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나를 좋아한다고?
* * *
갑자기 풀이 죽은 디아나와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인상을 쓰던 두 여인도 갑작스러운 디아나의 변화에 더 이상 화를 내기 뭐한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시아라. 차 좀 타줄래?"
"응."
방으로 돌아와 남들의 시선이 사라진 시아라가 다시 편안한 말로 대답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가만히 의자에 앉아있던 디아나가 시아라를 따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는 앉아있어도 돼."
"저도 찻물 우리는 방법을 배우고 싶어요."
언제 풀이 죽었냐는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디아나의 눈빛에 시아라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차를 타는 것 역시 메이드의 소양이니 배워도 나쁠 것은 없다 여긴 것이다.
'시아라 언니보다 차를 잘 타면 전담 시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꼬마 소녀의 속내는 조금 달랐지만 말이다.
사실, 디아나에게 저택 생활은 조금 어려웠다. 잠잘 곳이 있고 밥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지만 꽉 막힌 규율은 자유롭게 살던 소녀에게 너무 답답했다.
접시를 예쁘게 놓는 법, 포크와 수저를 순서대로 식탁에 정렬하는 법은 왜 배워야 할까.
매일 아침 머리를 단정히 빗어 머리망에 묶는 것도 불편했다.
동생과 카인님이 없었다면, 진작 저택에서 도망가지 않았을까.
카인님의 전담 시녀가 된다면 무서운 메이드장님에게 안 혼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조금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카인님이 자신과 동생을 부른 이유를 몰랐다.
카인님의 방에 처음 들어온 터라 설레는 마음에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곳까지 부른 것을 보면 사소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혹시 오늘 날 혼내시려고 부른 걸까.'
최근 며칠 동안 메이드장님에게 야단을 많이 들었었다.
도저히 흥미가 없는 일을 하려니 집중이 되지 않아 실수를 많이 했었다.
그러고 보니 평소와 달리 엄한 얼굴로 자신을 혼내던 엘라 언니와 시아라 언니가 생각났다.
'...혼나기만 해야 하는데...'
겨울이 끝났으니 나가라고 하면 어떡하지.
'설마...'
아닐 것이다. 그렇게 매정한 분이 아니야.
작은 소녀는 초조한 마음을 차근차근 달랬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노크하고 조심스레 들어왔다.
창밖을 바라보던 카인이 방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느 때처럼 사람의 머리가 있을 만한 부분을 바라봤는데, 열린 문 사이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밑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시선을 조금 내리니 루크가 쭈뼛거리며 방으로 걸어 들어왔다.
소년을 바라본 카인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후줄근한 차림새일 땐 몰랐는데, 살이 좀 붙고 머리도 정리하니 꽤 귀여운 미소년이 방문 앞에 서있었다.
'서양인이라 그런 건가. 아니면 원래 이목구비가 뚜렷한가.'
아동복 모델을 하면 딱 좋을 귀염상이다. 놀란 시선이 몰리자 어색한지 몸을 배배 꼬는 루크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야. 몰라보겠네."
"가, 감사합니다."
발랄한 누나에 비하면 한 없이 소심한 성격이었다. 불안한 눈빛으로 이리저리 시선이 돌아가던 루크가 그제야 누나를 발견하곤 조금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다 모였으니 할 말을 해야지.
다시 자리로 돌아간 카인이 맞은편 의자를 꺼내 자리를 마련했다. 조금 진중한 분위기에 두 남매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이제 너희 둘은 일을 안 해도 돼."
"...네?"
갑작스러운 카인의 말에 디아나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어왔다. 그러더니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는 것 아닌가.
디아나의 표정을 확인한 카인이 의아한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야. 내일부터는..."
"죄송해요!"
그 순간, 디아나가 의자에서 내려와 카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까부터 불안했던 생각이 현실이 됐다.
동생은 안 된다.
자신은 어떻게든 살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동생은 너무 어렸다.
적어도 동생 만은 저택에 남기고 싶었다.
혹시 아까 언니들 앞에서 카인님에게 안긴 게 문제였을까. 신분도 천한 자신이 좋아하기엔 너무 높은 사람이었을까.
"여, 열심히 일 할게요! 이제 꾀도 안 부릴게요. 카, 카인님도 안 좋아할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아니면 루크라도 이 저택에 남게 해주세요..."
"누, 누나. 그게 무슨 말이야?"
덩달아 영문도 모른 채 불려온 루크 역시 안색이 창백해졌다.
순식간에 방 안이 침묵으로 맴돌았다.
두 여인과 카인은 추궁의 시선과 변명의 눈빛을 서로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내가 너흴 왜 쫓아내."
가만히 바닥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디아나는 황당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카인의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 아니에요?"
"아닌데."
"..."
"다른 일을 시키려고 부른 거야. 너흴 왜 버려 내가."
쿵 하고 떨어졌던 심장이 서서히 올라왔다. 다시 한 번 확답을 하는 카인의 얼굴을 보며 디아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혼자 착각하고 지금 뭐한 거야...'
