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소원
* * *
네가 잘못한 주제에 양심도 없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양심에 걸렸다.
그러나 나는 오늘 꼭 그녀들에게 내가 준비한 선물을 입히고 싶었다.
엘라는 흰색, 시아라는 검은 색.
속옷 가게 주인이 보내는 경멸의 시선을 꿋꿋이 버티며 두 개 모두 구매했다.
한 가지 문제는 그녀들이 내가 준비한 속옷을 과연 입어주느냐가 문제였다. 그리고 그 다음 문제는 그녀들과의 잠자리 문제였다.
두 여인에게 같은 날 잠자리를 하자고 이야기하면?
'들어줄 리가 없지.'
절대로, 절대 가능성이 없었다. 더군다나 바로 오늘 낮까지 둘 사이는 최악을 달리고 있었기에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그럼 차례대로 밤을 보내야 하는데, 누구부터 한단 말인가.
'무조건 오늘 산을 넘어야 해.'
그녀들이 내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지금이 기회였다.
"시아라."
다시 한 번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흠칫 몸을 떤 그녀가 울상을 짓기 시작했다.
양심이 심장을 쿡쿡 찌르기 시작한다. 네가 사람 새끼야? 하는 소리가 어디서 들리는 것 같다.
그래도 안돼. 오늘 꼭 속옷을 입힐 거야.
대답은 엘라에게서 나왔다. 약하게 한숨을 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까 카인 네가 씻으러 갔을 때, 옷에서 향수 냄새가 나서 다른 여자를 만나고 온 줄 알았어."
"..."
"...아니면 창관에... 다녀 온 줄 알고..."
그러니까 나를 믿지 못했다는 소리였다.
향수에 대해 추궁할 생각이었던 둘은 그 향기가 자신들에게 줄 선물을 고르느라 밴 냄새라는 것에 미안해 하는 중이었고.
"미안해."
결국 엘라가 고개를 숙였다. 이미 시아라의 눈은 눈물이 글썽글썽하다.
'미안해 할 필요 없는데.'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나 같아도 오해하지 않았을까. 화는 전혀 나지 않았다.
"시이라, 엘라."
"...응."
둘이 동시에 대답해왔다. 여전히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내 얼굴을 보며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여기서 더 화를 내면 오히려 악효과다. 분명히 시아라를 울 것이고, 울고 있는 여자에게 속옷을 건넬 수는 없다.
"일로 와. 둘 다."
침대 가장자리에 서서 둘을 불렀다. 가만히 침대에 앉아있던 둘이 내 말에 천천히 무릎을 끌어 다가왔다.
'아이고... 귀여워.'
눈물이 글썽거리는 시아라가 입을 삐죽이며 조금씩 다가왔다. 토라진 햄스터같은 얼굴에 미소가 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엘라 역시 처진 눈썹으로 다가왔다. 감정 표현이 적어 티는 잘 안 나지만, 느끼는 감정은 시아라와 별반 다를 것이 없을 터다.
저렇게 감정 표현이 적은 여자가 오늘 밤 쾌락에 얼굴이 무너질 예정이다. 벌써부터 분신이 불끈 거리는 느낌에 다시 한 번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두 명을 두고 내가 다른 여자를 왜 만나."
무릎 걸음으로 내 앞까지 다가온 둘을 껴안았다. 양 볼에 그녀들의 얼굴이 느껴진다. 평소와 달리 풀어헤친 머리가 귀를 간질였다.
"...흑. 미안해애..."
화를 낼 줄 알았던 내가 포옹을 해서 일까. 결국 시아라가 눈물을 흘리며 나를 껴안았다. 흐느끼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상대로였다면 그녀들이 침대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고, 나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를 했을 때인데, 어쩌다 보니 상황이 정반대가 됐다.
"내가 둘 다 좋아하는 거 알지?"
"..."
그 말에 엘라도 가만히 내 품을 안았다. 단단한 가슴팍에 여인들의 부드러운 가슴이 뭉개진다.
혹시나 이상한 낌새를 느낄까 허리를 조금 뒤로 뺐다.
다 잡은 기회를 어이없게 놓칠 수 없다.
가만히 두 여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시아라가 진정하길 기다렸다. 그녀가 울고 있는데 속옷을 꺼낼 만큼 뻔뻔하지는 못했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시아라가 금방 울음을 멈췄다.
그 때, 내 품에 안겨 가만히 시아라를 바라보던 엘라가 갑자기 손을 뻗어 시아라의 팔을 잡았다.
"...?"
그런데, 표정이 조금 비장했다.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시아라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마주 보는 시아라 역시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사뭇 표정이 비장해졌다.
뭘 하려고 둘이 신호까지 보내지?
"둘이 뭐 하는..."
쪽
양 볼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깜짝 놀라 고개를 떼고 둘을 바라보니 엘라의 얼굴이 사과처럼 빨갛다.
"미, 미안해..."
"..."
시아라도 아니고 엘라가 먼저?
먼저 뽀뽀를 한 주제에 왜 그렇게 부끄러워 하는 거야.
나지도 않은 화가 사르르 풀리는 기분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예전에 유모가... 필살기라고..."
그런 건 왜 묻냐는 듯 원망스러운 눈초리를 한 엘라가 우물쭈물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크흡."
결국, 웃음이 터져버렸다. 뽀뽀는 커녕 평소에 손도 먼저 잡지 않던 그녀가 애교를 부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귀여워 귀여워 했더니, 오늘 따라 엘라도 귀엽다.
"다음에 또 해줘."
"..."
웃으며 말하는 나를 보며 엘라가 다행이라는 듯 안도한 표정을 보이면서도 대답은 하지 않았다. 여전히 얼굴이 벌건 게 부끄럽긴 한 가 보다.
