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새로운 시작
* * *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이자 가장 식량을 많이 생산하는 국가. 북쪽으로는 다나크 제국과 붙어있고 남쪽으로는 파딘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알만 왕국은 그 지리적 이점으로 대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두 제국에 의해 세워진 괴뢰 국가라는 태생적 약점은 자연히 왕권의 약함을 뜻했다.
귀족들은 왕보다 제국의 눈치를 더 많이 봤다.
어떻게든 자주 국가로 일어서려는 국왕과 달리 알만 왕국의 귀족들에게 왕권의 강화는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회의를 위해 모인 대전이 어느 때처럼 긴장감이 맴돌았다.
이제는 익숙한 듯 알만 왕국의 국왕은 담담한 눈빛으로 두 갈래로 나뉘어 싸우는 귀족 무리들을 바라봤다.
"다나크 제국을 등지고 야만 국가 에어로크 왕국, 다 무너진 헤르트 왕국과 동맹을 맺자니! 그게 무슨 망언인가!"
바로 앞에 국왕이 앉아있음에도 늙은 귀족의 고함이 대전에 쩌렁쩌렁 울린다. 다나크 제국파의 수장 격인 엑센 크라우스 후작의 일갈이었다.
"헤르트가 무너지면 우리 알만 왕국도 무너지는 것을 모르는 겁니까! 그걸 알기에 이차 원군을 보내는데 합의한 것 아닙니까!"
크라우스 후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젊은 귀족이 맞받아쳤다. 그 역시 파딘 제국파의 수장인 라이델 스워든 백작이었다.
"..."
평범한 일이다. 에어로크 왕국에서 동맹 제의가 들어오고 난 이후 대전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제의가 들어온 곳은 에어로크 왕국이요. 헤르트는 두 팔을 벌리고 환영했다. 그러나 여기, 알만 왕국에서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아 삼국 동맹이 정체를 겪는 중이었다.
"삼국 동맹을 맺는다는 것은 결국 다나크 제국과 완전히 척을 지겠다는 소리다! 다나크 제국의 침공을 막을 방법은 있는가!"
"파딘 제국에게 도움을 청하면 됩니다! 제 사돈 가문이 파딘 제국의 공작 가문인 걸 모르시는 건 아니겠지요!"
"흥! 여동생을 외국에 팔아넘긴 주제에 뻔뻔하긴 한 없이 뻔뻔하구나!"
"지금 말 다 하셨습니까!"
"...경들은 그만하시오."
시장판도 이런 시장판이 없다. 벌써 일주일 넘게 진전 없는 말다툼 중이었다.
슬슬 진절머리가 난 국왕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귀족들의 대가리를 잘라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망상일 뿐이다. 이들의 목을 채 반도 치기 전에 자신의 목이 날라갈 것이 뻔했으므로.
"군사 동맹은 뒤로 미루고, 우선 경제 동맹이라도 추진하겠소. 우리에게 손해 볼 것은 없으니 말이오."
결정을 내리는 왕이 아니다. 두 귀족파 사이에 낀 중재자일 뿐이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삼키며 말을 이었다.
"스워든 백작의 말대로 헤르트가 무너지면 우리 왕국의 힘은 더욱 약해지오. 크라우스 후작께서도 한 발 양보해 주시오."
뻔한 말이다. 여기 있는 귀족들 모두 뻔히 아는 사실이었다.
'매국노 같은 놈들.'
간신히 참았던 화가 다시 들끓는 기분이다. 여기 모인 귀족들은 알만 왕국의 귀족인가. 아니면 제국의 귀족인가.
어느 한 쪽의 균형이 무너지면 알만 왕국은 제국으로 다시 흡수될 것이다. 그것이 파딘이 됐든, 다나크가 됐든.
그걸 알기에 국왕은 두 귀족파들의 균형을 맞춰야 했다. 왕국의 살을 파 먹는 기생충 같은 작자들이었지만, 자신에겐 왕국을 유지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헤르트의 국왕이 부럽군.'
전쟁의 여파로 허덕이고 있지만, 적어도 왕의 뜻 아래 한 목소리로 영토를 재건 중이었다. 자신들보다 국력도 약하고 영토도 작지만 알만 왕국의 국왕은 그가 부러웠다.
"...전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따르겠습니다."
언제 싸웠냐는 듯 으르렁 거리던 귀족들이 다 같이 고개를 숙인다. 정해진 연극에 따른 순서일 뿐이다.
자신이 이런 말을 꺼낼 것도, 이제 슬슬 중재가 들어올 것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상대를 헐뜯기 위해 싸웠을 뿐.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
'역겨운 작자들.'
차라리 대놓고 무시하면 화라도 덜 나지 않을까. 고개 숙인 그들의 대가리에는 아무런 무게도 실려있지 않음을 알기에 알만 왕국은 눈을 감아 버렸다.
"다녀오겠습니다."
"마틴 경만 믿겠습니다."
그림을 그리다 만 듯 새하얀 눈에 뒤덮여 소묘 같은 풍경을 보이던 영지에 초록색 물감이 조금씩 덧칠되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봉우리들 만이 흰 모자를 쓴 채 겨울의 마지막 존재감을 뽐내는 중이다.
봄이 오자 영지가 분주해졌다.
