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왼쪽이
* * *
"이제 자자. 얼른 가서 갈아입고 와."
의심이 확신이 되고, 불안이 현실이 됐다.
나는 그녀들의 귀에 확신을 이야기하고 침대에 누웠다.
내 말에도 여전히 침대 가장자리에 무릎을 꿇은 채 가만히 있던 두 사람이 내가 침대에 눕자 그제야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진심이야?"
"응."
혹시나 해서 다시 물어오는 시아라에게 다시 한번 확답을 보냈다. 손에 들린 티팬티를 가만히 내려다 보는 엘라의 눈동자가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티팬티는 조금 너무 했나?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와 티팬티를 번갈아 바라보는 엘라가 애처로운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알까? 그런 모습이 오히려 나를 흥분 시킨다는 것을.
내 마음을 바꾸고 싶다면, 화를 내는 게 더 확률이 높을 것이다.
"얼른 자자. 피곤해."
"..."
"..."
핵폭탄을 투하해놓고 이젠 평온한 얼굴로 재촉까지 하고 있다. 내가 봐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뻔뻔한 모습이다.
그제야 내가 진심인걸 확인한 둘이 침묵에 잠겼다. 각자 선물 받은 속옷을 들고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한 명이 먼저 말을 꺼내면 동조할 생각일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엘라와 시아라 모두 화난 기색은 없었다. 단지 서로의 존재가 부끄러운 듯했다.
"...이건 안돼."
한참을 시아라와 눈빛을 교환하던 엘라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일반 속옷도 거부할 판에 티팬티라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처녀였던 엘라에게 무리였을 것이다.
"그럼 일반 속옷은 된다는 거야?"
"...그것도 안돼."
내 말에 다시 한 번 동공이 흔들렸던 엘라가 끝내 고개를 저었다.
"시아라는? 시아라도 싫어?"
"...응."
시아라 역시 엘라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둘 모두 내가 따로 줬으면 입었을 것이다. 게다가 시아라는 이미 한 번 선물을 받은 적이 있으니 더욱 승낙했겠지.
둘 모두 시무룩한 얼굴을 짓기 시작했다. 눈치도 없는 남자라고 욕하고 있지 않을까. 나와 같이 잠은 자고 싶은데 서로의 눈치가 보일 것이다.
나라고 그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동시에 속옷을 선물하면 당연히 거부 반응을 일으킬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 뿐이었다.
둘이 따로 방을 쓰면 하룻밤 걸러 내가 찾아갔겠지만, 둘 다 내 방에 딸린 작은 방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어떻게 따로 주고 따로 잔단 말인가.
그녀들 성격 상 절대 먼저 접근할 리는 없으니 차라리 내가 조금 눈치 없고 뻔뻔한 척 하는 게 맞았다.
내가 나쁜 놈 하고 그녀들을 설득하자.
"둘이 같이 있는 게 부끄러운 거지?"
"..."
상대방에게 의사 표현을 하는 방법은 여러가지다. 둘 다 입을 열지 않았지만, 표정을 보면 충분히 대답 중이었다.
나도 알고 그녀들도 아는 사실을 굳이 왜 물어봤냐고 하면, 그 다음 질문을 위한 빌드업이었다.
"그럼, 한 명만 와."
"...뭐?"
"하루 하루 돌아가면서 자자고. 누가 먼저 잘래?"
내 옆의 베개를 팡팡 치면서 물었다. 아까부터 난처한 요구만 열심히 던지고 있었다.
그래도 어떡해. 결국은 한 번 넘어가야 할 고비인데.
지금 이 순간은 내가 둘을 만난 순간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물론 나는 오늘 둘 중 한 명만 잘 생각이 없었다. 오늘 이 산을 못 넘으면 다음에 또 이 짓을 해야 한다. 그건 절대 사절이었다.
"참고로, 오늘 안 재울 거야. 많이 쌓였거든."
노골적인 섹스 어필에 두 사람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21세기 남자와 15세기 조선 시대 여인이 대화하면 이런 느낌일까.