이런 여인들한테 화난 척을 하고 있기가 더욱 힘들었다. 그냥 이대로 잘까 고민했다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 속옷이 침대 밑에 잠들어 있다.
미소를 지우고 정색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아까보단 더 밝은 목소리로 연기하는 톤이었다.
"그건 그렇고, 아직 화 덜 풀렸는데."
"...응?"
내 말에 시아라의 눈이 동그래진다. 엘라 역시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둘 다 나한테 많이 미안해?"
"응... 미안해.."
"그럼, 내 소원 하나만 들어줄래?"
"소원?"
내 말에 둘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자신들을 용서해줬으니 충분히 들어주겠다는 표정이다.
"소원이 뭔데?"
"그건 이따 이야기 해줄게."
궁금한 얼굴로 물어오는 엘라의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밑밥은 거의 다 깔렸다.
드디어 침대 밑에 잠들은 선물을 꺼낼 시간이 다가왔다.
"그리고... 아직 선물 하나가 더 남았어."
포옹을 풀고 둘을 떼어냈다. 내 말에 두 여인의 눈이 더 커졌다.
약하게 미소 지으며 몸을 숙여 침대 밑에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천으로 포장된 선물이 손끝에 잡혔다.
예전 헤르트에서 속옷을 선물 받고 당황하던 시아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엘라는 어떻게 반응 하려나?
기대감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엘라의 속옷은 무려 두 개다. 저번 헤르트에서 받은 시아라 몫까지 포함해서 두 개.
게다가 한 개는...
"...흣."
고급스러운 천으로 포장된 두 상자를 꺼내 두 여인에게 건네주자 무언가 떠오른 듯 시아라의 안색이 살짝 창백해졌다.
결국 웃음이 다시 터졌다. 여전히 의아한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보는 엘라에게 입을 열었다.
"열어봐."
내 말에 희고 고운 손이 천을 푸르기 시작했다. 선물을 푸는 건 엘라인데 설레는 건 내가 설렌다.
"카인... 설마."
"시아라. 너도 열어 봐."
"..."
내가 아무 말 없이 다시 한 번 재촉하자 의심이 확신이 된 듯 창백해지던 안색이 더 창백해진다.
그때, 엘라가 짧은 경악성을 터트렸다.
"카, 카인... 이게..."
"선물이야."
잠깐 시아라를 바라본 사이 포장을 다 푼 엘라가 순백색의 속옷을 든 채, 경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손이 벌벌 떨리는 게 확실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진심이야?"
"시아라는 이미 받은 적 있어."
내 말에 엘라에 고개가 휙 돌아갔다. 여전히 포장을 가만히 들고 있는 시아라가 엘라를 마주 봤다.
"싫어?"
"...이건 조금... 아, 아니야. 맘에... 들어."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짓던 엘라가 내 표정을 보더니 말을 바꿨다. 평소 같았으면 싸늘하게 반응했을 텐데, 찔리는 게 많으니 강하게 거부하기 힘들어 보였다.
'그래서 지금 주는 거야.'
때 마침, 포장을 다 푼 시아라 역시 조용히 검은 속옷을 들어 올렸다. 두 번째이니 익숙해질 만도 한데, 여전히 부끄러운지 얼굴이 붉다.
두 여인이 각자 속옷을 든 채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혼자 받았다면 얼굴을 붉혔을 텐데, 옆에 누군가 있으니 반응하기가 민망해 보였다.
"일부러 깔 맞춤 했는데, 마음에 들어?"
"..."
"..."
속으로 미친 놈이라고 욕하고 있을까. 어처구니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둘의 시선에 다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무튼... 고마워."
잠시 고민하던 엘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무 뜻밖의 선물인 듯 여전히 하얀 속옷을 든 손은 망부석처럼 굳어있었다.
아직 끝이 아닌데.
"엘라 네 건 두 개야."
"뭐?"
"예전에 시아라에게 선물 해줬으니까 똑같이 하나 더."
"..."
그렇다기엔 엘라 손에 들린 속옷의 두께가 시아라의 속옷보다 별다른 것이 없어 보인다. 의아한 눈으로 손에 들린 속옷을 들었는데, 무언가 조그마한 천 조각이 침대 위로 툭 떨어졌다.
엘라가 떨리는 손으로 작은 천 조각을 들어 올리자 자연스레 펼쳐진 작은 천 조각이 제대로 된 형태를 세 사람 앞에서 뽐내기 시작했다.
"..."
"..."
"마음에 들어?"
내 말에 두 여인의 시선이 홱 돌아왔다. 아까부터 동그랗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가장 신중하게 골랐던 디자인이었다. 폐쇄적인 이 세계에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한 그 디자인에 저절로 손이 갔었다. 속옷 가게 주인의 경멸 어린 시선을 더하는데 한 몫 하긴 했지만, 충분히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는 디자인이었다.
"카인... 이거 티팬...티야?"
얼음처럼 굳어있는 엘라를 대신해 시아라가 물어왔다.
"검은 색은 없더라고. 미안해. 시아라 네 건 다음에 사줄게."
"..."
내 말에 시아라 역시 넋이 나간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오늘 가장 깊은 침묵이 방 안을 휩쓸었다.
가터벨트 같은 건 없을까.
나중에 수도로 가면 한번 들려봐야겠다. 아니면... 시아라에게 만들어 달라고 할까?
여전히 굳어있는 두 여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제 소원을 쓸 차례다.
두 여인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머리카락이 다시 얼굴을 간질였다.
천천히 귓가로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자자. 얼른 가서 갈아입고 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