 연합군을 결성했었기에 설마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모두 안일했던 자신 탓이다.

그때, 머리 속으로 마틴 경의 마지막 말이 떠오른다. 소파에 기댔던 몸을 떼고 몸을 앞으로 향했다.

"마틴 경은 어느 파벌에 철광석을 팔았습니까."

중요한 문제였다. 에어로크 왕국에서 가장 많은 철광석을 생산하는 지그하르트 영지에서 출발한 상행이다. 저들의 입장에서 절대 놓칠 수 없는 대어였을 것이다.

카인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마틴 경이 잠깐 초조한 안색을 띄었다.

그는 눈 앞의 도련님이 이런 눈빛을 보내올 때마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휩싸이곤 했다. 평소엔 늘 장난기가 넘치면서도 중요한 순간엔 눈빛이 달라졌었다.

잠깐 침을 삼킨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 파벌에 균등하게 판매했습니다."

"..."

'어휴.'

마틴 경에 대답을 들은 카인은 다시 소파에 몸을 기댔다.

너무나 예상 가능한 대답이었기에 더 물어볼 것도 없었다.

"잘 하셨습니다."

우리 영지가 모조리 국왕파에 철광석을 판다고 해도 전체의 이 할이 안된다. 겨우 그 정도로는 알만 왕국 자체적으로 사용할 철광석 수요에도 못 미치는 양이다.

헤르트로 갈 철광석이 0에 가깝다는 뜻이다.

차라리 적을 만들지 않은 마틴 경의 선택이 현명했다.

'...우리가 이 정도인데.'

당장 돈이 급한 에어로크 왕국의 다른 영지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모조리 귀족파에 팔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게다가 겉으론 귀족파 역시 국왕파를 돕는 중 아닌가. 누구에게 팔든 에어로크 입장에선 명분 상으로도 문제는 없는 것이다.

아마 마틴 경 역시 모든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면 가장 높은 값을 부른 귀족파에게 전량 판매하고 왔을 것이다.

'알만 왕국의 파벌 싸움을 멈출 방법이 없을까.'

이대로 라면 삼국 동맹은 자연히 파기였다. 에어로크와 헤르트의 사이에 낀 알만이 동맹을 파기하면 자연히 두 나라도 동맹은 파기 될 수 밖에 없었다.

"..."

있을 리가 있나.

알만 왕국 내에서 양 제국을 지지하는 귀족들 간의 파벌 싸움은 건국 이래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타국의 귀족이, 그것도 자신 혼자 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

지금 당장 방안이 나올 리가 없다.

일단 제국이 내부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진 시간을 벌었으니 올해는 큰 일이 없을 것이다.

'올해... 올해 안에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다나크 제국은 분명히 내년에 움직일 거야.'

고작해야 일 년이 조금 안 남았다. 그 안에 삼국 동맹을 파기하든, 알만 왕국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든 해야 한다.

"...우선은 고생하셨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돌아가서 푹 쉬세요."

생각을 멈춘 카인이 미소를 지으며 마틴 경에게 입을 열었다. 긴 여정에 여독이 쌓였을 테니 마틴 경은 이만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마틴 경은 카인의 말에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무언가 기대라도 하는 듯 은은한 열망이 피어오른다.

"보고서 작성을 해야 해서 당분간 퇴근은 어려울 듯 싶습니다. 아니면 혹시... 며칠 쉬고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보고서는 쓰셔야죠."

"..."

"..."

단호한 그 말에 마틴 경의 눈썹이 잠깐 꿈틀했지만, 카인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했다.

보고서가 있어야 나도 계획을 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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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성벽이 보인다. 새벽 어스름에 깔린 안개가 짙다.

하얀 창이 그려진 깃발이 성벽마다 꽂혀있고, 기다란 성벽엔 병사들이 다가올 전투를 준비 중이었다.

그 순간, 성 밖에서 화살이 날라오기 시작했다.

미처 대비를 하지 못한 병사들이 속수무책으로 넘어갔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비명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도대체 어떻게?