애인이 애인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인데, 둘의 반응만 보면 저질 협박범이 된 기분이다.
"..."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두 사람은 엉덩이를 떼지 않았다. 결국 나 역시 기분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 무드가 없다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2대1의 상황에서, 그것도 부끄러움이 이렇게 많은 여자들을 도대체 어떻게 설득 시켜야 할까.
따로 할 상황도 아니었고, 할 장소도 없는데.
"내가 너무 나쁜 놈 같잖아."
"...그런 건 아니고."
"아까 소원 들어준다고 했지?"
결국 대화로 설득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을 꺼내 들었다. 설마 이런 일에 소원을 쓸 줄은 몰랐는지두 여인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그때, 엘라의 눈이 한 번 더 커지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아까 소원 이야기한 게 지금 이거 때문에...?"
역시 눈치가 빠르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곧 지금 내 행동이 계획된 일이라는 걸 뜻했다.
"엘라, 시아라 미안해. 무드 없다는 건 아는데, 내 머리로는 이게 최선이야. 그러니까 빨리 어쩔 수 없는 척 다녀와줘."
이 정도만 이야기 해도 눈치 빠른 둘이니 충분히 알아듣지 않을까.
영지로 돌아온 이후 내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스킨십을 최대한 자제했으니 말이다.
내 말에 잠깐 생각에 잠겼던 엘라와 시아라가 그제야 무언가 깨달은 듯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온 몸을 감싸던 민망함과 부끄러움을 걷어내고 나니, 그제야 내 말에 숨은 의미를 깨달은 듯했다.
'어휴...'
산 넘다 숨 넘어갈 뻔했다.
그때, 엘라가 무언가 결심한 듯 드디어 침대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섰더니 여전히 망설이는 얼굴을 한 시아라의 손을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드디어 마음을 먹었을까. 잠깐 사이에 얼굴이 잔뜩 붉어진 엘라가 나를 노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티팬티는 안돼."
"어, 언니? 어? 저, 정말로?"
그리곤 엉거주춤 서있는 시아라를 붙잡고 방으로 걸어갔다. 얼결에 언니 손에 잡힌 시아라가 연신 당황한 목소리를 내뱉으며 끌려갔다.
카인은 머리 뒤에 팔을 베고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건물의 천장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고 하겠다만, 현대와 이 세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전등의 유무였다.
건물 안에서도, 건물 밖에서도 이 세계가 내가 살던 현대가 아님을 처절하게 느껴야 했다.
달이 세 개인 천장에서 도망쳐 건물로 들어오면, 밋밋한 천장이 나를 반긴다.
"어, 언니. 가슴... 나는..."
"...카인이 내 사이즈는 어떻게..."
다 들린다.
제 딴엔 자기들끼리 속삭이는 소리 같은데, 고작 방과 방 사이에 문 하나만 덜렁 있으니 방음이 될 리가 없다.
"...가슴이 조금 끼는데."
"...나 안 나갈래. 언니 혼자 가."
결국 웃음이 터져 버렸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그녀들에게 집중하라는 걸까. 얼마 가지도 않은 상념이 그녀들의 목소리에 흐트러졌다.
웃음소리가 새어 나갔을까 봐 금방 소리를 죽였는데, 이미 눈치를 챈 듯했다.
"...지금 이거 카인 웃음 소리야..? 나 진짜 못 나가. 히잉..."
"...지금 네 말로 들렸을 텐데."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한 편의 콩트에 참았던 웃음이 다시 터져 나왔다. 시아라도 작은 가슴은 아닌데... 엘라에게 밀리긴 하지.
"우, 웃지 마!"
한참이 지나도 카인이 웃음을 멈출 생각이 없자 결국 문 너머에서 시아라의 울상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천장에 전등이 없으면 어때. 적어도 지금 생각할 거리는 아니었다. 일단은 그녀들에게 집중할 때다.
그때, 작은 문이 천천히 열리며 밝은 금발 머리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은은한 달빛이 머리를 비추며 머리카락이 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눈 감고 있어."