이 년 만에 재개되는 상행으로 인해 온 영지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봄바람을 타고 온 상행 열풍은 비단 지그하르트 영지에만 불어온 것이 아니었다. 에어로크 왕국 내의 모든 영지가 모으고 모은 철광석을 싸들고 알만 왕국으로의 상행을 서두르고 있었다.
"경제 동맹으로 관세까지 사라졌으니 지난 상행보다 더 큰 수익을 얻을 듯 합니다. 모두 도련님의 덕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월급은 못 올려 드린다니까요."
"..."
지난번 보다 더 큰 행렬이다. 무려 20대가 넘는 수레에 철광석이 가득 실린 채 출발 준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작년엔 상행으로 외국을 떠돌았고, 작년은 전쟁 한다고 외국 떠돌았는데. 이번엔 좀 쉬자.'
워낙에 변방에 있는 영지라 나갔다 하면 기본 반 년이었다.
없던 역마살도 생길 것 같은 기분에 카인은 이번 상행에 참여하지 않았다.
정식 동맹도 이루어졌고, 모든 영지에서 상행을 시작하니 위험한 일도 없을 것이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 카인이 마틴 경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사뭇 심각한 표정에 마틴 경이 눈치 좋게 고개를 꺾고 귀를 가져온다.
"...상행은 이 순위입니다."
"일 순위는 무엇입니까."
"정보입니다. 다나크 제국의 동향, 헤르트 왕국와 알만 왕국의 정보가 필요합니다. 에르딘과 파딘도 상관없습니다. 최대한 많은 정보를 모아서 돌아와 주세요."
"알겠습니다."
"특히 다나크 제국의 동향이 중요합니다. 마틴 경만 믿겠습니다."
"최대한 많이 모아 오겠습니다."
꼼꼼하고 신중한 성격의 그라면 충분히 좋은 소식들을 여럿 물고 오리라. 카인은 가볍게 마틴 경을 껴안고 마지막 배웅을 했다.
눈 인사와 함께 제자리로 돌아간 마틴 경이 이내 후작에게 보고를 마치고 천천히 행렬을 출발 시켰다.
수많은 영주민들이 길거리로 나와 행렬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전한 길임에도 늙은 노모의 표정엔 걱정이 한가득이다. 밝은 미소로 화답한 아들들이 대열을 맞춰 성 밖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우리도 슬슬 가자."
"예."
몸을 돌려 저택으로 향하는 카인 뒤로 시립해있던 엘라와 시아라가 고개를 숙이며 따라오기 시작했다.
"디아나와 루크는 잘 지내?"
"예. 체중도 많이 불었습니다. 특히 루크는 어린 나이에도 적응이 빨라 집사장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중입니다."
디아나 얘기는 없다. 앞을 보며 걷던 카인이 의아한 눈빛으로 엘라를 돌아 봤다.
"디아나는?"
"...총명하기는 한데, 허당기가 조금 있고 꾀를 부려 메이드장님께 자주 혼이 납니다."
"디아나가?"
뜻밖의 이야기였다.
자신 앞에선 늘 예의 바르고 발랄한 모습만 보여줬기에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하녀 일에는 영 소질이 없나 보네.'
"이따 디아나와 루크 좀 방으로 데리고 와."
몇 달 정도 저택에서 지내며 적응을 마쳤을 테니, 슬슬 스승님께 소개를 시킬 생각이었다. 봄이 오며 스승님의 기침도 많이 가라앉았기에 괜찮을 듯 싶었다.
디아나도 양반은 못 되는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저택으로 돌아온 그때, 저 멀리 복도에서 디아나가 종종 걸음으로 어딘 가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원래 양반이 아니긴 하지.'
쓸데없는 생각을 날려 보내고 카인이 입을 열었다.
"디아나!"
조금 거리가 있었기에 목소리를 높였는데 다행히 들렸는지 디아나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봤다.
"카인님!"
언제 봐도 발랄한 목소리다. 그 짧은 다리로 달려온 그녀가 카인의 품에 쏙 안겼다.
"히히. 부르셨나요?"
"할 말이 있어서."
품에 안긴 디아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카인이 미소를 지었다. 한창 사춘기가 와 자신을 어색하게 대하는 세나 보다 더 여동생 같은 느낌이다.
그때, 두 남매의 만남에 초를 치는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아나. 복도에서 뛰면 안된다고 몇 번을 말해야 하겠니. 그리고 카인님께 함부로 안기는 건 어디서 배운 버릇이야."
그 말에 카인이 그녀들을 바라봤는데, 표정이 엄하게 굳어있었다. 특히 엘라의 표정은 싸늘하다 못해 주변이 얼어붙을 기세였다.
"...죄송합니다."
슬금슬금 카인의 품에서 떨어진 디아나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카인을 바라봤다.
'제가 나쁜 짓을 저질렀나요?'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어릴 적 봤던 장화 신은 고양이를 보는 기분이다.
본능 적으로 꾀가 많다는 엘라의 말을 깨달았지만, 이미 손은 저도 모르게 디아나의 머리를 향하고 있었다.
귀여운 걸 어떡해.
엄마에게 혼나는 여동생을 달래듯 카인이 다시 머리를 쓰다듬으며 디아나를 변호했다.
"괜찮아. 여동생 같아서 좋은데 뭐."
그런데 카인의 그 말에 오히려 디아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흔들리는 공동이 마치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표정이다.
"여동생..."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