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더 좋은 방법
* * *
늦은 밤의 저택은 또 다른 분위기를 풍겨낸다. 일렁이는 등잔 불이 복도를 희미하게 비추고, 층마다 집사가 복도를 걷고 있다. 이 세계로 넘어온 지 이 년이 다되어 가지만, 어두운 저택의 복도는 마치 공포 게임에 들어온 느낌에 여전히 오싹했다.
양손에 그녀들에게 줄 선물을 한가득 들고 있었기 때문에, 들키지 않게 카인은 일부러 늦게 저택으로 돌아왔다.
내일이 되면 조금은 화가 풀리지 않았을까. 그때 그녀들에게 사과과 함께 선물로 용서를 빌 생각이었다.
품에 안긴 선물을 들고, 천천히 복도를 걸어 방으로 도착했다.
"..."
조심스레 방문을 여니 책상 위에 작은 촛불만 일렁이고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방 한 쪽에 있는 또 다른 문을 바라봤다.
저 곳에서 시아라와 엘라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아마 자고 있지 않을까.
혹시나 자신의 인기척에 그녀들이 깰까 더 조심스레 방문을 닫고 최대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품에 들은 선물을 침대 밑으로 넣고나니, 이제 좀 초조함이 풀린다.
하루 종일 밖에 있었더니 조금 피곤하다. 고개를 한 번 돌려 목을 풀고는 그녀들이 있는 방문을 바라봤다.
가볍게 씻고 자야지. 두터운 털 옷과 셔츠를 침대 위에 던져 놓고 욕실로 들어갔다.
카인이 바라봤던 그 방문 바로 뒤엔 시아라와 엘라가 방 밖의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가 화를 내며 저택을 나갔는데 속 편히 자고 있을 리가 없었다.
혹시나 지금 나갔다가 그가 화를 낼까 무서웠다.
"...언니. 나갈 거야?"
시아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엘라를 바라봤다. 카인이 화를 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시아라는 반쯤 패닉인 상태였다. 어떻게 그의 화를 풀어주지... 그 앞에서 울면 안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마주할 용기가 사라졌다.
"조금 이따 나가자."
그에 반해 엘라는 조금 여유가 있었다. 처음으로 유모에게 배웠던 신부 수업 중 하나를 써먹을 일이 생겼다. 그러나 그 효과에 대해선 여전히 의구심이 들었다.
'혹시나 남편을 화나게 했다면, 제가 지금 말씀드린 이 방법을 꼭 써보세요.'
신혼만 할 수 있는 필살기라고 신신당부하던 유모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와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비슷한 분위기이니 효과적이지 않을까.
자신보다 어린 남자에게 애교를 부리라니... 엘라는 벌써부터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부스럭거리며 천이 마찰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욕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지금 나가자."
그가 있는 방에 들어가는 것보다 미리 나가있는 게 더 쉽다. 시아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방문을 열었다.
침대에 그가 벗어 놓은 옷가지가 널브러져 있었다. 둘은 습관적으로 그 옷을 정리하기 위해 다가갔다 동시에 동작을 멈췄다.
"..."
"...언니. 이거 혹시..."
시아라가 그의 털 옷을 든 채 굳은 얼굴로 엘라를 바라봤다.
부드러운 꽃 향기가 희미하게 흘러나온다. 카인이 쓰는 향수도, 남자가 쓸 향수도 아니었다. 자신들이 쓰는 향수는 더더욱 아니었다.
'아...'
두 여자는 동시에 눈을 감았다. 다른 여자가 생긴 건지, 아니면 대낮부터 창관을 다녀온 건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엘라는 분노를 시아라는 슬픔을 느꼈다.
물론 그녀들은 카인이 향수를 시음하다 밴 냄새 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녀들의 발 밑에 그 향수가 있다는 것도.
"이건... 카인이 나오면 물어보자."
"...모른 척 해야 하지 않을까?"
엘라의 말에 시아라가 마주 대답했다.
그녀는 카인의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웠다. 차라리 모른 척 하면 안될까. 실수라고 넘기면 안될까.
그러나 엘라는 고개를 저었다. 꼭 걸고 넘어가야 할 일이었다. 시아라처럼 자신 역시 카인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서운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정말 자신들이 생각하는 걱정이 사실이라면, 카인에게 단단히 실망하지 않을까.
사과는 사과고, 아닌 것은 아니다.
그의 바람기까지 눈감아 주기엔 공주로써의 자존심은 이미 충분히 무너진 상태였다.
우선, 그가 오기 전에 옷가지를 정리했다. 연신 불안한 얼굴을 내보이는 시아라의 손을 꼭 잡고 침대에 올라 앉았다.
향수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할까. 사과를 먼저 할까. 고민하다가 사과를 먼저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의 화가 조금 누그러지면 향수의 원인에 대해 추궁해도 사과하지 않을까.
그때, 욕실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던 둘은 자연스레 행동을 멈추고 소리가 난 쪽을 가만히 바라봤다.
"...와아악!"
부드러운 천으로 머리를 털며 방으로 들어온 카인이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침대에 머리를 풀어헤친 귀신이 앉아있었다. 그것도 둘이나.
'시아라? ...엘라?'
심장마비에 걸릴 뻔했다. 떨어진 심장을 다시 주워 올리고 입을 열었다.
"...말을 해야지.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방바닥에 앉은 채로 그녀들에게 하소연을 했다. 침대 밑의 상자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다행히 발견은 못한 듯싶다.
"..."
"..."
조금 더 심각한 상황을 예상했던 두 여인이 갑작스러운 카인의 몸개그에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웃으면 안돼.
방금 전만 해도 그의 옷에 묻은 향수 냄새에 심각했는데, 처음부터 분위기가 깨졌다.