부끄러운지 눈을 내리 깐 엘라가 붉은 얼굴로 말을 했다.
시아라는 엘라보다 더 뒤에 있나? 눈을 안 감으면 평생 문 뒤에 숨어있을 것 같아 카인은 순순히 눈을 감았다.
시각이 마비되니 자연스레 청각이 예민해졌다. 끼익 하는 문소리와 함께 사브작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조심스레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 순간만큼 남자를 흥분 시키는 상황이 또 있을까. 벌써부터 분신이 크기를 키워가기 시작했다.
조심스레 다가온 발걸음이 침대 앞에서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두 갈래로 갈라진 발걸음 소리가 양 옆으로 들려왔다.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는지... 카인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오른 편에 서있던 누군가가 카인의 팔을 베고 눕더니 카인의 눈을 가렸다. 자연스레 팔을 안으로 접어 등을 감았는데 전혀 뜻밖의 감촉이 전해졌다.
손 끝으로 부드러운 등의 살결이 만져졌다. 등을 가로지르는 브래지어가 손의 감촉을 방해했다.
"설마... 속옷만 입고 온 거야?"
카인의 말에 눈을 가리고 있던 손가락이 순간적으로 파르르 떨렸다. 속옷 위에 얇은 옷을 걸치고 올 줄 알았는데... 이래서 눈을 감으라 했나?
한발 늦게 카인 왼쪽으로 침대에 올라섰던 누군가가 흠칫 멈췄다. 카인이 팔을 들어 침대를 탁탁 치니 그제야 몸을 움직여 팔에 머리를 베고 누웠다.
둘 다 속옷만 입고 나왔다. 이 웃긴 상황에 반사적으로 웃음이 튀어 나왔다.
"난 분명 갈아 입고 오라고 했는데 속옷만 입고... 읍!"
왼쪽에 있던 여인이 손을 들어 카인의 입을 막았다.
코는 안 막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간신히 생명 활동은 하게 해 준 두 여인에게 속으로 감사를 전하며 양 옆의 여인들을 꽉 끌어안았다.
어느 쪽이 엘라와 시아라일까.
가만히 머리카락을 쓰다듬었지만, 손으로는 색을 볼 수 없기에 구분이 가지 않는다. 내 몸에 안겨 가만히 손길을 받아들이는 두 여인의 정체를 맞추기 위해 손 끝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부드러운 등을 천천히 훑으며 허리까지 내려갔다. 낯선 느낌에 두 여자가 몸을 움찔 떤다. 마침내 등허리까지 도착한 손이 이동을 멈췄다.
그 밑의 언덕까지 떠나고 싶었지만, 팔베개를 하고 있는 탓에 여행 가능 구역이 아니었다.
그래도 아직 갈 곳은 많았다. 방향을 꺾어 옆구리에 도착해 가슴과 엉덩이 사이 오목한 계곡에서 부드러운 살결을 쓰다듬었다.
왼쪽에 누운 누군가가 간지러운지 몸을 살짝 비틀었다. 소리를 내면 누군지 알텐데, 작은 숨소리만이 귀를 간질였다.
시각을 차단 당한 상태에서 두 여인의 몸을 쓰다듬는 중이다. 아까부터 조금씩 커지던 분신이 흥분으로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옆구리를 천천히 훑으며 손을 위로 올렸다.부드러운 살결을 쓰다듬으며 올라간 손이 드디어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다.
부끄러움에 팔로 내 손을 막을 법도 한데, 둘 다 내 눈과 입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방해 없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
가슴을 가리는 얇은 천이 손의 감각을 흩트렸지만, 그 크기까지 숨길 수는 없는 법이다.
여행의 종착지에서 드디어 카인이 정답을 알아냈다.
카인이 재빠르게 브래지어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숨겨져 있던 가슴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흐읏...!"
"흐읍!"
동시에 양 옆에서 깜짝 놀란 두 사람이 신음성을 삼켰다.
작은 신음 만으로는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이미 가슴을 쥔 손이 아까부터 정답을 외치고 있었다.
"왼쪽이 시아라."
짝!
"아악!"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