죽을 것처럼 부끄러웠다. 아니, 차라리 죽고 싶었다.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을 느끼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러나 미칠 듯이 올라오는 민망함에 결국 얼굴이 뜨거워졌다.
사춘기 소녀에게 평생 기억할 흑역사가 생성되는 순간이었다.
"그건 그렇고... 나를 좋아한다고?"
마지막 결정타에 결국 디아나가 책상에 고개를 숙이며 침몰했다. 한창 감수성 넘치는 열네 살 소녀에겐 너무나 가혹한 상황이었다.
"...한 번 가르쳐 보라고?"
"예. 재능이 있어 보입니다."
"..."
자신의 방에 앉아 책을 읽던 록센 자작이 안경을 고쳐 쓰며 두 아이를 바라봤다. 기껏해야 열 살은 되었을까. 어린 소녀와 소년이었다.
그런데 두 남매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가만히 둘을 바라보던 록센 자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 소녀는 왜 저렇게 얼굴이 붉으냐? 어디 아픈 거 아니냐."
"읏......"
그 말에 더욱 붉어진 소녀가 고개를 푹 숙인다.
뭔 일이 있기는 했구나. 속으로 생각한 록센 자작이 손짓으로 두 아이를 가까이 불러 앉혔다.
제자가 데려온 아이들이다. 분명 뭔가 특별한 부분이 있어 데려왔겠지.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을 귀찮게 할 놈은 아니었다.
"내가 제자를 아무나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예. 제가 가르칠까 했는데 걷지도 못하는 놈이 누굴 가르치겠습니까. 부탁할 사람이 스승님 밖에 없어 데려왔습니다."
"귀찮게 하겠다는 말을 잘도 돌리는 구나."
"...스승님도 밥값은 하셔야죠."
"뭐...?"
카인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눈 앞의 스승님을 바라봤다. 어이없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던 스승님이 코웃음을 한번 치더니 말을 이었다.
"이따 공주님 모셔오너라."
"...싫습니다."
"내가 갈까?"
"..."
괜히 장난 한 번 쳤다가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일종의 자극 요법이라며 엘라와 크렉스필을 두게 하곤 자신에게 신랄한 비판을 하며 자존심을 박박 긁었었다.
한 동안 안 그러나 싶어 한숨 돌렸었는데...
"일단 알겠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돌아가 보거라. 성에 안 차면 어쩔 수 없으니 그건 알아두고."
"예. 재능만 파악해 주십시오. ...그리고 몇 명 더 데려올 수도 있습니다."
디아나와 루크는 이제 시작이다. 이제 날씨도 풀렸으니 본격적으로 도시를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이따 꼭 가마."
"..."
다행히 디아나와 루크가 다시 잡일을 하는 일은 없었다. 생각보다 두 아이의 재능이 괜찮았는지 스승님은 썩 괜찮다는 표정으로 둘을 가르쳤다.
"어려서 그런지 가르친 걸 그대로 흡수하는 구나. 특히 여자아이는 꽤 영특해. 조금 덤벙거리는 경향이 있는 부분만 빼면 공주님의 어린 시절과 빼닮았다."
"남자 아이는 누나에 비해 재능이 조금 떨어지는구나. 그런데 웃긴 게 뭔 줄 아느냐?"
어느 날 스승님이 미소를 지으며 했던 말이다. 디아나가 77, 루크가 60이었으니 전쟁, 혹은 전략과 비슷한 스택이라는 가설이 점점 들어맞는 중이었다.
"누나가 동생을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단 한 번도 말이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수치 상으로 분명 디아나가 앞서고 스승님 역시 디아나가 뛰어나다고 했는데 말이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카인에게 스승님이 유쾌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루크라는 놈이 엄청 침착하다. 아무리 불리해도 방법을 생각해내. 이제 크렉스필에 발을 들였으니 미래는 모르지만 동생은 누나에게 훌륭한 자극이 되고 있지."
단순히 수치가 아니라 그 사람의 성향까지 계산해야 한단 말일까. 굉장히 중요한 정보였다. 결국 수치가 절대적이란 뜻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두 살이나 차이가 난다. 확실히 유의미한 정보야.'
루크보단 디아나에게 더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뜻밖의 보석을 건진 기분이다. 카인이 감사함을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시다시피 미래에 크게 쓸 아이들입니다. 잘 부탁 드립니다."
"그래. 뭐 말년에 소일거리가 생긴 기분이라 괜찮구나. 네 말대로 쫓겨나지 않으려면 밥값도 해야 하고 말이다."
"..."
'...노인네 뒤끝하고는'
뼈있는 농담을 휙 던지는 스승님을 향해 카인이 마주 웃었다.
"패륜을 저지르지 않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익! 예끼 이놈!"
결국 스승님이 들고 있던 기물이 날라왔다.
피하면 한 번 더 날릴게 뻔했기에 카인은 가만히 앉아 스승을 놀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어머. 카인 이마에 혹..."
"몰라..."
점심을 먹으러 돌아온 카인을 본 시아라가 놀란 표정으로 다가왔다. 의자에 앉아있는 엘라 만이 이해했다는 듯 눈꼬리가 휜다.
'...'