분명히 사흘 거리에 적이 있다고 보고를 받았는데, 어떻게 지금 공격을 올 수가 있는 건가.

무력하게 열린 성문으로 적들의 기마가 쏟아져 들어온다.

자신은 무력하게 그 모습을 바라 만 봐야 했다. 늘 똑같은 장면, 늘 똑같은 방법이었다.

그때, 성문을 뚫고 들어온 적군 중 한 명이 자신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익숙한 얼굴이다. 똑같은 장면을 몇 번이나 겪은 그는 다가오는 이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다.

"미안해. 친구."

마침내 눈 앞으로 다가온 청년이 검을 들었다. 손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자신은 대항할 방법이 없다.

늘 그렇듯, 그의 검이 자신의 복부를 뚫고 들어왔다. 몇 번이나 겪은 경험이지만, 이 기분 만큼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의 검을 붙잡았다. 아무런 감정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속이 울컥거리며 피가 올라온다.

몇 번이고 불렀던 그 이름을, 다시 한 번 부르며 그를 바라봤다.

"...카인...!"

벌떡!

"허억...허억...!"

일어나자 마자 배를 쓰다듬었다.

꿈인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반응이다.

검에 뚫린 고통이 아직 사라지지도 않았는데 몸엔 아무런 이상이 없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에 신경질 적으로 물잔을 들이켰다.

도대체, 도대체 무슨 꿈을 이따위로 반복해서 꾼단 말인가.

카인이 자신을 왜 공격하고, 또 자신의 영지는 왜 전투를 준비 중이었단 말인가.

벌써 며칠째 반복된 꿈에 잠을 설친 지 오래됐다. 반사적으로 창문 밖을 보니 꿈에서 봤던 그 시간과 비슷한 새벽 어스름이 지고 있다.

이 꿈을 꾸는 날이면 항상 이 시간에 일어났다.

어차피 잠은 다 잤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방 옆에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거울 속으로 보이는 찬란한 금발 사이로 퀭한 눈과 조금 마른 몸이 보인다. 거울 속의 자신은 예전의 당당한 귀족 자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고, 밥도 늘 제대로 먹는데도 점점 살이 빠지고 있었다.

예지 능력을 얻은 이후로 생긴 부작용이었다.

언제까지 살이 빠질 것인가.

언제까지 꿈을 꿔야만 하는가.

어디까지 볼 수 있는 것인가.

어디까지 이 꿈을 믿을 수 있는가.

신의 축복을 받은 줄 알았다.

자신과 똑같은 금발을 한 아름다운 여신이 꿈에 등장하고 나서 생긴 능력이었다.

처음엔 사소했다.

다음 날 가벼운 사건들을 미리 꾸었다.

영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사건들을 예지의 힘으로 미리 해결하고 다녔다.

도시 내에 파고든 도적단을 소탕했다.

세금을 탈세하던 상단을 해체 시키고 영주민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영지 내에서 자신의 위상이 순식간에 상승하기 시작했다. 후계자 자리를 노리던 동생들이 어느 순간 포기를 하고 밑으로 들어왔다.

이 능력을 좋은 곳에 쓰고자 마음먹었다.

오로지 이 영지를 위해, 자신이 다스릴 이 영지를 위해 쓰고자 마음 먹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8년 동안 키우던 애완견을 땅에 묻는 꿈을 꿨다.

그리고 다음날, 마차에 치인 애완견을 자신의 손으로 묻어야 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을 꿨다.

그러나 이 꿈은 순수한 꿈이었다.

영지가 불에 타는 꿈을 꿨다.

아버지가 붉은 머리의 여자에게 목이 잘리는 꿈을 꿨다.

온 몸을 결박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꿈을 꾼 그 날은,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그러더니 이제는 며칠째 친구의 손에 죽음을 당하는 꿈을 꾼다.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예지인 걸까.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할까.

이건 축복이 아니었다.

저주였다.

아주 지독한 저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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