두 여인이 말이 없으니 카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 안자고 있었어?"
지금 바로 사과를 해야 할까. 아직도 안 자고 자신을 기다렸다고 생각하니 더 미안했다.
아니다. 적어도 이 자세로는 아니었다.
우선 자리에서 다시 일어났다. 그녀들이 앉아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자연스럽게 가운데로 들어가 누운 다음, 그녀들에게 손을 벌렸다.
포옹을 하고 사과를 하면 조금 더 낫지 않을까. 그녀들이 품에 안기길 거부하면 다시 침대로 내려가 무릎을 꿇을 생각이었다.
우선, 그녀들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르기 때문에 말로 끝낼 수 있다면 그러길 바랬다.
"..."
"..."
정말 다행히도, 카인의 뜻밖의 행동에 놀란 표정을 짓던 두 여인이 서로를 잠시 바라보더니 벌린 팔 안으로 들어왔다.
부드러운 육체가 양 팔 사이로 느껴진다. 품 안에 들어온 그녀들을 더 강하게 껴안았다. 자연스러운 반동으로 그녀들 역시 카인의 몸 위에 팔을 올렸다. 그의 가슴 위에서 두 여자의 손이 만났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지.'
한 방에서, 한 남자와 두 여자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동상동몽일까. 우스꽝스럽던 첫 대면으론 부족했는지 방 안이 다시 침묵이 돌기 시작했다.
"...카인. 미안해."
가장 먼저 용기를 낸 사람은 뜻밖에도 시아라였다. 그녀는 벌써부터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카인의 따스한 품에 다시는 못 안길 줄 알았는데... 먼저 손을 내민 그에게 고마웠다.
"...뭐?"
"카인이 그 동안 우리 둘을 믿고 기다렸는데... 실망 시켜서 미안해."
"..."
"이제 언니랑 오해도 다 풀렸어... 그니까 화 풀어."
그 말과 더 깊숙이 안겨오는 시아라를 느끼며 카인은 혼란에 빠졌다. 사과는 자신이 해야 하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나도 미안해. 언니로써 먼저 다가갔어야 했는데..."
시아라에게 질 수 없다는 듯 엘라도 한 마디 거들며 카인을 꼭 껴안았다. 굳은 얼굴로 대답이 없는 그의 반응에 두 여인은 화가 덜 풀렸나 안절부절 하기 시작했다.
'...이거 생각보다 일이 재밌어졌는데?'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카인이 드디어 이 상황을 이해했다. 그녀들을 볼 낯이 없어 자리를 피했는데, 오히려 내가 화가 난 줄 오해하고 있었다.
양 팔로 두 여인의 부드러운 몸을 만지며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나갈까 고민에 빠졌다.
자신 역시 사과를 하며 끝낼 수 있지만...
'...!'
더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두 여인을 바라봤다.
혹시 오늘...
머리를 팽팽 돌리며 계획을 짰다.
****
"오늘은 실망이 컸어."
차가운 목소리가 조용한 방 만에 퍼진다. 싸늘한 냉기가 풀풀 피어오르는 내 목소리에 몸을 기댄 두 여인이 움찔 떨었다.
그러나 손은 한 없이 다정하게 등을 쓰다듬었다. 화는 났지만 여전히 그녀들을 사랑한다는 듯 부드럽게 손을 움직였다.
냉랭한 목소리와는 정 반대의 손길에 둘은 더욱 미안함이 커지는지 두 여인의 눈썹이 팔자로 휘기 시작했다.
그녀들이 자신에게 미안해 하면 할수록 더욱 더 부탁을 잘 들어주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금이 향수를 줄 타이밍이다.
"잠시만."
품에 안긴 그녀들을 떼어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엘라와 시아라도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아예 침대 밖으로 나가 침대 밑에 손을 넣으니 작은 상자가 만져졌다. 한 손에 들어가는 작은 상자가 두 개다.
연한 보라색 천으로 포장된 고급스러운 상자를 가만히 쳐다보다, 엘라와 시아라에게 내밀었다.
"이건 시아라꺼, 이건 엘라꺼."
"이게 뭐야?"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용서의 선물이 자비의 선물로 탈바꿈 되어 그녀들에게 넘어갔다.
의아한 눈으로 상자를 바라보던 두 여인이 고급스럽게 포장된 상자를 열었다.
"..."
"..."
그런데, 반응이 조금 이상하다. 천천히 뚜껑을 연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듯 깜짝 놀란 엘라와 시아라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정확히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자신이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다.
'우리에게 화가 났는데도 이런 선물을 준비해주다니... 감동이야' 같은 반응을 기대했는데, 뭔가 이상하다.
"반응들이 왜 그래? 마음에 안 들어?"
"아니. 미안해. 카인 우리가 오해 했었..."
탁
카인의 말에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던 시아라가 다급히 제 입을 막았다. 옆에 있던 엘라의 눈이 똥그래진다.
...분명히 뭔가 있다.
"오해?"
도리도리
내 물음에 시아라가 여전히 입을 막은 채 고개를 흔들었다.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온 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
시아라가 이렇게 반응하니까 더 궁금해지는데.
어떻게 해야 시아라가 입을 열까.
말하라고 재촉해볼까?
아니다. 그녀의 반응을 보면 평범한 방법으론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럼
조금 쓰레기가 되는 기분이지만, 시아라의 입을 열 방법은 이것 뿐이었다.
이 몸의 장점이다 단점은, 무표정을 연기하면 한 없이 냉랭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이었다.
날카로운 눈매가 싸늘하게 그녀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또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느냐고 추궁하는 눈빛이다.
역시나.
내 표정을 본 두 여인이 동시에 안절부절 하기 시작했다
* * *