평소보다 살짝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세 명은 점심을 먹었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지나 여름이 다가왔다. 카인은 특별한 일 없이 똑같은 하루를 보냈다.
아침에 후작과 대련을 하고, 오전엔 스승님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점심을 먹고 나면 업무를 보곤 했다.
평범함에 평범함이 덧칠 된 어느 날, 평범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그것도 두 개나.
'78!'
매일 점심 자신을 찾아오는 디아나의 이마엔 선명하게 78이란 숫자가 써있었다.
곧 바로 루크까지 불러 이마를 확인했는데 62라는 숫자가 쓰여있었다.
'고정된 수치가 아니다.'
중요한 정보였다. 그럼 엘라 역시 처음부터 81이 아니었단 소리다. 스승님 역시 마찬가지고.
그리고 전략, 전술과 관련된 수치라는 가설이 사실이 된 순간이었다.
'생각보다 빠른 성장은 아니다.'
혹시 숫자가 높을 수록 성장이 느린 걸까. 루크에 비해 디아나의 성장이 느린 것을 보면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아직 표본이 부족해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앞으로 표본이 쌓이리라.
한 가지 확실한 건 40을 넘기는 숫자 자체가 굉장히 희귀하다는 사실이었다. 엘라, 시아라와 함께 꾸준히 도시를 돌아다녔지만 아직 50이 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고 특별한 소식은 한 가지 더 있었다.
벌써 며칠째 연무장에 틀어박혀 있던 카인은 다급히 달려오는 시아라를 보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 마틴 경이 찾아오셨습니다!"
"상행이?"
벌써?
아니다. 벌써는 아니다.
늦겨울에 출발을 했으니 거진 네 달이 걸린 것이다. 자신처럼 헤르트까지 갈 일도 없었을 테니 충분히 다녀올 시간이었다.
"..."
조금만 더 집중하면 무언가 잡힐 것 같은데...
소설이나 만화에서 나오는 소드마스터 같은 경지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그런 재능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러나, 며칠 전부터 무언가 움직임이 뚝뚝 끊기는 기분에 도저히 수련에 집중이 되지 않았었다.
"누구나 겪는 일이다. 기억을 잃은 너는 두 번째 겪는 일이겠구나. 몸은 기억할 테니 금방 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몸은 기억하겠으나 자신은 그런 경험이 없었다. 결국, 카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될 때까지 연무장에 죽치고 있는 일이었다.
'조금만 더 해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니다. 차라리 이 벽을 넘어 초인이 된다면 다시 검을 들 테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우선 마틴 경을 만나야 할 때였다. 바깥 정세를 들어야 다시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미련 없이 검을 집어넣은 카인이 웃옷을 들어 올리곤 시아라를 바라봤다.
"마틴 경은 어디 있어?"
"지금 도련님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오랜만에 본 그는 피부가 조금 타있었다.
상행이 고됐는지 조금 피곤한 얼굴이었는데 환영회가 끝나자마자 자신에게 달려온 것이라면 분명 중요한 소식을 들고 왔다는 소리였다.
"상행은 잘 되셨어요?"
"저는 잘 끝났습니다. 무언가 깨달음을 얻어 연무장에 계신다고 들었는데 제가 방해가 된 건 아닐까 죄송스럽습니다."
"마틴 경이 가져온 소식이 더 중요해요."
빨리 정보를 토해내라는 노골적인 대답이었다. 차 한잔 마실 시간도 없이 재족 하는 카인을 향해 마틴 경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우선, 다나크 제국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가장 중요한 소식이었다. 에어로크 왕국을 포함해 삼국 동맹의 제 1 주적이었으니까. 초조함에 탁상을 바라본 카인이 그제야 마실 것이 없다는 걸 깨닫고 시아라를 불러 차를 부탁했다.
"내부적으로 권력이 뒤집히고 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완전히 교류가 끊겨 정확한 소식은 듣지 못했지만, 다나크 제국과 연이 있는 알만 왕국의 상단에게 전해 들은 정보였습니다."
"권력이 뒤집혀요?"
"예. 왕실에 피 바람이 불고 있답니다. 유라페스 공작가의 주도 하에 수많은 귀족들이 귀양 가거나 처형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유라페스'
유라페스 에슬러.
기억 저편에 있던 정보가 다시 떠오른다.
작년 헤르트 원정에서 페틸 자작을 포섭하고 엘라가 지키던 성을 공격했던 지휘관이었다.
'패장의 가문이 주도를 해?'
특이한 정보였다.
...직접 가보면 더욱 좋을 텐데, 너무나 한정된 정보였다. 아니 이 정보가 백 프로 옳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일단 염두에 두자고 생각한 카인이 다시 마틴 경을 바라봤다.
"다른 소식은 없습니까?"
"...음. 이건 좋은 소식은 아닙니다만..."
길게 말을 끌며 마틴 경이 카인의 눈치를 살폈다. 찻잔에 입을 대며 잠깐 여유를 가진 마틴 경이 여전히 침묵에 빠져있는 카인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알만 왕국 내에서 귀족 간의 파벌이 심화되었습니다. 거의 나라가 반으로 갈라진 수준입니다."
"...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